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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근현대사 > 일제치하/항일시대
· ISBN : 9791195209057
· 쪽수 : 328쪽
· 출판일 : 2014-11-26
책 소개
목차
추천사
머리말
I. 뒤틀린 현대사 -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vs 친일파
1. 신소설의 작가, 조선을 팔아먹다 - 매국노 이완용의 비서였던 이인직의 숨은 친일 행적
2. 고종 황제 망명 시도 사건 - 전 재산을 털어 항일 무장 투쟁에 나선 이회영 일가
3. 일본 갑부, 조선 호랑이 고기를 VIP에게 대접하다 - 한국 호랑이와 표범을 멸종시킨 일제의 또 하나의 만행
4. 축복받은 일본에 살어리랏다? - ‘뼛속까지 친일파’ 윤치호 등 친일파를 7명이나 배출한 윤씨 집안
5. 백발 노인의 의거, 조선을 뒤흔들다 - 조선총독에게 폭탄을 던지고 순국한 64세의 강우규 의사
6. 조선사편수회, 한국 고대사를 말아먹다 - 황국사관의 전초기지였던 조선사편수회와 이병도 등 식민사학자의 궤적
7. 식민사관의 세 가지 거짓말 - 조선총독부 사관의 터무니없는 주장과 식민사관의 정체
8. 조선의 아낙네, 일제의 심장에 총구를 겨누다 - ‘여자 안중근’이라 불린 독립운동가 남자현
9. 독립투사 고택의 마당에 철로를 깔아 맥을 끊어버려라 - 석주 이상룡, 식솔을 이끌고 항일 운동에 뛰어들다
10. 경천사지십층석탑, 산산이 해체되어 현해탄을 건너다 - 고려청자에서 「몽유도원도」까지, 우리 문화재 수난기
11. 독립군 때려 잡는 조선인 부대를 아십니까? - 치욕의 간도특설대, 그들의 면면을 밝힌다
12. “광복군,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 임시정부, 국내 진공을 계획했으나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무산되다
II.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 해방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1. “왜 유순했던 조선인들이 포악해졌을까?” - 반성 없는 일본, 패전 직후에 고관대작들은 재산 빼돌리기에 ‘혈안’
2. 그 남자가 평양으로 간 까닭은? - 해방 후 친일파가 득세한 세상, 광복군 부사령관은 평양을 선택하다
3. 서북청년회, 그 죄를 어찌할까? - 야만의 극치를 달린 서북청년회의 온갖 비행과 만행
4. 피는 피를 부른다 - 여순 사건, 죽고 죽이는 악순환의 길을 열다
5. 한낮의 반민특위 습격 사건 - 역사가 무너진 현장, 이승만은 어떻게 반민특위를 박살냈는가?
6. 전혜린의 아버지, 백범 김구 암살을 지휘하다 - 평생 양지만 쫓아다닌 친일파 전봉덕의 인생행로
7. 정의의 이름으로 - 김구 암살범 안두희, 애국시민 박기서에게 맞아 죽다
III. 이승만은 어떻게 한국 현대사를 짓밟았나 - 한국전쟁 발발에서 휴전까지
1. 비극의 도시 얄타, 분단과 내전을 잉태하다 - 해방 전후 숨가쁘게 돌아간 동아시아 정세
2. 남조선 침략은 OK, 소련군 참전은 NO - 스탈린, 북한과 중국을 미국과의 전쟁으로 떠밀다
3. 대한민국 국군 수뇌부, ‘숙취’ 중에 남침을 당하다 - 대통령은 낚시 중, 국방부 장관과 작전국장은 연락 두절
4. “대통령인 내가 사과를 왜 하나?” - 대통령은 야반도주, 고관대작들은 피난 경쟁
5. 무자비한 폭격, 지도에서 사라진 평양 - 미군의 폭격으로 불바다로 변한 북한
6. 중공군, 압록강을 건너다 - 소련의 공군 지원 확약 없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마오쩌둥
7. 빨치산, 그 주홍글씨 - 지금도 유령처럼 떠도는 ‘빨갱이’라는 손가락질
8. 한국의 체 게바라, 지리산에서 산화하다 - 인간적 공산주의자 이현상의 삶과 죽음
9. “죽은 뒤에도 빨갱이란 말입니까?” - 남한 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의 장례를 치른 차일혁 경무관
참고문헌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조선에서 손꼽히는 갑부였던 윤치호는 수시로 총독부나 일본 군경에게 기부금을 바쳤지만 독립운동 군자금은 죽는 날까지 10원 한 장 내지 않았다. 이런 행태의 밑바닥에는 조선의 역사와 전통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조선인들의 민족성이 열등하다고 보는 시각이 깔려 있었다.
윤치호는 독립운동가들을 “자신이 죽을 용기도 없으면서 순진한 사람들을 죽음의 골짜기로 몰아가는 저주받을 악마와 같은 존재”라고 혐오했으며 임시정부 참가 요청도 거부했다. 그는 3.1운동에 반대하는 이유로 파리 강화회의에서 조선 문제는 상정도 되지 않을 것이고, 누구도 조선 독립을 위해 일본과 싸우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들고, “약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강자의 호감을 사는 것”이라고 강변했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9월 12일자 일기에는 이런 일도 기록했다.
“오후 3시 20분쯤 예쁘장하게 생긴 여학생이 찾아왔다. 그녀는 조선인민협회 명의의 서한을 내밀면서 조선 독립을 위해 자금을 달라고 요구했다. 나는 나 자신과 내 가족이 위험에 처할 수 있으므로 돈을 줄 수 없다고 말했다. 아울러 ‘독립운동가들이 자신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조선에 잠입하지 못하면서 내게는 생명을 담보로 자기들에게 돈을 대라고 요구하는 게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녀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서한을 챙겨서 가버렸다.”
희한한 사람은 3.1운동에서 확인된 조선 민족의 독립 열망을 무시하고 독립운동가를 비난하는 윤치호 자신이다. 윤치호는 조선을 무시하고, 미국과 영국에 대해서는 존경심과 시기심을 동시에 품고 있었으며, 날로 영토를 넓혀가는 일본을 경외했다.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은 모스크바 코앞까지 쳐들어온 독일군에 맞서 후퇴를 거부하고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전쟁이 터진 지 불과 이틀 만에 서울 시민들 몰래 새벽에 측근 몇 명만 데리고 황망히 서울을 떠나 남쪽으로 도주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전쟁이 터지자 국민들을 내팽개치고 혼자 야반도주를 해버린 것이다. (중략)
이승만은 국회 본회의가 한창 열리고 있었던 시각인 새벽 3시 반, 남행열차에 탑승했다. 피난 일행은 부인 프란체스카와 경무대 경찰서장 김장흥, 비서 황규면, 경호경찰 등 달랑 6명이었다. 아마 한민족 역사상 국가원수로는 가장 초라한 규모의 피난 행렬이었을 것이다. 이승만이 탄 특별열차는 기관차에 객차 두 량이 달린 낡아빠진 3등 열차였다. 유리창은 깨져 있어 바람이 들어왔고, 의자는 시트조차 없는 나무의자였다.
이승만의 야반도주는 극비사항이었다. 신성모 국방장관과 경무대 일부 비서진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다. 국회의장과 대법원장, 무초 주한 미 대사, 군 최고지휘관들도 전혀 몰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