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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92079035
· 쪽수 : 153쪽
· 출판일 : 2021-11-30
목차
시인의 말
1부 과꽃 안테나
거미가 집을 짓는 시간을 보았다
은수
까닭 없이 나를 안다고 내미는 손
쟈코메티의 개
그리운 시냇가
숨
감
쓸쓸한 벽
정직한 글씨
시월
금강 1
과꽃 안테나
봄의 유서
좀머 씨의 외출
봄 속으로 날다
의자를 줍다
연꽃
연 연(蓮 緣)
어느 날 길을 걷다가
또 봄
2부 당신의 피난길
청령포를 지나며
그대라는 배경
모퉁이 사진관 96번지
표정을 훔치다
봄 사랑
집에 대한 단상
녹슨 유리병에 햇살이 들어온다
가을
장미 아파트 김 씨
슬픈 역설
헬싱키를 가다
먼 곳
감꽃 진 자리
샤갈의 자서전을 읽는 밤
봄
물속의 하얀 지도
억새로 남아
당신의 피난길
3부 이팝나무 아래서
동백 다방을 기억함
밀양에 와서
기억 속의 집
저 가벼움
오후 세 시의 고백
이팝나무 아래서
빗살무늬로 그려지는 괘종시계
꽃의 무게를 본다
빽빽한 웃음으로 서 있다
눈발
아침
바람의 무덤
들꽃에게 묻는다
4부 시간의 산맥
해 질 무렵
독백
평화
눈의 이력
세월
내부 고발
절벽
41번지 정미소 안드레
눈길
굽은 등을 보는 시간
시간의 산맥
안부를 묻다
그 남자네 집
밥풀
용각산을 흔들다
거실 탁자에 관한 명상
봄꽃
현현
해설 경계 혹은 잠재성의 시간 /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
저자소개
책속에서
머물러야 깊이 본다. 한정순 시인은 경계와 잠재성의 시간에 오래 머물 줄 안다. 이 ‘오래 머무름’이 (그녀의) 사유의 깊이를 보장해준다. 그러나 시인은 경계를 넘어 다른 잠재성으로 탈주하기를 원한다. 다른 사유의 고원高原에서 그녀는 또 오래 머물 것이다. 그녀는 사유와 정념의 울혈 상태를 고통스럽게 들여다본다. 이 시집은 이렇게 자신을 들여다보며 다른 잠재성을 갈망하는 시인의 자기 고백이다.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
거미가 집을 짓는 시간을 보았다
거미가 집을 짓는 시간을 보았다.
석양이 뚝 떨어지는 찰나
거미가 집의 마지막 상량문을 쓰듯
튕겨 올랐다.
시간이 느 . 리 . 게
밤을 맞이하고 있었다.
지금껏 나는 집 없이 지낸 날이 없었다.
그런데 늘 집이 없었다.
발목이 젖고 휘도록
집을 찾아 돌아다닌 경계의 끝
세상 밖에 박혀 있는
내 집은 언제나 불안했다.
달빛이 점점 살이 올라 도톰해질 때
경계를 허물 듯
집 없이 보내야 하는 내 철없는 불안을
계속 붙잡고 있을 수 없었다.
막연해진 세상에 등 돌리고
말뿐인 말만 늘어놓았다.
하소연을 했다.
언제나처럼 밖에는 바람이 쓸어놓은
길이 있고
석양이 먼저 길을 터준 해 질 녘
어스름이 있었다.
집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마음을
잡아주지 못했던 내 발치의 인연들
어제와 똑같은 석양이
똑같이 뚝 떨어지는 찰나
거미가 집을 짓고 나를 보고 있었다.
내 집이 거미줄과 하나 되어
바람에 살랑이고 있었다.
천지간 내 집이 훤하게 다가왔다.
빗살무늬로 그려지는 괘종시계
해남까지 가질 못했다
밤 열두 시 가까워 순천 벌교 지나 보성
보성을 지나치질 못했다
밖은 태풍이 몰고 온 비가 마음을 파헤쳐 놓고
율포 바다 식당 방에 누워 더욱 굵어지는 빗소리에
이유 없이 눈물이 났다
눈물이 힘의 상징이 되던 시대도 지났고
감상이 삶의 빛이 되던 나이도 지났는데
소리 내어 울지 못하는 마음은 내 영혼을 또 다치게 했다
마음의 유배지를 만들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푸른 청춘들이
바다와 만나는 어느 섬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깊은숨을 내쉬고 있었다
진흙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마음은
빗소리로 남아 나를 마음속에 또 가둬 두었다
물의 상상력이 나르시스 신화에까지
갈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고문의 상징으로 남을 건지
아늑한 생각에 빠져 있던 밤은
부끄러움 때문인지 더 이상 잠 속으로
빠져들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