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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예술/대중문화 > 건축 > 건축이론/비평/역사
· ISBN : 9791190853750
· 쪽수 : 256쪽
· 출판일 : 2026-04-27
책 소개
건축은 종종 스스로에 대해 되묻곤 한다. "건축이란 무엇인가?" 모든 '~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일종의 류(類) 개념에 대한 질문이므로 대체로 답하기 어렵다. 때론 함정이 도사리고 있기도 하다. 개별적인 사례를 모조리 조사해서 이것들의 공통적 속성을 추출해내기는 불가능하고, 이제는 있다고 믿는 이들도 점차 줄어드는 '본질'을 상정한 뒤 여기서 정의를 이끌어내는 것도 불만족스럽다. 추상적으로 말하면, 이 질문은 실재론과 유명론 사이에서 표류하기 쉽다. 이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세계관의 차이여서,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되 양단 사이의 대화는 시도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 때문에 이런 질문은 즉답보다 질문이 제기되는 맥락, 이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효과 등으로 우회해서 이해하는 편이 더 생산적일 수 있다.
2005년 출간된 『건축이란 무엇인가: 우리 시대 건축가 열 한 명의 성찰과 사유』는 승효상, 정기용, 조성룡, 김인철, 김영섭, 민현식, 이종호 등 4.3그룹과 그 동세대 건축가들이 생각한 건축, 더 정확히 말하면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건축에 대한 입장을 다룬다. 20여 년 전, 일군의 건축가들은 건물과 혼동되는 건축, 모든 건축적 행위가 부동산으로 환원되고, 진지한 담론이 부재하는 상황 등을 문제 삼으며, 그들이 생각하는 건축의 참된 모습을 그려 보인다. 그래서일까, 이 책의 영문 제목은 "The Canon of Architect"다. 정본, 규범, 계율에 대한 갈망이 드러난다. 그들은 다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건축을 염원했고, 이를 윤리적으로 요청했다. 2013년 두 건축 역사학자이자 비평가인 이종건과 이상헌은 비슷한 제목의 책을 펴냈다. 『건축 없는 국가』와 『대한민국에 건축은 없다』가 그것이다. 저자들의 입장과 대상이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두 책은 architecture는 서구의 지적 산물이고,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 한국에는 아직 온전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단을 내린다. 진짜로 있냐 없냐를 따지기보다 이들이 겨누는 비판을 경청하는 것이 더 유익한 독해일 것이다. 2005년의 『건축이란 무엇인가』가 건축가들의 호소라면, 『건축 없는 국가』와 『대한민국에 건축은 없다』는 비평가들의 질타에 가깝다.
이 모든 논의에서 한국의 상황을 비춰보는 거울은 언제나 서구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대서양 양안의 몇몇 지역의 실천, 몇몇 대학에서 생산되어 전 세계로 유포되는 담론이다. 여기에 지나치게 얽매이는 것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온전히 상대화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정부와 민간의 클라이언트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한국 건축계는 여전히 뉴욕의 기업과 아카데미 복합체에 인정받으려는 욕망으로 몸살을 앓고 있고, 전국의 대학 설계 스튜디오는 튜터들이 런던, 뉴욕, 보스턴, 취리히 등에서 경험한 대학원 수업의 순한 맛 버전으로 진행되는 중이고, 비평가와 이론가는 영미권 이론의 지식 소매상 이상인 경우가 드물다. 부족하고 모자라서 건축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런 상황 속에서 빚어지는 일들이 한국의 건축이다. 물론 이것만은 아니다. 인테리어, 전시, 유튜브 등 설계 중심의 사고로는 파악하기 힘든 다양한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실천, 아직 충분 히 말과 글로 추수되지 못한 활동들이 있다.
이런 일들을 다 인정하고 껴안고 건축에 대해 다시 묻는 것이 이번 호의 목표였다. 본질론적이고 존재론적인 당위로서의 건축, 대타자 서구에 대해 부족해 미미해 보이는 건축을 한탄하기보다, 지금 '건축'이란 단어 아래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일들을 모아 나열해보고 싶었다. '건축은 무엇인가'는 잠시 접어 두고 '건축은 무엇일 수 있는가'를 탐문해보자는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는 AI가 재편할 시장, 수십 년째 크게 달라지지 않은 소규모 현장의 상황, 건축과 인접한 분야에서 오가는 모색, 이제 막 학교를 떠난 이들의 불안 어린 시선 속에 포착된 현실, 건축을 다른 실천들과 구분해 주는 중핵으로서의 기율(discipline)에 대한 관심, 행성적 차원에서 제기되는 우려 등, 이번 호에 실린 글들의 갈래는 어느 때보다 더 다채롭다. 어떤 이들은 지나치게 산만하게 느낄 수 있을 테지만, 이는 지금 건축이라 불리는 일의 범위가 어느 때보다 넓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의미를 길어내고 이것이 또 다른 실천의 동력이 된다면 굳이 '건축은 무엇인가'를 물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이 일이 건축이니 말이다. 누군가가 10여 년 후 이 글들을 딛고 또 다른 질문들을 던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목차
『미로 5:건축은 무엇일 수 있는가?』를 엮으며_박정현
건축은 기율이다_배형민
건축은 무엇일 수 있는가 (그런데 기율을 곁들인)_정해욱
기술보다 기술이다_양수인
시장에 물어라, 건축이 무엇이 될 수 있는지_이신후
산 옮기기, 혹은 바깥 없는 세계에서 건축하기_김선주
“그 점에 대해 나쁘게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_허성범
건축은 매체의 흔적을 디자인하는 것임을_박세진
슈뢰딩거의 공사장_김원일
대문 개방_전중섭
왼쪽 원에는 시계 오른쪽 원에는 건축_이지형
건축학과 졸업생은 무엇이 될 수 있겠습니까?_변건우
설계 스튜디오는 연구가 될 수 있는가_염상훈
- 건축 – 지식 – 판단 – 건축 -_박천강
공기청정 스프레이로 모든 걸 날려버리세요 사회비평으로서의 건축에 관하여_송률, 크리스티안 슈바이처
모든 것은 건축이다 2.0_오피엠
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것:상자와 내부 그리고 필드_여재원, 강신
글과 사고의 시체를 찾아서_김사라
건축이라는 파편들이 움직일 때_이지회
다시 만난 세계:글로 잇는 건축_심미선
저자소개
책속에서
건축의 가치를 규정하는 규범이 아니라 현실의 조건이 건축을 이룬다는 리얼리즘이 기율에 대한 관심을 이끈다. 관념론을 배척한다는 것이 철학적인 입장이라면 구체적인 건축 과정이 관여된다는 점에서 일상과 맞닥뜨린다. 실무와 교육에서 보고, 만지고, 읽고, 사용하고, 소통하는 모형, 도면, 스케치, 책, 잡지 등이 기율을 이룬다. 이런 사물은 관념에 근거한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발휘되며 드러나는 것이다. 기율은 과정과 결과, 생각과 사물을 포섭하며 보고, 읽고, 그리고, 만드는 행위에 관심을 둔다. 기율에 대한 탐색을 근간으로 연구자는 그 서사를 어떠한 방향으로든 확장할 수 있다.
기능주의가 도래한 이래로 건축물은 기능에 부합한다면 어떻게 생기든 상관없어졌다. 이러한 태도는 자본주의의 고도화와 끝없는 기술 발전에 의해 더욱 가속화되었다. 지금의 사회는 건축물이 일관된 지식체계에 기반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자신의 요구에 맞추어 변화해줄 수 있는 대상이길 바란다. 뭐든 필요한 대로 되면 그만이다. 결과물이 건축적(?) (?)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 이러한 경향은 현대 사회의 고착화된 제도에 의해 더욱 공고해졌다. 이 사회가 허락하는 것은 오직 촘촘한 조건과 규칙을 성실히 통과한 멸균된 건축물뿐이다.
가(벼운) 건물을 지속가능성의 세계관에서 읽어본다면, '가벼움'은 더 이상 물리적인 무게가 아닌 지구에 남기는 발자국의 깊이로 이해하게 된다. […] 건축가는 지금껏 건물의 산파 역할만을 자처했지만, 이제는 소멸과 해체의 방식까지 설계하는 장의사의 역할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지속가능성이라는 세계관 위에서 '가벼움'이 향하는 곳은 결국 '건물은 어떻게 가볍게 사라져야 하는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