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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90629331
· 쪽수 : 264쪽
· 출판일 : 2023-07-25
책 소개
목차
들머리말 4
1. 처음에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12
처음에 19
얼굴이 너무 무겁다 24
빈 들판에 서서 28
달빛에 취해서 34
가을이 이리 화려하게 올 수도 38
물방울무늬 넥타이 43
벌개미취가 잡초라고? 48
요기야 요기 52
마감 5분 전이다, 큰일 났다 55
공기의 무게 59
백제 연인과 마주 서서 64
손가락들의 수다 69
2. 그가 나의 누구입니까?
세 번째의 종양 74
그가 나의 누구입니까? 79
갈색 눈동자의 조선 후예 84
새벽 3시에 찾아오는 기억 89
지게귀신, 글자귀신 93
선생 딸과 학생 엄마와 98
그날 아버지의 표정 103
37.8도의 취기를 기다린다 107
저런, 어쩌다 좌우명까지 깨트렸어? 112
청룡이 여의주도 문다고 했는데 116
살고 있어도 살고 싶다 121
전화위복(轉禍爲福) 125
19세기 육신과 21세기의 혼 129
자벌레의 방백(傍白) 133
3. 우리는 모두 바이러스 예비 환자다
탈(脫) 4등 맞아요 138
우리는 모두 바이러스 예비 환자다 143
작은 사람의 큰 하루 148
눈물로 쓴 편지 152
“싫어” 157
착각은 나이도 안 먹는다 162
흠모 받아 마땅할 사람 166
홀딱 벗고 새 174
닭갈비를 위한 축제 178
소나무와 아까시나무 182
굴비 이야기 187
KNOW人과 NO人 192
성북천변의 능수버들 195
4. 다섯 점 반
열이레 달 200
바람만바람만 205
다섯 점 반 210
되바라진 지지배 216
진시황제도 죽었는데 220
지병(持病)과 오답(誤答) 사이 225
하찮은 일은 하찮은 것이 아니다 230
열한 살의 아픔 234
다행이지 뭐예요 240
일그러진 열녀상 244
천만 원짜리 입장권 249
만 원짜리를 세어보자 252
군자가 그립다 257
저자소개
책속에서
그는 나를 속속들이 아는 것 같은데 나는 그를 전혀 모릅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트랜스젠더인지. 악마의 혼령인지, 천사의 화신인지 몰라요. 나를 도와주려는지, 혹은 기회를 노리다가 내 나머지 시간을 꺾자 놓으려는지조차 모릅니다. 다만 그와의 관계를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할 따름입니다.
때로 그가 기다려지기도 합니다. 일인용 의자에 한쪽 엉덩이를 걸치고 무릎 담요를 같이 덮고 독서합니다. 어느 쪽이 먼저 읽고 기다렸다 책장을 넘기기도 하지만, 대체로 그가 내 속도에 맞춰주어요. 마주 앉아 차를 마실 때는 ‘내가 최후까지 의탁할 사람이 이 사람인가?’ 싶기도 해요. 그래서 내가 옴살 같은 속내를 드러낼라치면 프로판가스처럼 허공으로 휘발해버립니다. 야속하고 미운 도깨비죠.
이 아침에도 7시에 푸석한 얼굴로 식탁에 앉습니다. 그도 당당하게 맞은편 의자에 앉는군요. 그가 눈길을 주자 냉큼 진한 커피를 탑니다.
“자, 이제 오늘 하루를 같이 시작해 보실까?”
빙글거리며 수작을 걸어오는 그가 전생의 내 연인입니까, 나를 지켜주는 수호신입니까, 육감을 동원해 존재를 느끼게 하려는 뿌루샤(인간의 심장 속에 항상 머무는 손가락만 한 불멸의 존재)의 장난입니까, 도대체 그가 나의 누구입니까?
-<그가 나의 누구입니까?> 중에서 / 2010년 여성문예원 공모 장려상 수상작
오늘 만날 사람들을 생각하며 색조 화장을 짙게 하고 가면을 찍찍이처럼 늘여 붙인다. 거울을 보며 동서남북으로 달리려는 표정을 다독거려 미소를 지어보았다. 만일을 생각해 주머니에 가장 두껍고 질긴 야수 가면도 챙겨 넣는다.
현관 밖의 시간은 늘 채권자처럼 버겁다. 문을 나서며 오늘 역할을 가면에게 상기시킨다. 누구를 만나든 적절하게 해낼 거라고 엉너리를 치는 것은 자신이 없는 자신에게 던지는 다짐이다.
45킬로그램 사지에 얹힌 내 머리는 2∼3킬로그램쯤이다. 이 조그만 얼굴, 상황 따라 시시때때로 몇 개씩 바꿔가며 가면을 써야 하는 얼굴이 애처롭다. 이 모두가 가면을 필요로 하는 세상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하고 다시 생각해도 내 얼굴은 지나치게 무겁다.
-<얼굴이 너무 무겁다> 중에서
갯가 능수버들 사이로 어른거리는 것은 사람이 확실합니다. 내가 기다린 사람은 아버지였습니다. 한 달에 두어 번 오시는 아버지를 늘 먼저 마중하고 싶었으니까요.
나는 예순까지 셀 줄 알았지요. 하나, 두울, 셋… 오른손가락으로 열을 다 채우고 나면 왼손 엄지 하나를 꼽죠. 아버지는 지금 개똥이 할아버지 산소를 지나신다, 하나. 경이네 논 옆 방죽을 지나신다, 둘. 그러나 예순을 다 세어도 아버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거꾸로 예순부터 하나까지 세어봅니다. 성황당까지 오셨다, 예순. 주막거리에서 윗마을 인척 할아버지 부음을 들으신다, 쉰아홉. 한데 상청에 절 올리고, 상주와 맞절하고도 오실 시간이 훨씬 지나버립니다. 세 번째는, 개울 건너 소작인 집을 끼워 넣습니다. 고창 댁과 우리 집과 박씨네의 삼각형으로 이어진 길을 예순 번이나 오고 갑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나를 구성했던 원자들도 곧 흩어질 겁니다. 그리고 새 원자의 결합에 따라 현생과는 전혀 다른 무엇이 될 겁니다. 내 원자들이 흩어지고 나면(死亡) 아주 단순한 원자들의 합(合)이었으면 합니다.
한적한 산골짜기 너덜겅 가운데 통바위가 되었으면 합니다. 봄에 딱새가 짝짓기를 하고, 여름에 등산객이 다리를 쉬고, 가을에 청설모가 다람쥐의 도토리를 훔쳐다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며 갉아먹을 너럭바위가 되고 싶어요. 기다림의 차림표에 이걸 추가합니다.
나는, 에스트라 공과 블라디미르처럼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릴 겁니다. 여섯 살 아이처럼 선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