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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책읽기/글쓰기 > 글쓰기
· ISBN : 9791190351386
· 쪽수 : 280쪽
책 소개
목차
서문 — 스승과 벗 그리고 텍스트와 청년 등에 관한 농(弄, 濃)담_문성환
프롤로그
무기력한 청년의 연암 읽기 _ 이윤하
우리는 인연이로소이다 _ 원자연
흉내가 아닌 닮아 감 _ 남다영
1부 _ 나, 청년 : 연암을 통해 보게 된 나
반세대적 글쓰기를 해보자 _ 이윤하
시간이 부족하다면 _ 이윤하
속박이 아니라 필연이 되는 이름 _ 이윤하
열녀, 치열한 삶의 길을 간 여인들 _ 이윤하
죽음은 슬프지 않다 _ 이윤하
나‘만’이 아닌 ‘나’를 사랑하는 길 _ 원자연
진짜(眞)가 아닌 다름(異)을 _ 원자연
홀로 있을 때 나타나는 적을 상대하기 _ 원자연
배움은 생존이다 _ 원자연
간결해서 보이는 것 _ 남다영
어리석다고 들을수록 기뻐하는 자 _ 남다영
2부 _ 나와 너, 친구 : 연암에게 배우는 관계론
보이는 것 너머 _ 남다영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서 _ 이윤하
알 수는 없지만 만날 수는 있다 _ 이윤하
‘마음’으로 사귀고, ‘덕’으로 벗하라 _ 원자연
자신의 선을 어필하라 _ 원자연
사이, 만남이 만드는 그 찰나의 세상 _ 원자연
우리는 서로 힘입어 사는 존재다 _ 원자연
50대 공무원, 연암에게 온 편지 _ 원자연
지기(知己)와의 이별 _ 원자연
애사(哀辭)를 쓰렵니다 _ 원자연
3부 _ 우리, 공부하는 공동체(1) : 연암에게서 찾는 공동체 생활의 실마리
명실상부하게 살아가기 _ 원자연
나쁜 말은 하기 싫은데 _ 이윤하
감정을 대면한다는 것 _ 이윤하
백 가지를 그려 보는 재미 _ 남다영
웬수에서 벗되기 _ 남다영
너만이 키를 잡고 있어! _ 남다영
처음이 주는 것 _ 남다영
새해 복 많이 지으세요! _ 남다영
4부 _ 우리, 공부하는 공동체(2) : 연암에게 배우는 공부
의미 없는 세상에서 가치 없는 삶을 살기 _ 이윤하
까마귀는 까만색일까? _ 이윤하
이보다 더 사랑할 수는 없다, 나를! _ 이윤하
지도는 내 안에 있다 _ 이윤하
읽기, 만물의 빛을 만나는 일 _ 이윤하
영원한 건, 절대 없어! _ 이윤하
문장과 노는 역관 _ 남다영
본디를 밝히는 글 읽기 _ 남다영
그 대단한 연암이 따라갈 수 없다는 이가 있다니! _ 남다영
책과 연애를 시작하라 _ 원자연
‘하늘 천(天)’에 담기지 못한 하늘을 그려라 _ 원자연
집중, 불꽃을 피우는 길 _ 원자연
의기(義氣)를 양양(揚揚)하게 _ 원자연
참(眞) 장인의 세계로의 이주 _ 원자연
5부 _ 당신, 연암 박지원 : 인간 연암 이야기
연암, 지극한 정(情)을 말하다 _ 원자연
소소선생(笑笑先生)의 슬기로운 현감 생활 _ 남다영
마음이 그렇게 중요하네요! _ 남다영
연암의 술 경계법 _ 남다영
탈출! 무기력으로부터 _ 남다영
무엇을 원할 것인가 _ 남다영
인연은 다 악연이다 _ 남다영
죽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_ 이윤하
나는 세상에 뜻이 없다 _ 이윤하
선비는 배운 대로 산다 _ 이윤하
연암의 ‘청렴’한 공무 수행 _ 이윤하
비주류의 길에 우정이! _ 이윤하
부록_연암 박지원 약전(燕巖 朴趾源 略傳)
책속에서
여기, 남산 아래 필동, 그 턱밑에 웅거한 청년들의 왁자한 공부 공동체 남산강학원에 연암을 읽(겠다)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이 청년들이 지난 몇 년간 무단으로 연암 어른을 방문해 ‘텍스트=연암 어른’을 읽고 쓰고 다듬…었다가, 다시 읽고 다시 쓰고 다시 다듬어 또 하나의 ‘벗을 방문한 기록’을 묶으려 합니다. 그 시간들은 『연암집』을 텍스트 삼아 연암이라는 텍스트를 읽는 데까지 나아가는 과정이자 강학원 청년들이 읽고 쓰는 공부공동체의 선비로서 연암 어른에 접속해 배움을 구한 시간들이기도 합니다.(문성환, 「서문」중에서)
연구실은 공부와 생활이 분리되지 않는 공동체다. 하여 연구실에 있다 보면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과 웬만큼 아는 사이가 된다. 매일같이 얼굴을 보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붙어 있을 때도 많고, 어디 갈 땐 알려 주는 습관을 들이며 생활 동선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잠깐 머물 때는 몰랐을 온갖 꼴을 다 보게 되고 각자의 생체리듬이 자연스레 눈에 보인다. (......) 거기다 함께 글을 쓰고 서로의 글에 피드백을 하면서는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지를 보고, 어느 부분에서 힘들어하고 어떤 지점을 생각해야 할지를 같이 고민하며 친해진다.
그런데 점점 알 만해진다 싶을 때마다 여전히 모르는 게 많다는 걸 깨닫는다. 강해 보이고 아무렇지 않게 지낼 거라 생각했던 친구가 이야기를 하다가 눈물을 왈칵 쏟아 낼 때, 10년 뒤에도 공동체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을 것 같았던 친구가 갑자기 공부를 그만두었을 때 등등. ‘이 친구는 이렇다’는 굳어진 이미지대로 친구를 보느라 오히려 지나치게 되고 깜깜 무지할 때가 있는 것이다. 같이 지내는 만큼 서로에 대해 알아 가게 되는 면들도 많아지지만, 그와 동시에 알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굳어지는 친구에 대한 편견들. 과연 이 ‘내 멋대로’식 판단을 내려놓을 수는 없는 걸까.
아마 평생 어려울 것 같다. 몇 쪽 안 되는 짧은 서문, 「낭환집서」(?丸集序)에도 우리가 얼마나 한쪽밖에 못 보는 사람인지를 드러내 주는 이야기가 세 가지나 나오기 때문이다. 대체 우리는 왜 이렇게 볼 수 있는 부분이 한정적일까.(남다영, ‘보이는 것 너머’ 중에서)
이런 소동이 일어나게 된 건 응지 당신 잘못도 아니고, 한용화의 잘못도 아니고, 연암 본인 잘못도 아니라는 거다. 이건 둘의 관계가 생각보다 덜 깊었던 탓이다. 아니면 깊다고 오해했던 탓이다. 지금까지 둘은 서로 잘 알지 못한 채로 서로에게서 자기가 기대하는 모습을 보아 왔고, 이런 일이 일어나고 보니 서로를 막상 믿지는 못했다는 것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연암 본인도 한용화를 의심하려고 한 건 아닌데, 그의 (좋아했다 싫어했다 하는) 마음이 갑작스러워서 당황했던 것 같다 말한다.
누가 심히 잘못한 것도 아니고, 누가 의도적으로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일어나는 일들이 있다. 그건 그냥 ‘누가’ 아니라 어떤 인연이 만든 일이다. 서로 믿지는 못하는데, 흠모하는 (줄 알았던) 관계가 만든 일이다.
예전에 같이 공부하던 친구와 크게 싸우고 나쁘게 헤어진 적이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했다. 한쪽은 넌 왜 마음이 없냐고 하고, 또 한쪽은 그동안 네가 한 게 있는데 뭘 기대하냐는 식이었던 것 같다. 잘못을 따지자니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미워하자니 계속 미웠다. 그렇게 서로를 참 별로인 사람으로 만들고 연락을 끊었다. 연암의 편지를 읽다가 그 친구가 다시 생각났다.(이윤하,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