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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95353941
· 쪽수 : 318쪽
· 출판일 : 2020-09-21
책 소개
목차
웅덩이
뒤돌아보다
스무 살 엄마와 만나다/ 차가운 담벼락의 기억/ 나의 고향은/ 어린 날의 풍경
빼앗긴 일터
서울 길, 쪽박산 야학/ 든든한 울타리 원풍노조/ 부활절 사건/ 동갑내기 김경숙의 죽음/ 문둥이 탈을 쓰
고/ 계엄사에서 사표를 쓰다/ 그날, 1982년 9월 27일/ 원풍노조와 영등포산선
문밖에서
삼양동 기억의 명암/ 해남행 도피휴가/ 신길동 삼호빌라 101호/ 노동자랑 친구하지 말라고 외칠까/ 갈라
진 사람들
거제, 또 다른 시작
대우조선 친구들과/ 두 불꽃 묘비/ 거제의 나날/ 해고자가 해고자와 결혼을?/ 따스한 기억, 거제경실련
대학 문턱을 넘다
오십대 여대생/ 우리 안의 파시즘/ 만학도의 사연/ 먼 작가의 길
엄마는 안 죽는 줄 알았어
엄마와 할머니의 시간/ 가장 슬픈 이별
다르게 적는 이력서
비극의 봄, 상처꽃과 세월호 / 시장탐험대, 아이들과 함께
제주, 이어지는 글쓰기
들고나는 바람처럼/ 내 인생의 책, 마침내 책장을/ 세대를 잇는 기록모임/ 제주의 길을 걷다
우리 이름을 다시 부르다
그 후 우리는
후기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까끌까끌한 보릿단과 가벼운 벼이삭 자루, 뒷산의 좁은 산길을 땔나무를 이고 오던 기억에는 늘 할머니가 있다. 오늘은 꼭 기성회비를 가져가야 한다고 고집스럽게 버티고 서 있는 나를 회초리로 쫓다 못해 결국 고쟁이 춤에서 꼬깃꼬깃한 지폐를 꺼내주던 이도 할머니였다.
쇠죽 끓이는 아궁이에 구운 고구마를 미끼로 아침의 단잠을 깨우고, 동네 강변에 판을 벌린 가설극장에 나를 슬쩍 보내주던 할아버지의 기억은 따스하다. 허우대 좋고 호인인 할아버지는 낭만도 있었다. 거름지게에 진달래를 한 아름 얹어 와 항아리에 물을 채워 꽂기도 했다. 할머니는 일부러 그러는지 온 산에 지천이어서인지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나는 장독대 앞자리를 차지한 진달래 항아리가 좋았다.
졸망졸망한 자식들에 가진 거라곤 시골 논 한 뙈기에 마룻장만 한 밭 두엇이었으니 아버지는 아득했을 것이다.(...) 한 달에 서너 번은 만취하던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보다 남은 가족들 걱정에 눈물을 흘린 나는 술 같은 건 입에도 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술만 마시면 “앞앞이 말 못하고 철천지에 한이구나” 염불 외듯 하던 아버지처럼 ‘한 많은 세상’에 ‘한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어느새 나는 술자리를 잘 만드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대우병원 영안실 앞에는 446개의 촛불로 만든 ‘열사여 부활하소서’가 타올랐다. 스물한 살, 스물네 살의 이들도 (...) 대우조선에 입사했을 때는 자부심이 있었을까. 옥포만에 띄운 시운전 직전의 거대한 시추선들이 아름답고 자랑스러웠을까. 웅장하고 정교한 선박을 완성해가는 동안 부서지고 짓이겨지는 자신들의 육신과 존엄성이 절망스러웠을까. 대규모 해고로 동료들이 하루아침에 이불보따리를 짊어지고 쫓겨나가는 것을 보고 냉가슴 앓으며 자조하고 절망했을까. 87년 노동자대투쟁이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이석규의 핏자국 위에 노조 깃발이 꽂혔을 때는 희망도 솟았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