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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영미소설
· ISBN : 9791191240115
· 쪽수 : 400쪽
책 소개
책속에서
눈으로 복근을 더듬으며 피식 웃었다. 이 사람이 어제 그 거인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눈썹엔 피어싱, 팔뚝엔 온통 공포영화 타투로 덮은 헤비메탈계 빌런처럼 보여도 사실은 190센티미터짜리 순도 백 퍼센트 토끼인형.
한숨을 쉬고 일어나 앉자, 거인이 부드러운 데님 빛깔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속눈썹이 어찌나 짙고 검은지 아이라이너를 그린 것 같다. 내 심장이 또 파닥였다.
날 선 분위기와는 따로 노는 저 눈과 입. 씩 웃거나 키스하기 직전처럼 오므라진 입술 모양이 한낮 햇살 아래에서 보니 더 귀여웠다.
한스. 아, 성을 안 물어봤네. 전화번호도. 아이는 몇이나 있는지도…….
아이. 앗, 이런! 혹시 우리…….
아래를 내려다보며 재빨리 상황 파악에 들어갔다.
옷?
입고 있음.
어젯밤에 한 기억?
없음.
아래 통증은? 저 정도 몸집이면 거기도 꽤 클 텐데?
아니. 통증 전혀 없음.
제기랄!
보나 마나 숙취로 지금 내 꼴이 말이 아닐 테지만, 한스를 보고 웃으며 물었다.
“여기서 뭐 해?” (1장)
“선루프 열어도 돼?”
백미러 위 버튼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한스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선루프를 활짝 열었다. 7월의 불타는 햇볕이 차 안을 가득 채우며 살갗에 작렬했다.
고개를 뒤로 젖히며 뜨겁고 습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석 달 가까이 방구석 폐인처럼 지내다가 옆자리에 잘 생긴 허그머신을 앉힌 채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을 쐬며 손가락에는 멘솔 담배를 끼고 고급 외제차를 몰고 있으니 천국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신호등이 초록으로 바뀌자마자 내 환상은 산산이 부서졌다. 액셀을 밟은 순간 선루프 바람에 날린 담뱃재가 차 안으로 휘몰아쳤다.
“이런!”
날리는 회색 재를 무슨 비눗방울이라도 되는 것처럼 급히 내리쳤다. 비싼 가죽 좌석에 온통 재가 날렸으니 화를 낼 만도 하건만, 한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화를 내기는커녕 너무도 뜻밖의 행동을 했다. 한스 오펜하이머는 차창을 되레 끝까지 내리고는 담배 끝을 내밀어 자기 재도 햇살 속에 은빛으로 반짝반짝 날리게 하고는 그것을 또 멍하니 바라보았다.
“방금 봤어?”
재가 다 사라지자 한스가 휘둥그런 눈을 하고 물었다. 나는 무슨 초자연적 현상이라도 목격한 것처럼 숨죽여 대답했다.
“어, 봤어. 무슨 꼭―”
“스노우 글로브 같았어!!”
한스와 나는 합창하듯 소리쳤다.
“와, 우리가 방금 세상에서 제일 비싼 스노우 글로브를 만들었네!” (중략)
……한스는 웃으면서 전화를 받았다.
“뭐, 진짜? 지금? 나 지금 비비랑 있는데.”
그러면서 날 힐끗 보고는 피식 웃었다.
“그래, 어젯밤에 본 걔. 아니. 닥쳐 새끼야.”
활짝 웃으며 나를 다시 보았다.
“그래, 바로 갈게. 고맙다!”
한스는 전화를 끊더니 내 쪽으로 돌아앉았다. 흥분한 기운이 온몸에서 느껴졌다.
“계획 변경. 시내로 가자.” (3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