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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대구의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 정연지 (지은이)
국토
18,000원

일반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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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대구의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근현대사 > 일제치하/항일시대
· ISBN : 9791188701087
· 쪽수 : 247쪽
· 출판일 : 2019-01-01

책 소개

1919년 대구에서 일어난 3·1운동의 내용, 3·1운동 관련 유적, 3·1운동 직후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대구 인물들의 활동과 유적을 전국 상황과 맞추어가며 해설하는 책이다.

목차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대구3·1운동 주요 유적
일제의 침략과 의병의 봉기
1910년대의 독립운동과 대구에서 결성된 대한광복회
3·1운동의 역사적 의의
대구의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대구 출신 임시정부 소속 독립운동가와 그 유적)
일제 강점기 10대 청소년들의 독립운동
자료 : 대구의 지역별 독립운동 유적
부록 : 조선 후기∼1945년 연표·약사

저자소개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 (지은이)    정보 더보기
우리나라 유일의 독립운동가 전용 국립묘지 신암선열공원을 최초로 해설한 책 <신암선열공원>을 펴낸 민간단체로, 대구독립운동기념관 건립과 경술국치일 국가추념일 지정 등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 2018년 8월 25일에는 대한광복회 창립 108주년 기념식을 결성지인 대구 달성공원에서 최초로 거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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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지 (지은이)    정보 더보기
홍익대 일반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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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이현수李賢壽는 1896년 7월 26일 달성군 화원면 명곡리 686번지에서 출생했다. 1915년 3월 계성학교를 졸업한 그는 평양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했다.
그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은 1917년 9월 중국에 가서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사귀게 된 데서 유래한다. 1919년 3월 국내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모친 별세 기별을 받고 잠시 귀국했던 그는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된다는 사실을 듣고 다시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1920년 4월 임시정부 재무부 서기가 되었는데, 그 길로 바로 임시정부 산하의 무관학교에 입학하여 대략 여섯 달 동안 훈련을 받았다.
1920년 8월 이현수는 임시정부의 지시를 받고 국내에 잠입했다. 그의 임무는 독립운동 관련 문서 배포, 독립공채 모집, 방한하는 미국 의원단에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일 등이었다.
국내에 들어온 그는 달성군 유가면의 이상철, 화원면의 임원조, 가창면의 이경만에게 국내 연락기관 책임을 맡겨 활동하게 하는 한편, 외국인 선교사를 통해 미국으로 독립 청원서獨立請願書를 발송했다. 또 자신이 발행한 영문 잡지 《자유》를 비밀리에 전국 각지의 선교사들과 언론사에 배포했다.
그는 또 달성군 달서면 출신의 정덕진丁德鎭과 함께 대구와 경북 각지의 친일파 군수 · 면장 등 관리들과 부호들에게 경고문, 물품 불구매 고지서物品不購買告知書(일제와 친일파들이 판매하는 물품을 사지 않겠다는 통지서), 납세 거절 협박문納稅拒絶脅迫文 등을 발송하는 한편 이를 대구 부내府內(요즘의 시내) 길거리에 살포하여 반일 애국정신을 고취하고 독립군 군자금을 모집하는 일에 힘썼다.
1923년 1월 24일 일제 경찰의 포위망에 포착되었다는 사실을 미리 감지한 그는 일단 자수를 하였다. 이때 관련자 42명도 함께 체포되었는데 이현수는 1924년 5월까지 복역한 후 석방되었다.
1925년 4월 이현수는 장남 이정호李貞浩(1913∼1990)를 데리고 다시 중국으로 갔다. 이현수는 김구가 1930년에 조직한 한국독립당 광동 지부의 상무위원으로 있으면서 기관지 《한성》을 발행했고, 1938년에는 무정부주의 단체 조선혁명자연맹과 공산주의 계열의 조선민족해방동맹이 남경에서 창립한 조선민족전선 산하의 군사 조직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 조직에서 기관지 편집위원회의 주임으로 일했다.
1942년 이현수는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참여하게 되자 임시정부의 외교연구위원에 선임되었고, 1943년에는 임시정부 법무부 차장을 맡았다. 그 후 1945년 1월에는 내무부 차장, 5월에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정훈처장을 맡았다.
장남 이정호도 1942년 10월 임시정부 의정원 경상도 의원에 선출되고, 1943년 외무부 총무과장, 1944년 외무부 정보과장 등을 맡아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당시 차남 이동호는 화북에 주둔 중인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1945년 해방을 맞으면서 3부자는 이산가족이 되었다. 환국한 이현수는 조선대중당을 조직하여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통일 운동을 하였다. 1950년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납북되었는지 월북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국가보훈처 누리집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그의 이름이 없다.
1948년 총무처 정훈국장 등을 역임한 장남 이정호는 그 이후 영남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근무했다. 정부는 1990년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차남 이동호는 해방 후 북한으로 귀국하였다.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 일부 단원들은 경북 영주 풍기의 '광복단'과 통합하여 '대한 광복회'를 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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