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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세계의 소설 > 이탈리아소설
· ISBN : 9791190234337
· 쪽수 : 248쪽
· 출판일 : 2023-10-24
책 소개
목차
도시의 마지막 여름|15
리뷰
책속에서
결국 항상 이런 식이다. 어떻게든 자신을 지키려고 애쓰다가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끝장으로 치닫게 만드는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 같은 경우에는 다행히 그 치열한 경주에서 기꺼이 제외될 수 있었다. 이곳에 막 도착해 출발점에 선 사람부터 결승점에 도달한 사람까지 온갖 부류를 알고 있었는데, 다들 얼마 후에는 하나같이 불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는 것을 보고 인생은 그저 방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만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년 초봄 어느 비 오는 날처럼 돈도 없는데 불운까지 겹친 현실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날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흘러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어쨌든 내가 그 누구에게도 나쁜 감정 따위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은 확실하다. 내게 주어진 운명이 있고 그것을 따라 살았을 뿐이다. 그게 전부다.
나는 매일 바다를 보러 갔다. 주머니에 책 한 권을 찔러 넣고 오스티아행 지하철을 타고 가서 해변의 어느 작은 트라토리아에 앉아 거의 온종일 독서를 했다. 그리고 다시 시내로 돌아와 나보나광장 주변을 배회하곤 했다. 그곳에서 친구 몇 명을 사귀었는데, 그들은 모두 나처럼 배울 만큼 배웠고 불안하지만 기대에 찬 얼굴로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방황하고 있었다. 로마는 우리의 도시였고 우리에게 관대했으며 우리를 달래 주었다. 나 역시 실직한 이후 불규칙적인 일로 돈벌이를 하며 몇 주째 제대로 된 식사 한 번 못 하고, 누렇게 바래고 삐걱거리는 가구 몇 개가 전부인 음습한 여관방을 전전해야 했지만 로마는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로마라는 도시는 기억을 태워 버리는 특별한 성질을 갖고 있기에, 그 시절을 돌이켜 보면 아주 소수의 인물과 장소, 일에 대한 기억만 또렷이 남아 있다. 도시라기보다 꼭꼭 감추어 두었던 짐승 같은, 우리의 은밀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어여쁜 짐승은 언제나 사랑을 갈구하기에, 최고의 사랑이 아닌 어중간한 마음으로는 이곳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 남부의 푸르고 가파른 길이든 울퉁불퉁하게 뻗은 북부의 도로, 혹은 저 깊은 영혼의 심연이든 그 출발지를 막론하고 로마를 찾는 사람들에게 부과되는 유일한 통행료는 사랑, 오직 이것 하나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