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logo
x
바코드검색
BOOKPRICE.co.kr
책, 도서 가격비교 사이트
바코드검색

인기 검색어

실시간 검색어

검색가능 서점

도서목록 제공

올바른 대학위상의 재정립

올바른 대학위상의 재정립

오홍석 (지은이)
북메이트(줌)
22,000원

일반도서

검색중
서점 할인가 할인률 배송비 혜택/추가 실질최저가 구매하기
20,900원 -5% 0원
1,100원
19,800원 >
yes24 로딩중
교보문고 로딩중
11st 로딩중
영풍문고 로딩중
쿠팡 로딩중
쿠팡로켓 로딩중
G마켓 로딩중
notice_icon 검색 결과 내에 다른 책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중고도서

검색중
서점 유형 등록개수 최저가 구매하기
로딩중

eBook

검색중
서점 정가 할인가 마일리지 실질최저가 구매하기
로딩중

책 이미지

올바른 대학위상의 재정립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올바른 대학위상의 재정립 
· 분류 : 국내도서 > 대학교재/전문서적 > 사범계열 > 교육학 일반
· ISBN : 9791195079766
· 쪽수 : 440쪽
· 출판일 : 2015-10-29

책 소개

대학은 각 분야에 걸쳐 ‘유능한 인재를 양성’해온 최고학부로 알려져 있다. 국가와 사회에 걸친 동량(棟樑)이면서, 간성(干城)으로 역할해온 것이 ‘탁월한 인재’들이다.

목차

01 대학에 대한 평가와 기준 19~45
02 대학설립의 역사와 발자취 46~66
03 전통적 인재와 양성기관 67~84
04 대표적 학자유형과 생애 85~122
05 학자가 갖출 수칙과 덕목 123~147
06 서세동점과 의식주의 변화 148~174
07 사회변동과 대학난립추세 175~216
08 대학생활을 통한 실질체험 217~236
09 전공의 선택과 영원한 동반자 237~360
10 교수임용과 퇴역의 과정 261~284
11 학문을 통한 헌신과 기여 285~321
12 부정적이고 다양한 교수유형 322~372
13 물질주의에 함몰된 교수유형 373~396
14 중앙과 지방간의 대학격차 397~411
15 대학위상정립을 위한 방안 413~423

저자소개

오홍석 (지은이)    정보 더보기
저자는 서울대학교 지리교육과를 졸업한 이학박사ㆍ경희대학 전임교수가 된 다음, 동국대학으로 소속을 옮겨 부교수에서 교수단계를 밟는 한편, 사범대학장과 교무처장을 역임했다. 병행하여 미국의 오하이오대학초빙교수, 유타대학 교환교수를 거쳤다. 대외적으로 서울시가 주관하는 ‘서울600년사’와 ‘한강사’를 공동집필하는 한편, 서울지하철과 고속전철의 ‘역명제정’에도 참여했다. 정부차원에서는 묘지ㆍ환경ㆍ지명ㆍ지역정보에 걸쳐, 관련부서의 정책자문위원으로 활동해왔으며, 정부로부터 ‘황조근정훈장’을 받았다. 모과에 대한 봉사를 위해서 ‘서울대 지리교육과 총동창회장’을 역임했다. 출판된 도서는 현재까지 20여권에 달하고 있다. 그 중에서 ‘삶과 죽음의 공간양식’을 비롯하여 ‘문화형태의 원형과 변형’ 등은 학술적으로 저자의 자부심을 알리는 작품이다. 외부에서 인정받는 저서로서 ‘땅이름 나라 얼굴’이 있는데, 청소년권장도서로 선정되고 ‘한국의 전통마을’은 문화관광부가 선정한 우수도서이다. 이화여대 출판부에서는 ‘한국의 전통마을’을 영문판으로 다시 번역(Traditional Korean Village)하여, 국제문화교류차원에서 활용하고 있다. 또한 ‘땅이름 점의 미학은’ 네이버(Naver)의 요청으로 이용계약을 맺은 상태.
펼치기

책속에서

머리말

대학은 각 분야에 걸쳐 ‘유능한 인재를 양성’해온 최고학부로 알려져 있다. 국가와 사회에 걸친 동량(棟樑)이면서, 간성(干城)으로 역할해온 것이 ‘탁월한 인재’들이다. 전자가 화려하고 웅장한 건축물을 지탱하는 대들보에 비유되는 까닭에, 두뇌와 재능을 겸비해온 ‘전통적 문관(文官)’과도 맞먹는다. 후자는 ‘견고한 방패막이’와 마찬가지임으로, 국가방위를 책임져온 무관에 알맞다. 오늘의 국가적 인재도 신분계급에서 다를 뿐 ‘문무(文武)에 걸친 양반위상’에서 다르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적 선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인재양성기관을 오늘의 대학과 연계할 때, 이에 대한 성패(成敗)여부는 국가흥망과 직결될 만큼이나 ‘함수관계에 놓인 것’이 확실하다. 또한 대학은 인재양성에 주력하는 상징기구로 알려질 만큼이나, 시간을 초월한 채로 ‘확고한 위상’을 굳혀왔다. 이와 같이 전제할 때 국가번영과 직결되는 대학기구와 관리에, 결코 소홀(疏忽)할 수 없는 이유를 안게 된다. 올바른 대학발전이 ‘국가융성과 번영으로 직결’될 만큼이나, 둘이 긴밀한 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대학의 시발점(origin)이 어디에 있었고,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로 이어져왔으며, 현실적인 장단점이 무엇인지, 여기에 대하여 먼저 ‘면밀한 검토(檢討)의 필요성’을 느끼게 만든다. 있는 그대로의 실상(real facts)과 더불어, 문제소지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파악하면서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또한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혁신(革新)책을 강구하는 동시에, 장기적 안목에서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미래에 대한 국민적 염원과 함께, 영속번영으로 이어지기 위한 방편에서이다.
이런 취지와 정신은 이미 율곡에 의하여 ‘법구폐생(法久弊生)의 글귀로서, 압축된 내용을 제시해왔다. 하지만 이런 정신과 취지를 상당한 시간이 경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실행에 옮기기에는 미흡함이 따르고 있다. 우리 것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더불어, 서구사조에 대한 ‘맹목적인 선망’과 자기비하(自己卑下)로 이어지는 잘못된 자세로 하여금, 온당치 못한 흐름을 낳도록 유도해온데 따른 것이다. 결코 현명한 처사이며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표피(表皮)적인 것에 의거한 ‘잘못된 판단’이며, 이를 근거로 삼고 집행하며 혼란만을 가중시켜온데 요인이 있었다.
한 때일망정 선각자들이 서구사조에 ‘맹목적으로 함몰’되어온 오판(誤判)과도 관계된다. 개화파에 의하여 독립문을 세우고, 개선문과 같은 모방문화를 도입하면서부터, 잘못된 길을 걷는 시발점이 되어왔다. 중국에 종속된 상황으로부터 벗어나, 자주독립을 강조하며 영은(迎恩)문까지 없애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 자체야말로 주체성을 앞세운 ‘올바르고 합당한 처사’이더라도, 우리고유의 전통성을 배제한 채 서구양식을 도입하며, 일방통행으로 달려온 데서 ‘새로운 문제’를 낳게 했다.
이것이 모화(慕華)사상을 대신하여, 모서(慕西)사상에 젖어들게 한 전기가 되었다. 당시만하더라도 ‘서구적 조형물’의 경우, 국민에게 신비하고 청신한 매력을 안겨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후에 다가온 우리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복구(復舊)열풍을 맞이하면서 ‘모방문화에 대한 평가’를 달라지게 만들었다. 문호개방이란 시대흐름에 의미가 있더라도 ‘무비판(無批判)적으로 수용’해온데 대하여, 역사적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맹인사상(盲人四象)의 글귀’를 떠오르게 만든다. 맹인의 손으로 코끼리를 더듬었을 때, 다리와 허리 등 ‘네 부위에 걸쳐 각각 다른 모양새’로 표현해온 이치와 맞먹기 때문이다. 감각은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으로 표현’하듯, 다섯 개의 부위와 감각기관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형체를 바라보는 시각(sight)에서만큼은 ‘안식(眼識)이 단연 앞선 위치’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으로 만진 육감’에 의해서, 코끼리형체를 표현했다면 실상에 부합되는 정확도에서, 눈에 의한 안식을 앞서갈 수 없다.
이런 이치를 따라 선진국에 대한 표피(表皮)적이고 ‘잘못된 인식’을 통해서, 배후조건마저 다른 우리나라에 적용해온 까닭에, 부적응과 함께 혼선으로 이어질 것은 당연하다. 특히 광복이후에 본격적으로 다가온 우리제도와 조직에 대하여 ‘전반적 운영’은 말할 것도 없고, 인재교육에 주력하는 대학에서도 ‘서구방법만을 획일(劃一)적으로 적용’하는데서 모순을 낳게 만들었다. 학문과 관련된 고등교육기관도, 인간이 창조해낸 문화양식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문화는 오랜 역사와 더불어 적응과정을 거치면서, 발생근원지와는 다르게 ‘변형된 채로 지속’되는 특성을 갖기 때문이다.
한국은 ‘동이(東夷)로 표현’하듯, 근원부터 ‘동양에 위치한 유별난 나라’로 알려져 왔다. ‘어질고 살리기를 좋아하는 성품이 땅에 뿌리를 내리는 만물’과 같게 취급해온데서, 생겨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런 관계로 인자(仁慈)한 모습이면서 법도(法道)를 앞세우는 ‘군자(君子)의 나라’로서, 주변국가로부터 칭송을 받아왔다. 그만큼이나 ‘본성이 착한 것’은 물론이고, 인위적으로 제정된 ‘도덕규범에 우선가치’를 부여하며, 실천해온데 따른 것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런데 권력을 앞세워온 조선시대의 당쟁(黨爭), 현대에 이르도록 지속되어온 사상과 이념전쟁을 거치면서 ‘근본에 해당하는 동이정신’마저, 상실하게 만들어버렸다. 여기에다 서구사회에서 들어온 ‘잘못된 자본주의’가 물질에 우선가치를 두도록 유도하면서, 민족공동체마저 해체(解體)국면을 맞게 되었다. 학계마저도 분석과 기술위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전체보다 부분에 무게를 두는 잘못된 흐름을 낳아왔다. 이것이 개인주의성향을 띤 ‘잘못된 가치’가 주도하도록, 세상을 오도(誤導)하게 만든 배경이 되었다.
본질(本質)적인 과제가 무엇이고, 지엽적인 것이 무엇인지, 진지한 검토의 필요성을 느끼게 만드는 대목이다. 또한 전체와 부분과의 관계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신중하게 재고(再考)해야 될 단계에 이르렀다.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도 그대로 방치할 경우, 무책임과 더불어 과거와 미래를 이어가는 가교(架橋)기능마저, 부실로 이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현존세대(present generation)는 ‘온전한 그대로의 나라’를 유지했다가, 희망을 가진 미래세대에게 넘겨주어야할 책무를 갖고 있다. ‘관리자의 한계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것이 현존세대가 갖는 한계이기 때문이다.
우리한국은 고래로부터 ‘자애로운 민족성’에 그치지 않고,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도덕규범까지 갖추어왔다. 통치이념과 학문마저도 성균관이 주도해온 까닭에, 벼슬에서도 성균관을 관장해온 대제학(大提學)마저, 영의정에 못지않은 벼슬로서 높게 평가해왔다. 그만큼이나 권력보다 ‘학문과 더불어 정신세계에 우선가치’를 두며, 실천해온 것이 고유전통으로 정착되어온데 따른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경우 전통과는 다르게 ‘부정적인 방향으로 변질’되고 있다. 어진사람보다는 악한 사람이, 의로운 사람보다 교활한 사람이 활개를 치는 세상으로, 변해가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무례(無禮)하거나 무지(無智)하면서, 불신(不信)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자기반성은커녕, 사회를 주도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이런 흐름은 전통가치의 단절과 더불어, 사회혼란을 부추기면서 ‘세상을 아수라(阿修羅))장’으로 변질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다. 그 결과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일 뿐, 품격이 넘쳐나는 사회모습이란 찾지 못하게 되었다.
전통단절로 이어진 ‘결정적 시기’는 일제 때로 소급되고 있다. 일제(日帝)에 의한 강제 통치는 ‘한국고유의 역사와 전통’마저, 말살해온데 따른 것이었다. 그 결과 정치중심지인 왕조는 물론이고, 교육기능을 담당해온 ‘성균관마저 기능단절’로 이어지고 말았다. 여기에다 반세기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미군주둔과 병행하여 서구문화영향권으로 편입하게 되었다. 단기(短期)간에 일어난 ‘급격한 변화’로 하여금, 우왕좌왕(右往左往)하는 혼란과 더불어 ‘부적응(unsuitable)의 시대’에로 돌변하게 되었다. 이것이 한국사회에 안겨준 비극이며, 혼란을 가중시켜온 ‘현대사의 부정적 측면’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각 분야에 따라, 오늘과 같은 혼란상을 키워왔다. 학문을 통하여 인재육성에 주력하는 대학도, 이와 같은 흐름에 휘말리며 가치관의 혼란과 더불어, 난맥상을 드러나게 되었다. 가치관과 생활규범에서 삼강오륜(三綱五倫)에 근거해왔던 전통을 ‘구닥다리처럼 배제’하는 데만, 우선시하며 합당한 대책을 수립하지 못해온데 따른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우리 것에 대한 ‘장단점과 더불어, 취사선택(取捨選擇)의 기회’마저 갖지 못하게 만든 것은 물론, 서구적 자유민주의에만 ‘일방적 가치를 부여’하며, 높게 평가해온데서 혼란을 키워왔을 뿐이다.
전근대만하더라도 ‘동도서기(東道西器)의 글귀’를 사용해왔다. 동양의 도덕과 서양의 장비에 대하여, 장점으로 여겨온데 따른 것이었다. 동서양에 걸쳐 ‘각각의 장점을 제시’해온 것과 마찬가지임으로, 처음부터 ‘우열(優劣)의 시각’에서 차별해온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문화를 수용하는 인간측면에서, 그런 상황에 머물고 있지 않았다. 동양의 도덕성을 비하(卑下)하는데 반하여, 서양의 장비를 높게 평가하는데 주력해왔기 때문이다.
고매한 정신이나 인격보다, 목숨을 담보로 삼는 ‘당장의 화포(火砲)에 굴복’하는 상황으로 변해온데 따른 것이다. 여기에다 ‘물질중시의 서구문명’에 지배층까지 매혹됨으로써, 심사숙고(深思熟考)과정을 거칠 여유마저 갖지를 못했다. 이것이 ‘국가적 혼란’을 불러오게 만든 요인이었고, 이를 계기로 ‘가치전도(價値顚倒)의 사회’를 낳게 했다. 따라서 장비와 물자를 제작하는 배후시설과 기술까지 높게 평가해왔음으로, 이를 골격으로 삼은 ‘근대산업사회를 지향’해온 배경이 되고 있었다.
산업사회는 자본과 기술, 시설과 원료 등에 걸친 제반조건들을 중시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종전처럼 토지에 기반을 두어왔던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전통적 신분제도’가 상대적으로 소멸되는 것은 물론이고, 공업과 상업에 바탕을 둔 신흥자본가들이 급부상하게 되었다. 이들의 활동무대마저 ‘새롭게 등장한 신도시’에 근거하며, 번영시대를 맞게 되었다.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무대에서도, 도시가 ‘중심권을 장악’하는 전환점(turning point)을 낳게 된 배경도, 여기에 있었다. 한마디로 산업혁명을 계기로 서구사회가 주도해온 ‘물질중시의 신문명(新文明)’이 범람하면서, 탁류(濁流)에 잠겨든 모습처럼 ‘무질서와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사회’에로 전환되어갔다. 선별과 여과를 거치지 못한 채로, 서구문명을 도입하기에만 급급해온 여파이면서, 부산물이었다.
인재육성을 상징하는 기관마저, 전통적인 성균관이 뒤로 밀리는 대신, 새롭게 출범한 중앙무대의 국립서울대가 상징적 위치에 서는 ‘변화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대학을 상징하는 마크(mark)에서도, 서울대학은 이런 내용을 담아내고 있는데 ‘ㄱㆍㅅㆍㄷ으로 표현’된 약자(略字)는 대표적이다. 국립서울대학이란 한글이니셜을 압축한 것에 불과하며, 교문에는 오늘에 이르도록 상징물처럼 설치되고 있다. 하지만 사단법인체로 변신하는 마당에, 국립(國立)을 상징하는 ‘ㄱ자의 이니셜’도 이제 살아질 운명에 놓여있다. 항상적인 존재로 지속되지 못하는 것이 세상임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대학마크에는 책과 펜은 물론이고, 횃불과 월계관(月桂冠)까지 병행하여, 상징성으로 내세우고 있다. 책에는 진리가 담겨져 있다. 그런 까닭에 ‘책을 읽는 독서’를 통해서 진리를 얻어내고, 그것을 통하여 ‘겨레를 향하여 빛을 밝히려는 취지’를 배지(badge)에 담아내고 있다. 그래서 책과 함께 표현도구로서, 펜을 상징물처럼 내세워왔다. 표현문자에서 한자(漢字)가 한글로 바뀌는 한편, 표현도구로서 ‘붓에서 펜으로 전환’되는 시대상을 맞이했을 뿐, 대학이 내세우는 근본정신과 상징물에서, 변화된 것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라틴어의 “veri tas”와 병행하여 “lux mea”라는 외래문구를 내세우고 있음으로, 서구사회에 기원한 대학을 ‘이상형으로 제시’한 것과 마찬가지다. 거기에는 ‘진리가 나의 빛’이라는 내용이 담겨있음으로, 진리추구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대학임을 입증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표현방법에서 ‘한국고유의 전통’에 부합되지 않는 것만은 확실하다. 여기에다 서구문화에 기원한 월계관(月桂冠)까지 추가해놨음으로, 국가를 대표하는 대학에서 ‘우리의 고유성’과는 거리를 둔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다.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세계적 흐름에 동조한 것이고, 부정적 시각으로 바라보면 민족주체성의 결여와도 관계된다.
다른 한편으로 역사가 짧은 취약성에 따른 것인지, 개교역사를 늘리기 위해서 ‘성균관의 경학(經學)과’를 포함시키는데 주력해왔음으로, 탐욕에 젖은 모습이다. 이런 점에서 시범을 보여야할 최고학부부터, 전후모순과 함께 혼선을 빚게 만든 증거로 남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학에서 강조하는 것은 ‘진리를 앞세워온 공통점’을 갖고 있다. 연세대학의 경우 ‘진리와 자유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성경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런 사실만을 가지고도, 진리(眞理)는 다분히 ‘서구적 표현방식’임을 입증할 수 있다. 동양에서는 이것과 달리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내세우며, 예전부터 ‘이치에 통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왔다. 그래서 우주만물에 대한 근본원리로서 이(理)를 인정하는 한편, 이를 움직이게 만드는 실체로서 기(氣)를 중시해왔다. 이것이 이치(理致)임을 고려할 때, 사물을 통한 이치터득이야말로 ‘진리로 규정’해도 손색이 없다. 표현에서 다르지만 진리에도 ‘이(理)라는 표현’을 계속해서 사용해왔음으로, 맥락에서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기능을 부여한 대학을 ‘상아탑(象牙塔)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단단하게 생긴 코끼리이빨을 깎아내듯 ‘고된 연마과정’을 통하여, 얻어낸 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구문명의 범람추세에 맞추어, 용어는 물론이고 문화전반에 이르기까지 ‘서구적인 요소’를 담아내는 데만 주력해왔음으로, 전통과 다를 뿐 아니라 문제소지를 낳게 했다. 병행해서 우리고유의 역사와 전통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소홀(疏忽)해온데서 오늘과 같은 혼란을 부추겨온 요인이 되었다. 성찰(省察)기회와 더불어, 새로운 창조로 이어지는 당위성을 암시하고 있다.
같은 국립이면서도 지방을 대표하는 경북대학은 다르다. 삼국통일의 주역이었던 ‘신라문화의 본거지(경주)’가 인접한데 따른 환경지각에서 비롯된 것인지, 마크에는 ‘첨성대를 상징물’로 내세우는 한편, 둥그런 원과 함께 ‘화개오엽(花開五葉)의 모양새’를 그려놓고 있다. 전자가 천문기상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주민의 안녕과 번영에 기여해온 ‘학구적 활동과 연관’된 것이라면, 후자는 원만한 인간관계를 위한 ‘원융무애(圓融無碍)의 자세’를 이상형으로 삼으면서, 오방(五方)제의 ‘중심에 우뚝 선 인재’를 배양하려는 미래지향적 꿈과도, 연계되고 있다.
어느 것이나 전통문화를 통해서 ‘교훈적 의미’를 담아내는데 주력한 것임으로, 서구요소를 강조하는데만 주력해온 국립서울대학교와 차별되고 있다. 다 같은 국립대학이면서도 상징성에서 제각기임으로, 다양성을 드러내는 모습이다. 다양성이 나뿐 것이 아니라 ‘자전거바퀴의 살(spoke)’처럼, 구심점(求心點)을 향한 집중으로 이어지지 못하는데서, 문제를 낳고 있다는 뜻이다. 살이 많다하더라도 ‘구심적 집중’으로 이어지도록 조직화롭지 못할 경우, 난마(亂麻)처럼 얽히는 것은 물론 본래의미까지, 상실하면서 부작용을 낳기 때문이다.
국립경북대학교의 경우 이니셜을 ‘알파벳의 KNU로 표현’하며, 서구문화요소와 접목해왔다. 국립서울대학교도 ‘SNU로 표현’해왔음으로, 모두가 글로벌(global)시대에 합류하기 위한 방법이며, 국립대학을 주축으로 역할을 해왔다. 단편적인 모습이더라도, 이 자체만으로도 민족문화와 함께 외래문화요소들이 ‘혼재한 모습’이며, 파급원천으로 역할해온 것이 대학임을 알리고 있다.
대학은 어느 곳을 막론하고 정도(正道)를 걸으며, 인재양성과 국민교화(敎化)에 앞장서는 위치에 있어왔다. 하지만 과욕에 젖어온 탓인지, 서울대학교의 경우 ‘월계관(月桂冠)을 상징’처럼 제시하며, 명예만을 앞세워왔다. 월계관은 그리스-로마시대를 통하여, 승리자에게 안겨주는 훈장과 마찬가지이다. 이런 점에서 ‘서구문화에 기원한 명예’의 상징물과 맥락에서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글로벌시대를 예견하며 ‘세계적 시각의 월계관’을 얻어내려는 ‘미래지향적 욕구’를 그려낸 것인지, 현시점에서 이해할 수 없는 측면이다. 이것이 혼선을 빚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굳이 명예와 관련시킬 때 우리문화에도, 이런 의미를 담아낸 관(冠)이 있었고, 벼슬아치는 물론이고 과거(科擧)급제의 영광스런 장면에도, 적용해온 전통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를 무시한 채로 ‘서구문화의 상징물’을 일방적으로 도입하는 데만 급급해왔음으로, 심사숙고(深思熟考)결과로 보이지 않는다.
이 자체만을 가지고도 ‘주체성의 결여’된 모순으로 비쳐지고 있다. 최고학부는 정신적으로 국가를 대표하며, 상징하는 위치에 있을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한편, 장점을 격려하며 ‘새로운 창안’으로 이어지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이 학행일치(學行一致)이며, 권선징악(勸善懲惡)과 연계되는 정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최고학부에서 시범을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음으로, 국민이 다가서려는 종착지점(destination)을 어디에서 찾아야할지, 막막하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따른 여파인지, 사회는 승전(勝戰)탑마저 ‘서구양식을 도입’하면서, 입체양식을 드러내는 데만 급급해 왔다.
우리고유의 ‘전통적 석탑(石塔)’이 있건만, 중심에서 밀려나며 이런 흐름은 지금도 ‘전국을 향해서 확산추세’를 낳고 있다. 근본에서 우리 것에 대한 잘못된 평가가 불러온 반대급부이었다. 시조영웅(時造英雄)의 글귀처럼, 시대조건이 영웅을 만드는 모습과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시대여건은 분단비극과 더불어, 민족상잔(民族相殘)이란 ‘처참한 악조건’으로 이어져 왔다. 이것은 주변조건에 대한 올바른 통찰과 검토기회마저, 갖지를 못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이제 우리나라는 안정기를 맞이한 시대여건과 더불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격상(格上)단계에 들어와 있다. 여기에 부합되는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위하여 ‘원거리에 놓인 거울(distant mirror)’처럼, 새로운 시각과 가치관으로 시대상은 물론이고, 대학까지 재조명해야 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이와 같은 시대상(時代相)에 맞추어 저자는 <올바른 대학위상의 재정립>을 주제로 삼고,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
평생에 걸쳐 대학교수로 살아오면서 연구업적을 쌓는데 기여해왔다. 하지만 본궤도에서 이탈하는 대학실상을 바라보면서, 실망을 느껴온데 따른 반사적 결과이다. 그만큼이나 시대가 변하면서 발전상을 보이는데 기여해왔더라도 ‘자격미달의 일부교수’에 의하여, 대학명예까지 손상시키는 단계에 이른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일어탁수(一魚濁水)의 글귀’가 전해져왔다. 물이 맑다한들 ‘한 마리의 미꾸라지’에 의해서, 전체의 강물을 탁수로 변하게 만드는 이치에 따른 것이다. 대다수교수들이 청정수(pure water)를 유지하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하며 정성’을 쏟아왔다. 하지만 일부아류(亞流)교수들이 저지르는 혼탁(混濁)상을 막아내지 못했다. 공든 탑의 경우 세우기는 힘들어도, 무너트리기가 쉬운 원리에 따른 것이었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들이 여과(濾過)를 거치지 않은 채, 대학교수로 임용되어온 사실과도 관계된다. 이미 전통학자분류에서 드러나듯, 셋으로 유형화되어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는 화담서경덕과 같은 자연주의학파(學派)이고, 둘째는 율곡이이(李珥)와 같은 실용주의학파이며, 셋째는 학문을 뒷전으로 밀어낸 채 이권을 챙기기 위하여, 당파싸움에 주력해온 아류(亞流)학자들이었다.
첫째의 경우는 오직 자연친화적인 자세로서, 학문과 진리탐구에만 주력해온 관계로 순수하고 ‘고운 심성을 도야(陶冶)’하는 데만 몰입해온 모습이다. 그래서 벼슬을 내주어도 응하지 않은 채 ‘신선(神仙)과 같은 고결한 자세’로서, 세상과 단절된 채로 살아온 이상주의학파이다. 둘째유형은 평소에 학문에만 몰두하다가도, 국가에서 불음이 있을 경우 헌신하는 자세로서, 요직을 맡으며 적극성을 보여 왔다. 셋째의 경우 오직 세력가를 뒤따르며, 출세의 길에만 혈안이 되어온 세속부류였다.
오늘날 대학사회에 불명예를 안겨줌으로써 ‘혼탁한 이미지’를 심어온 것은 셋째부류에 해당된다. 어떻게 보면 조선왕조후기에 전성기를 누려온 ‘당쟁(黨爭)의 전통’을 계승해온 것과도 유사한 모습이다. 대학교수에 해당하는 전통선비의 경우, 눌언민행(訥言敏行)을 귀감으로 삼으며 실천해왔다. 말이 느릴 만큼이나 점잖더라도, 합리적 행동에서만큼은 민첩하게 반응해온데 따른 것이다. 여기에서 민첩성이란 선악(善惡)의 분기점에 놓여있을 때 ‘배운 대로 올바르게 실행’하는 빠른 행보를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정판(正判)으로 표현되는 빠른 판단, 정행(正行)으로 표현되는 올바른 실천과도,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전통선비의 모습은 사리(事理)에 대하여 올바르게 판단함과 동시에, 올바른 실행으로 옮겨가는데 초점을 맞추어왔다. 그러므로 교언영색(巧言令色)하거나, 표리부동(表裏不同)과는 대조된 모습이다. 어느 것이나 교묘한 말로서 간교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형체마저 카멜레온처럼 변덕스러움을 보여 왔음으로, 겉과 속이 다를 것은 당연하다. 이런 행동은 이익을 앞세우는 시장거리에서나 있을 법한 일일 뿐 ‘진리의 전당으로 알려진 대학’에서, 통용될 수 없는 일이다.
대학에서는 순수무구(純粹無垢)함과 더불어, 정직과 신의(信義)를 강조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시장바닥의 간상배들과는 근본에서 차별된다. 하지만 잘못된 민주화바람에 맞추어 ‘불순물의 혼합’되는 대중화추세에 따라, 대학마저도 ‘부정적 요소가 혼재’하며, 잘못된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다. 바탕에는 인격과 재능에 걸쳐 ‘적재적소(適材適所)의 선별과정’을 거치지 못한 대학자체에, 책임을 모면할 수 없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양산체제로 들어간 대학난립추세’도 큰 몫을 해왔다.
‘그레샴의 법칙’이 진리의 전당인 대학에도, 적용되어온 것을 의미한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방종과 함께 ‘당선에만 주력하는 선거문화’에로 이어지고, 그것은 다시 각종투료를 의식한 잘못된 정책과 ‘묵계(?契)의 고리’를 싹트게 만들었다. 이것은 방치할 수 없는 한계점인 동시에, 부정한 모습을 연출해온 배경이 되었다. 올바른 시각으로 한국위상에 걸맞도록 대학을 정립하는 한편, 새로운 시각으로 재편성(reformation)해야 될 과제를 안게 된 요인이 여기에 있었다.
저자는 대학에서 평교수로만 봉직하지 않고, 수많은 학생기자들을 관할ㆍ감독하는 대학신문사주간을 시작으로 학장과 처장 등 중요한 보직까지 두루 거쳐 왔다. 자진한데 따른 것이 아니라, 주변이 요청해온데 따른 수락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들 보직이 전국에 걸친 협의회를 조직해왔고, 정기적 회합을 통하여 관련정보에 대하여 상호교환체제로 이어져왔다. 그렇기 때문에 소속대학에 한정되지 않고, 전국에 걸친 대학실상에 대하여 구석구석까지도, 상세하게 파악하는 처지에 있어왔다.
뿐만 아니라, 대학재학시절부터 캠퍼스생활을 통해서, 진지한 자세로서 올바른 길을 걸으며 모범상을 보여 왔다. 그런 까닭에 학생신분에서 ‘교수를 대면해온 시각’이 남다를 것은 당연하고, 세월을 뛰어넘고 교수신분으로 전환된 마당에서도, 대학실상에 대하여 현장경험까지 겹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누구보다도 ‘맑은 물속의 모래알’처럼, 대학실상을 명확하게 투시(透視)하는 처지에, 있어온 것으로 자부하고 있다. 심지어 “우리의 선비는 이렇게 살았다”를 비롯한 관련 문헌을 통하여 대학교수의 ‘연원(淵源)에 해당하는 전통선비’에 대해서도 검토하며, 학자가 준수해야 될 근본덕목과 자세에 대해서, 파악하는데 주력해왔다. 여기에다 소속학계의 현대한국지리학사, 국사대사전과 근현대인명사전, 대학평가자료와 한국교육사, 문화경관의 원형과 변형 등에 걸쳐 면밀하게 검토해왔다.
이를 바탕으로 현역교수시절에는 대학과 정부당국에 건의와 병행하여, 혁신방안을 제시하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하지만 형식적이고 일방통로에 그칠 뿐, 묵묵부답(??不答)으로 일관해온 것이 관계당국이었다. 이제 정년을 맞이했고 퇴임교수신분으로, 변신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하지만 대학이 잘못된 길은 심화되면서면서, 시간이 경과와 더불어 대학에 대한 ‘사회적 비판수위’마저, 높아지는 추세에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대학교수로 있었던 과거경력마저, 낯 뜨거움으로 다가오는 불명예를 감지하게 되었다.
귀소본능(歸巢本能)에 따른 애착심인지, 아니면 이렇게 방치할 수 없다는 사명감에 따른 것인지, 확인할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국가운명과 연계된 대학에 대하여 연민을 가진 채로, 이에 대한 내력과 실상점검으로 이어지도록 만든 점이다. 또한 자신이 걸어온 발자취를 돌아보는 동시에, 고심(苦心)에 찬 올바른 대응책을 강구하며, 대학의 건전한 미래상을 구상하기에 이르렀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최근 교육부에서 <대학구조개혁평가결과>에 대하여 발표(2015년 8월 31일)한 바가 있고, 여기에는 재정지원제한을 위한 66개 대학명단이 5등급에 걸쳐,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2023년까지 16만명의 정원감축이란 대응전략까지 내놓고 있다. 이와 같은 ‘현재의 당면과제와 함께, 미래에 대한 비젼’을 제시한 점에서, 필자의 저술취지와 일맥상통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출판작업이 완료된 단계임으로, 이를 반영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을 뿐이다.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이 포스팅은 제휴마케팅이 포함된 광고로 커미션을 지급 받습니다.
도서 DB 제공 : 알라딘 서점(www.aladin.co.kr)
최근 본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