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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89534523
· 쪽수 : 272쪽
· 출판일 : 2024-07-16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1 유년의 기억
새벽 수돗가
개천
계수나무집
금남시장의 진석이
서울의 달
용순이 누나의 짐 자전거
구루마, 휠처, 휠체어
때로는 빌지 말고 싸워라
얼빠진 늑대
2 뜨겁던 청춘
눈물
동환이의 썬데이 서울
추석의 차용필
불판
순대
50년 그리고 한 달
우주의 나비
허장강 아저씨
뽀빠이 삼촌
선학알미늄
3 그리운 그 집
겨울 아침 배춧국
구운 김
김밥
수두
새벽, 삼양라면
수제비
음석은 쪼매 버리더라도 남는 기 낫데이
변두리 찬스
삼류 극장
‘얼음’이 아니고 ‘어름’
이발 학원
그대 다시는 그 집에 가지 못하리!
에필로그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 프롤로그
나는 금호동에서 25년을 살았다. 1970년에 서울로 이사 와 다섯 살 때부터 살았던 금호동 산동네와 시장은 내게 세상 전부였다. 대학을 마치고 한동안 외국을 떠돌다 돌아왔지만 내게 한국이란 금호동을 뜻했다. 금호동은 서울에서 유명한 달동네였다. 1960년대 말, 수많은 사람이 서울로 몰려들었다. 이때 고향을 떠난 이주민들과 도시 빈민들이 자리 잡은 대표적인 지역이 금호동이다. 내 아버지도 여섯 식구를 데리고 금호동에 자리를 잡았다. 일흔이 넘은 노모와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걷지 못하는 나를 데리고 고향을 떠난 아버지에게 금호동은 조금 더 나은 삶을 꿈꿀 수 있는 몇 개 남지 않은 선택지이기도 했다.
그 시절 금호동에는 상하수도 등 기본적인 생활환경이 말할 수 없이 열악했지만 그래도 사람이 사는 동네였다. 낮에는 쓰레기와 오물이 사방에 널렸지만, 저녁이 오면 어둠이 더러운 것들을 가리고 백열등 불빛이 산동네를 채웠다. 한 지붕 아래 서너 가구가 하나의 화장실과 수도를 나눠 쓰며 살아도, 저녁이면 밥 짓는 냄새가 퍼졌다. 그곳도 누군가는 따뜻하게 쉴 수 있는 집들이 모인 곳이었다.
그동안 15년이 넘게 다른 나라에서 살았지만, 정작 나의 정체성과 자아가 만들어진 곳은 바로 이 동네였다. 금호동에서 자라면서 겪었던 경험이 미국과 홍콩을 떠돌면서 공부하고 대학에서 가르치며 얻었던 것보다 내게 더 생생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런 금호동이 점점 변하고 있다. 도시 재개발이 진행되며 내가 기억하는 금호동은 점점 사라져 갔다. 이제 예전의 모습을 간직한 곳은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나의 자아가 만들어진 이 동네와 여기서 만났던 사람들 얘기를 쓰고 싶었다. 나의 옛날이야기를 품은 이 동네의 기억이 다 사라지기 전에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이 책의 글들은 나의 성장기이다. 실제 이야기이면서 허구이기도 하다. 내가 만난 여러 사람의 모습을 한 인물에 담기도 했고, 한 사람의 모습을 여러 인물에 나누어 담기도 했다.
어린 시절, 식구들이 모두 잠든 한밤중에 나 혼자 잠이 깼다. 아무리 뒤척여도 잠이 오지 않으면 작은 툇마루에 앉아서 밤하늘을 보았다. 하늘엔 늘 달이 있었다. 비가 오거나 바람 부는 날에도 어김없이 달이 있었다. 그건 내 마음에 뜬 달이라서 그럴 것이다. 달은 낮부터 떠 있었을 것이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동안 보일 듯 안 보일 듯 서서히 떠오른 달은 해처럼 눈부시진 않았어도 세상이 희미하게 보일 만큼은 빛을 비췄다. 우리는 때로 외롭다. 혼자 살면서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어울려 살면서도 외로워한다.
사람들은 늘 희망만 생각하며 살지 않는다. 희망을 잃기도 하고, 잊기도 하며, 때로는 거추장스러워서 내팽개치기도 한다. 그래도 한밤중에 하늘에 걸린 달을 보면 외로움을 잠시 잊을 수 있다. 달은 눈부시게 밝지는 않아도 내일도 그럭저럭 살만할 거라고 말해 주었다. 달은 사람들이 희망을 품을 수 있을 만큼만 빛을 비춘다. 그러면 사람들은 거추장스러워서 팽개쳐 버릴까 살짝 망설였던 희망을 주섬주섬 다시 담는다. 산다는 것은 이렇게 다시 희망을 주워 담는 일인 것 같다. 세상이 어둡게 보일 때에도 달은 어디선가 틀림없이 사람들을 비추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책에 달과 가장 가까운 산동네를 비추던 달빛의 기억을 담았다.
기억이라는 게, 내 나이쯤 되면 천상병의 시처럼 해맑게 남거나 흑백사진의 기형도처럼 심연으로 가라앉으며 지나갈 줄 알았다. 그런데, 잊고 있던 오래전 모습들이 마치 금홍이가 외출하면 혼자 방을 지키던 이상이 화장품 병뚜껑을 만지작거리던 몽환적인 느낌으로 한 번씩 내게 돌아온다. 일곱 살의 내가 수돗가에 쪼그리고 앉아서 지금의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이제 알았다. 나는 나를 다시 만나려 살고 있다는 걸.
진석이가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슬프거나 눈물이 나진 않았다. 기억이 아련하지만, 난 그때 화가 났던 것 같다. 슬프거나 기쁜 기억은 생생하게 살아남지만 화가 났던 기억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몸에서 나는 땀처럼 솟아난다. 이마의 땀을 닦아도 등에는 여전히 땀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