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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국경에서 평화 시대를 묻는다

고려 국경에서 평화 시대를 묻는다

(고려 국경 연구)

윤한택 (지은이)
더플랜(THE+ PLAN 참생각품은숲)
2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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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국경에서 평화 시대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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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고려 국경에서 평화 시대를 묻는다 (고려 국경 연구)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고대~고려시대 > 고려시대
· ISBN : 9791195602148
· 쪽수 : 380쪽
· 출판일 : 2018-07-30

책 소개

오랫동안 고려시대 토지를 연구해온 고려 전문가 윤한택의 <고려 국경에서 평화 시대를 묻는다>. 고려의 국경이 한반도 내부가 아니라 요녕성에까지 미쳤으며, 국경의 역할을 했던 압록강 또한 요하임을 밝힌다.

목차

책머리에
평화시대의 역사학을 위하여

제1장
토지소유의 강제성을 폭로함
1. 들어가며
2. 또 다시 소유의 지평에 서서 - '세계사의 기본법칙'의 행방
3. 연구 수행 시대의 새 지평- 일신, 물신, 당위
4. 연구 대상 시대의 새 지평 - 가치, 잉여가치, 경제외적 강제의 향방
5. 나가며-경계의 역사로 소유의 지평을 넓히며

제2장
고려국 북계 봉강에 대하여
1. 서론
2. 책봉, 지리지, 축성 기사 검토
3. 경제 기사 검토
4. 결론

제3장
고려 서북 국경에 대하여
1. 머리말
2. 대요 시기
3. 대금 시기
4. 맺음말

제4장
고려 보주 위치에 대하여
1. 머리말
2. 대요 시기
3. 대금 시기
4. 맺음말

제5장
고려초기 서경고
1. 서론
2. 명칭과 기구
3. 위치
4. 행차 기타
5. 결론

부록
반도고려에서 복원고려로
1. 청천강 이남의 영유(태조 시대)
2. 청천강 유역의 점령(성종 11년 이전)
3. 압록강 동쪽의 점령(성종 12년 이후)
4. 압록강 가의 퇴각·이양(현종 6년 이후)
5. 의주 방면의 회복(예종 11년 이후)

저자소개

윤한택 (지은이)    정보 더보기
(전)인하대학교 교수 경기문화재단 전문위원 청명 임창순 문하 한문 수학 고려대학교 문학박사 서울대학교 경제학사 저서 『고려국경에서 평화시대를 묻는다』 『다산의 고려 서북계 인식』 『근대 동아시아 외교문서 해제』 『바로 보는 우리 역사(공저)』 『사회과학개론(공저)』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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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책머리에]

평화시대의 역사학을 위하여

한반도가 몸부림치고 있다. 뿌리 깊이 박힌 냉전체제의 질곡에서 벗어나 평화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지금 한반도는 마지막 안간힘을 쓰고 있다. 1970년대 소련을 필두로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하기 시작했고, 냉전체제는 점차 해체되어 가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도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냉전체제를 해체하고 분단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방향에서 적극적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유독 한반도에서는 냉전체제의 잔영들이 물러설 틈을 내어주지 않았었다. 이렇게 70여 년간 우리 한반도를 짓누르고 있던 냉전체제가 이제야 비로소 해체를 향해 어렵사리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하리라 기대할 수만은 없다. 냉전체제의 해체와 평화시대의 도래가 가시화되고는 있어도 여전히 한반도 분단체제의 해체까지는 불안한 요소가 남아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지역의 지정학적 조건과 세계의 정치경제적 패권이 또다시 결합될 경우 진영 간의 대결이 새로운 형태로 폭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지난 20세기 냉전적 대결을 가장 고통스럽게 경험해야만 했고, 그 익숙한 경험이 우리의 선택을 여전히 진영 간의 대결로 몰아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우리는 이제 전쟁의 시대로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가의 위기, 영토의 위기

한반도를 둘러싼 냉전 질서를 종식시키고 평화·통일 시대를 연다는 것은 우리 사회 안의 정치경제학적 전망의 분단을 청산하고 서로 다른 정치경제적 사회구성을 융합, 혹은 통일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경제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남과 북은 분단으로 말미암아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각각 다른 사회구성체로 나뉜 채 파행의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같은 변화는 우리의 활동 범위가 남북은 물론 대륙으로 확장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우리 지정학에 혁명적 변화가 박두하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 마지막 냉전 지역인 한반도의 분단체제가 출구를 향해 가고 있는 지금, 우리는 다양한 방향에서 변화를 예상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경계는 어디까지이며,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해왔던 국경과 어떻게 다를 것인가? 우리가 지금까지 지녀온 영토의 개념은 그대로 유지될 수 있을 것이며, 유지될 수 없다면 이제 영토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 것인가? 이같은 질문과 함께 예상할 수 있는 변화를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평화시대에 우리가 가장 먼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생활공간의 확장이다. 당장 남북한은 물론 동북아 대륙까지 생활영역이 확대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민족의 경계는 일본 제국주의의 반도사관에 의해 반도 내부로 축소되어왔고, 그것이 현재 남북한을 아우르는 경계로 왜곡되어 자리 잡았다. 그러나 평화·통일시대가 도래하면서 우리의 생활공간은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 대륙으로 확장되는 것이 불가피하다. 생활공간의 확장은 자연스럽게 영토와 국경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수반한다. 따라서 평화·통일 시대에는 생활공간의 확장과 더불어 역사적 기록으로 남아있는 국경에 대한 지정학적 복원의 필요성과 그것을 둘러싼 논의가 대두하게 될 것이다.

둘째, 생활공간의 확장과 함께 예상할 수 있는 또 다른 일은 국경, 즉 경계에 대한 인식의 변화다. 이제 국경은 냉전시대처럼 영역의 침탈을 방어하고 타자의 개입을 배제하기 위한 경계뿐 아니라 교류와 소통의 확대라는 의미까지 포함하게 될 것이다. 이와 함께 자주성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소통과 교류가 가능한 경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마련해야 한다. 즉, 자본주의 시대의 영토 인식이나 냉전 시대의 국경 개념을 넘어선 새로운 ‘경계’ 개념이 필요하다.

셋째, 국가의 성격과 역할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인류 역사는 더 많은 권력과 부(富), 영역을 확보하기 위한 싸움의 역사였다. 싸움으로 확보한 영토·권력·부(富)를 관리하고 운영하기 위해 인류는‘국가’를 고안해냈다. 그러나 독립적 객체로 실체화되고 ‘당위의 체제’로 신비화·절대화하는 과정을 거친 결과, 국가가 오히려 그 주체인 인류를 제약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나타났다. 더 나아가 역사의 주체가 된 국가는 영역에 대한 배타적, 약탈적 지배를 강화해 나갔고, 이에 따라 인류가 자신들이 고안해낸 국가에 의해 지배당하고 통제받는 역전 현상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제 ‘국가’도 성격의 변화를 필요로 한다. 평화시대로 이행하면서 당위의 체제로서의 국가, 전쟁과 약탈의 주체였던 ‘영역국가’는 경계를 매개로 작동하는 ‘경계국가’로 성격이 바뀔 것이다.

영역에서 경계로: 평화ㆍ통일시대의 정체성, 네트워크

이러한 정세의 전환은 단순한 영토관의 변화만을 가져온 것이 아니다. 집단 간의 투쟁에 근거한 기존 역사관을 지양하고, 자유로운 개인의 존재를 회복하는 역사관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역사발전의 주체가 물리적인 영토를 다투던 민족으로부터 경계에 서서 자기의 개성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자유로운 개인의 연합으로 바뀌고 있다.
그렇다면 남북이 평화체제로 이행할 경우 우리의 국경은 어디까지이며 국경과 국가의 의미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를 살피기 위해 두 가지 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첫째, 지정학에 대한 역사적 복권, 즉 지정학적 인식의 중요성을 다시 되살리는 작업이 중요하다. 이는 분야별로 분절되었던 정치·경제·지리, 그리고 역사 등을 지정학을 중심으로 다시 재결합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남북이 평화체제로 이행하고 있는 지금, 지정학의 중요성을 다시 인식하고 이를 기반으로 각각 나뉘어 연구되어 왔던 분야의 통합과 포괄이 절실히 요청된다.

둘째, 이 같은 ‘지정학의 복권’은 국가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영역국가’에서 ‘경계국가’로의 변화이다. 평화시대를 앞둔 지금, 정치·경제·지리, 그리고 역사 등을 포괄하고 있는 ‘국경’, 즉 ‘경계’는 과거처럼 단순히 ‘영토’라는 용어로 범위를 좁힐 수 없다. 하나의 영토는 다른 영토와 접하면서 경계를 이루게 된다. ‘영토’가 고착화되고 배타적인 영역을 의미한다면, ‘경계’는 차이와 대립을 구획하는 동시에 소통과 공존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일정 영토를 기반으로 권력을 구축했던 영역국가로부터 서로 다른 역사전통과 정치경제학적 전망을 융합하는 경계국가로의 비약이 이루어지면, 영토를 바탕으로 한 배타적·약탈적 정체성보다 경계를 바탕으로 하는 상호보완적 ‘특이성의 비약’과 ‘개성의 강화’ 현상이 국가의 특성으로 대두하게 된다. 이런 조건에서는 이제 ‘유구한 역사와 광활한 만주 벌판’을 염원하는 것과 같은 ‘국수주의’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다.
절대적 당위로 실체화되었던 ‘국가’는 점차 약화되는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대신 ‘고유한 민족의 자연지리와 인문지리가 역사상 최적 상태로 결합되었던 자주적 경계’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사물을 담는 그릇으로서 시간과 공간에 갇혀 있던 영역이 차이와 소통을 매개하는 경계로 전환되고, 각 국가들은 전 지구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한 국가의 특이성은 전 지구적 네트워크(그물망)의 주요한 축(그물코)을 이루고, 국가는 과거와 같은 약탈적 지위를 갖고 지배하는 실체가 아니라 오직 생활공간의 경계들(네트워크)을 관리하는 그물코의 역할로 자리 잡을 것이다. 한마디로 ‘영역국가로부터 경계국가로의 이행’으로 요약할 수 있다. 바야흐로 자유로운 개인들이 연합하는 ‘네트워크’의 질서가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같은 철학적, 체제적 전망에 대해 낭만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학계도 이제 평화·통일시대에 대비한 새로운 역사적 담론을 준비해야 한다. 과거의 반도사관으로는 평화·통일시대를 담아낼 수 없다. 기존의 영토관은 물론, 국가관과 민족관으로 평화·통일시대의 생활영토와 자주성을 구축해 낼 수 없다. 지금과 같은 이행의 시대에 역사학계가 만들어내야 할 담론의 중심은 바로 ‘경계’이다. 만약 경계국가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여전히 영역국가의 프레임에 갇혀 생산적 담론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역사학은 결국 중대한 위기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역사학의 복원: 정치경제학과 지정학의 결합

국가는 부와 권력의 확장에 기반을 두고 성장해왔고, 국가의 주요 관심 또한 정치경제적 요인에 집중되어 왔다. 지식의 영역도 마찬가지이다. 영역국가의 근대적 형태인 민족국가에서 정치경제학인 국부론, 자본론, 제국주의론이 주도적으로 발전해 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영토(또는 국경)는 이들 정치경제학적 요인들이 작동하고 그 내용들이 채워지는 그릇, 즉 형식이었다. 정치경제적 요인들은 자연스럽게 영토의 확장을 불러왔다. 한정된 지구의 공간을 생각한다면, 자본주의 발달 과정에서 지정학의 중요성이 점차 부각되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정학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팍스 브리태니카, 혹은 팍스 아메리카나로 불렸던 선발 제국주의가 아니라 독일, 일본, 이태리 등과 같은 후발 제국주의 국가였다. 많은 영역을 정치경제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던 선발 제국주의와는 달리 자신의 영역을 새롭게 확대하는데 한계에 직면한 후발 제국주의 국가들은 국경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고 영토의 확장을 추구했다.
한 국가의 부와 권력은 그것이 영향을 미치는 영토와 분리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영토는 그 범위를 경계 짓는 국경과 별개일 수 없다. 영토 내부의 정치경제적 연구가 국경에 대한 연구와 서로 다른 주제일 수 없는 이유이다. 따라서 경계에 대한 지정학적 연구는 당연히 정치경제학적 연구를 아우르게 된다.
앞에서 강조한 바처럼 경계에 대한 연구는 한반도에서 냉전이 해체되고 평화가 정착되어 가는 이 시점에서 특별한 역사성을 갖는다. 그것은 지금이 바로 전쟁을 통해 영토의 확장을 추구했던 영역국가의 지정학을 넘어 평화·통일시대의 경계에 대한 새로운 지정학적 인식으로의 전환이 요청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변화는 또한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질서 모색을 요구한다. 한반도 지정학의 변화는 그것이 영토이든 생활공간이든 단순히 경계의 확장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동시에 정치·경제·지리, 그리고 역사인식 등 지금까지 각 영역별로 나뉘어 있던 것들이 지정학적 특이성(sigularity)을 바탕으로 새로이 종합될 것을 요구한다. 지정학은 과거와 같은 ‘영토학’이 아니라 다른 나라나 다른 발전전망을 가진 정치경제학과 만나는 ‘경계에 대한 인식’으로 전환된다. 경계에 대한 인식은 단순히 어디까지가 우리 영토냐는 문제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에 그간 개별 국가에 갇혀 있던 정치적·경제적 발전전망들이 서로 만나 새로운 융합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책이 우리의 국경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배타적 영역을 확장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 기존에 우리가 가져왔던 경계에 대한 인식은 물론, 그 경계에서 포착되는 정치경제적 구성에 대한 인식도 새롭게 전환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한반도는 전 세계에 남은 마지막 냉전지역이며, 이 같은 결과는 지정학과 무관하지 않다. 한반도에 대한 후발 제국주의 국가 일본의 지정학적 전략은 한민족의 생활공간을 한반도에 가두려는 ‘반도사관’과, 동북아 지역에서 일본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대동아공영권’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전략은 지금의 한반도 상황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인이기도 하다.
불행하게도 일제의 패망은 제국주의 지정학을 극복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해방 후 등장했던 여러 시도들은 곧 이은 전갱과 분단과정에서 실종되고 말았고 남북한 또한 서로 다른 정치경제학을 기반으로 다른 경로를 걷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역사학의 여러 방법론들은 자신의 아성 속으로 숨어들어 가게 되었고, 정치경제학적 연구도 지정학적 연구와 분리되었다.
냉전에서 평화시대로 전환되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이 역사연구 방법론의 변화이다. 과거의 낡고 분절화된 역사인식을 넘어 각 부분들이 경계를 중심으로 접점을 마련하고 종합해 나가야한다.
이제 제국주의 지정학은 청산되어야 할 지점에 이르렀다. 냉전을 청산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과정은 일제에 의해 왜곡된 지정학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나아가 일제와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상실했던 우리 민족의 독립적 생산양식과 정치권력의 발전 전망, 즉 독자적인 정치경제학을 회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정치경제학과 지정학이 결합하는 과정이다.

필자는 이 책에서 고려의 국경 문제를 토지제도와 연관 하에서 검토했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종래 지정학과 정치경제학을 분리해서 취급하던 연구 방법을 한 단계 전진시켰다고 자부한다. 역사연구의 근본은 사료비판과 종합이다. 그러나 역사학이 ‘팩트’라는 물신에 빠져 있다면 더 이상 역사학으로 존립할 수 없다. ‘팩트’라는 미궁에서 벗어나 그것을 해체하고 새롭게 종합할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물론 일부 역사학은 여전히 일제의 지정학적 잔재에 머물러 형식적 실증성을 과학이라고 주장하고, ‘정치경제학과 지정학의 결합’을 국수주의로 매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같은 비판은 역사학의 위기를 더욱 가중시켜 역사학 스스로 자멸케 하는 독소로 작용할 수도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반도사관’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시도들

국경과 영토 연구에서 지금까지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일본제국주의의 ‘반도사관’이다. ‘반도사관’은 일본제국주의가 식민지 침탈을 합리화하기 위해 부당하게 전제했던 지정학으로, 우리 민족의 생활 터전을 현재의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한반도 안으로 한정하고자 한다. 그 중에 특히 필자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고려의 서북 국경을 현재의 압록강으로 끌어내려 우리의 역사적 강토(疆土)를 한반도 내부로 한정하려는 시도이다.
이 같은 지정학은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설정을 위한 논리적 전제였으며, 그것이 지금 우리의 영토 및 국경 인식의 밑바탕을 구축하게 되었다. 그간 섬처럼 고립되어 왔던 우리 생활 영토가 한반도를 넘어 대륙으로 확장될 것으로 예상되는 지금, 영토와 국경 문제에 대한 역사적 재검토가 반드시 필요하다.

일본이 ‘반도사관’을 구축하는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청일전쟁, 노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대륙 진출의 교두보인 한반도를 확보했다. 이어 일본은 1909년 간도협약에서 당시 대한제국의 영역을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한반도로 한정하였다. 이 전초 작업은 만주역사조사부에 의해 치밀하게 수행되었다. 일본은 을사조약으로 설치한 일제가 대륙 경영의 동맥을 구축하기 위해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만주역사조사부는 바로 남만주철도주식회사 내부에 소속된 부서였다. 그리고 여기에 참여한 이들은 독일의 실증사학에 영향을 받은 ‘문헌고증사학’계통의 학자들이었다.
1913년에 발간된 『조선역사지리』, 『만주역사지리』 보고서도 한반도에 대한 그들의 지정학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렇게 고안된 일본제국주의의 지정학은 ‘반도사관’으로 자리 잡았고, ‘반도사관’에 따라 일본은 조선의 정체성(停滯性)과 타율성을 조작하고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근거로 삼았다. 한반도가 대륙과 해양에 끼어 끊임없이 양측으로부터 압박을 받으면서 정체되었고, 양측의 추동에 의해서만 타율적으로 정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논리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 같은 작업은 총독부 시기에는 동경제국대학으로 옮겨져 지속되었다. 그리고 1930년대 만주사변, 중일전쟁, 그리고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정세 속에서 ‘대동아공영권’을 수립하는 근거로 제공되기도 했다. 이런 영토관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편찬한 『조선사』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 지정학은 일제가 패망하고 우리나라 독립 이후에도 형식적 실증성만을 강조하는 지명고증학으로 숨어들어 그 생명을 이어갔다.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주축으로 한 그들은 객관적 실증주의를 표방했지만, 그 결과는 일제의 지정학에 대한 주관적 합리화였으며 수동적 수용일 뿐이었다.
물론 이러한 제국주의 지정학에 대항하는 ‘민족주의사학’의 전통이 우리에겐 있었다. 우리 민족의 자주적 의식을 강조하고 역사적 생활영역을 만주 지역까지 확장하려고 시도한 단재 신채호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민족주의 사학의 전통은 일제의 탄압을 견디며 식민지 민족해방투쟁의 일환으로 전개되어 오는 과정에서 때로는 대종교 등 종교의 외피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전통은 일본제국주의의 패망에 이은 냉전체제의 구축과 함께 급격하게 그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민족주의 사학의 전통에 기반을 둔 지정학적 인식은 분단·냉전체제가 강고하게 구축되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왜곡·약화되거나 증산도 등 두터운 종교적 외피 속으로 더욱 깊숙히 숨어들어 갔다.
한편, 분단·냉전체제 속에서도 우리 사회의 독자적 발전전망을 담은 정치경제학의 복원이 모색되었다. 자주적 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노동운동과 통일운동 등의 사회운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지식사회도 분단·냉전체제를 극복하고 통일된 민족국가를 복원하기 위한 이론적 시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자본주의 맹아론, 시대구분론, 사회구성체론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자본주의 맹아론은 근대적 발전의 가능성이 우리 내부에 존재했으나 제국주의 침략에 의해 발전의 가능성이 좌절되었음을 밝히고, 분단 또한 제국주의의 귀결임을 강조하고 있다. 시대구분론은 세계사와의 관련 속에서 우리 민족 역사 발전이 가지는 보편성과 특수성을 해명함으로써, 분단된 민족의 통일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한 논의를 진행하였다. 사회구성체론은 식민지, 분단 상황 하에서의 사회구조를 분석·극복함으로써 자립적이고 통일된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였다.
나아가 한반도 주변의 동북아지역에서 EU와 NAFTA 등에 비견되는 동아시아연합을 구축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그러나 이 또한 경제적 관점에 기반을 두고 정치적 갈등을 최소화한다는 정치경제적 프레임 속에서만 논의되어 왔다.
물론 이같은 이론적 시도들도 나름대로 실천적으로 유의미한 전략과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본주의 맹아론, 시대구분론, 사회구성체론, 동아시아연합론 어디에도 정치경제학과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논의되어야 할 지정학에 대한 ‘역사적 논의’가 실종되었다는 것은 매우 치명적인 약점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민족의 생활영역에 대한 총체적이고 역사적인 성찰이 없다면 이는 바로 ‘반도사관’에 갇힌 지금의 인식 틀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고, 이런 한계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출발한다면 그 어떤 이론이든 결코 통일된 민족국가를 복원하는 데에 유의미한 결과를 내놓을 수도 없다.
‘반도사관’에 기반을 둔 지정학적 인식은 아직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지금도 우리 헌법 제 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지식사회에서는 이 같은 지정학에 대한 어떤 진지한 역사적 성찰과 문제 제기를 시도하지 않고 있다. 헌법이 가진 상징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중대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학계는 이에 대해 무관심하다. 이 같은 무관심이야말로 국경에 대한 빈곤한 역사적 인식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위기의 역사학이 경계에 대해 묻는다

물론 그간 역사학에서도 지정학과 관련된 새로운 방법론에 대한 모색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회경제사학’과 ‘민족주의사학’이 제국주의와 구별되는 다른 길을 모색한 바 있었다. 사회경제사학은 정치경제학에 기반을 두고 보편적 세계사의 발전법칙에 입각한 역사 발전 과정을 서술함으로써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을 극복하려 하였고, 민족주의사학은 타민족과의 투쟁과정에서 형성된 민족 고유의 정체성에 주목함으로써 이들을 극복하려고 시도하였다.
해방공간에서 이 작업의 선구자는 일본 제국주의 지정학에 대항했던 단재 신채호를 계승한 위당 정인보였다. 그는 1935년 1월 1일부터 1년 7개월간 「오천년간 조선의 얼」이란 제목으로 『동아일보』에 글을 연재했으며, 이를 『서울신문』이『조선사연구』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였다. 그 흐름을 이은 윤내현은 『고조선연구』에서 우리 역사의 뿌리인 고조선을 문헌 사료를 통해 고증하고 복원하였다.
또『단재 신채호 전집』 편찬에 참여한 이만열은 단재가 역사 연구, 특히 고대사 연구를 통해 일제의 ‘식민주의 역사관’을 극복하고 자주적이고 발전적인 민족사를 제시하였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김용섭도『농업으로 본 한국통사』에서 우리 민족이 중국 요하문명권에서 꽃핀 홍산문화에서 시작되었고, 여기서 비롯된 농업 발전과 정치 이념을 수단으로 외래 문명과 경쟁하면서 발전해 왔다고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우리 지정학을 복원하려는 시도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폭력적인 냉전체제가 더욱 고착화되어 가면서 우리 사회의 독자적이고 보편적인 발전 가능성을 새롭게 모색하려 했던 ‘자주적 정치경제학’을 위기로 몰고 갔다. 위기를 맞게 된 것은 ‘자주적 정치경제학’ 뿐만이 아니었다. 식민지 지배 체제 아래서 분절화 된 지정학을 ‘자주적 영토관’으로 복원하려는 시도 또한 ‘실증주의’ 방법론으로 도피하거나 종교적 외피 속으로 더 깊이 숨어들어갔다.
우리 사회가 인문학의 위기를 거론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진영모순의 해소와 냉전체제의 종식, 평화체제로의 이행 등에 대한 전망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전망의 부재는 역사학도 예외가 아니다. 역사학의 위기는 사료비판을 바탕으로 한 문헌고증사학은 물론, 새로운 발전전망을 담은 사회경제사학이나 민족주의사학의 성과를 올바르게 계승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처럼 계승이 부진했던 것은 역사 연구가 실증·정치·경제·지리 등으로 분절되어 이루어져 온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역사학이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분절된 연구 과정을 다시금 종합하는 일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사료비판과 종합을 본령으로 하는 역사학이 조각조각 분절화 되어온 현상을 시급히 시정해야 한다.
이에 대한 성찰 없이 ‘유사역사학’이니 ‘강단사학’이니 하는 이념적 언어로 편 가르기 하는 것 자체가 위기의 반영일 뿐이다. 사회경제사학과 민족주의사학은 본래 둘이 아니었던 것처럼, 정치경제학과 지정학도 분리되어 온전히 존립할 수 없다. 평화시대를 바라보며 역사학은 자기 본령을 회복할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지금 요구되고 있는 것은 ‘약탈을 바탕으로 했던 영역’으로부터 ‘상호보완을 바탕으로 하는 경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새로운 발걸음이다. 다시 말해 위기의 역사학이 ‘경계’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하지만 이 같은 의도와 무관하게 필자의 글들이 역사학계의 논란에 끼어들게 되어 마음이 편치 않은 상태이다. 이 책에 실린 논문들을 학술지에 발표하면서 역사학계의 주류가 참여하여 진행하던 동북아역사 관련 사업에 이의를 제기하는 모양새가 되었기 때문이다. 고려의 서북국경이 압록강(鴨?江)(현재의 요녕성 요하)임을 논증함으로써, 서북국경을 현재의 압록강(鴨綠江)으로 표기한 동북아역사재단의 동북아역사지도 제작 사업을 지체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근대 식민지와 분단 시대를 통과하고 새로운 문명사적 전환을 경험하고 있는 지금 역사학은 더 이상 침묵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문명사적 전환기에 역사학도 새로운 담론을 제시할 수 있어야 그 존재 의미를 인정받을 수 있다. 만약 위기의 역사학이 이 담론 제시마저 외면한다면 위기는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빠지게 될 것이다.
필자는 그 담론의 중심을 이루는 핵심적 키워드가 ‘경계’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미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경계’는 영토의 정치경제학적 내포는 물론 국가관의 변화 등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고려시대 국경 문제에 집중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이 같은 과정에서 필자가 놓치려 하지 않았던 두 가지 끈이 있었다.

하나가 사회경제사학이 가지고 있던 저항적 민족주의였다. 필자가 일찍이 주목했던 토지 연구는 기본적으로 정치경제학에 바탕을 둔 연구였다. 토지문제는 식민지적 지배관계가 압축된 것이어서 토지연구는 필연적으로 제국주의에 대한 식민지 민족해방투쟁의 관점을 벗어날 수 없었다. 저항적 민족주의가 통일된 근대 민족국가 건설을 지향하고 있었던 만큼 필자는 가능하면 이 관점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필자는 이 관점을 지키면서도 동시에 그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 그 이유는 저항적 민족주의도 그 지향점이 영역국가인 이상, 영역을 지키며 타자를 배제하는 국가주의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영토 민족주의’도 비판적으로 결합시키려 노력했다. 영토 민족주의는 과거 역사에서 민족의 생활정치 공간, 즉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런 관점도 침략적 국수주의라는 역사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필자는 이처럼 두 가지 민족주의가 가진 문제의식을 전면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그 편향성과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즉 이 두 개의 역사적 전통을 ‘경계’를 중심으로 종합하여 이론적·실천적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재배치하는 데 주력하고자 했다.
이 책은 우리 국경의 장대함을 입증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니다. 필자가 이 책을 ‘경계’에 대한 새로운 지정학적 인식을 제안하는 것은 오히려 역사학계가 기존의 틀을 넘는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내도록 자극하기 위함이다. ‘경계’에 대한 모색을 통해 ‘역사학의 위기’를 드러내고, 나아가 그 ‘위기의 역사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스스로 묻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이 책을 기획하고 집필하였다.

왜 고려(高麗)인가

그렇다면 독자들은 ‘왜 하필 고려(高麗)인가?’를 묻게 될 것이다. 돌이켜 보면 필자가 고려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일제 하의 사회경제사학을 계승하겠다는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사회경제사학의 핵심이 역사의 보편적 발전을 설명, 해명하는 것이었다면 ‘토지’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중요한 수단이자 기반이었다. 그리고 토지에 대한 소유관계를 기반으로 역사발전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시기가 ‘중세’였으며, 그 중세의 기원과 전형을 찾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긴요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필자에게 고려의 토지 문제는 과거 중세시대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은 물론 우리 사회의 보편적 발전과정을 전망하는 데 결정적 부분으로 인식되었다.
필자가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던 우리나라의 1970년대는 외자에 의존한 수출주도형 경제개발의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시기였다. 현실에 저항하기 위해 노동운동과 통일운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이 전개되기도 했고 현실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비판적 대안으로 자립적 민족경제에 대한 전망이 모색되기도 했다.
이 같은 이론적·실천적 시도의 밑바탕에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 유산을 청산하는 문제가 놓여 있었다. 이른바 정체(停滯)성론, 타율(他律)성론, 당파성론을 극복하는 것이 과제였다. 한국사회는 사회 발전의 동력인 ‘사적소유’가 결여되어 역사시대 내내 정체되었으며 내부 구성원들 사이의 파당과 분열로 인해 외세에 의한 타율적인 충격 없이는 발전을 이룰 수 없었다는 주장을 논파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를 위해 역사학에서는 ‘자본주의 맹아론’을 검증하고 논의하는데 초점이 모아지고 있었다. 조선 후기 사회의 농업을 비롯하여, 수공업·상업·광업·화폐·사상 등 전반에 걸쳐 근대화를 위한 자주적 발전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실증적 자료들을 축적하고 학습했다. 그 흐름은 ‘맹아’ 이후의 행방 추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개항기, 일제, 해방, 분단 시기로 범위가 확대되어 갔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필자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 시간을 보냈다. 모두가 현재의 방향으로 몰려가는 이 시점에서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가 ‘맹아’ 이전의 구체제, 이른바 ‘봉건제’를 검증하는 작업도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당시 역사학 뿐 아니라 학계전반의 보편적 주관심사였던 ‘시대구분론’, ‘세계사의 기본법칙’에 연구자로서 모험을 건 셈이었다.
이렇게 시작한 토지제도에 대한 천착은 필자를 한국 토지제도의 조형(祖型)에 해당하는 고려 전시과(田柴科)를 붙들고 평생 씨름하는 형극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다. 그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필자가 겨우 손바닥만 한 결과 하나 내 놓은 것이 『고려전기 사전 연구』와『 고려 양반과 양반전 연구』 출간이었다.
부족한 역량으로 워낙 거대한 문제와 마주하다 보니 그 과정도 쉽지 않았다. 그 이후의 연구도 순탄치 못했다. 특히 현실 세계사가 획기적 전환기를 맞으면서 더욱 그러했다. 냉전체제가 해체되면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진영모순이 현상적으로 해소되어가는 모습을 보이자, 세계사의 보편적인 발전 법칙에 대한 기존의 연구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재검토가 요청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풍미했고, 오리엔탈리즘이나 옥시덴탈리즘 등과 같은 복고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정치경제학을 기반으로 ‘사회구성체론’, ‘시대구분론’, ‘세계사의 기본법칙’ 등을 해명하고 설명하고자 했던 노력들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주로 기존의 저항적 민족주의에 기반을 두었던 필자의 토지 연구도 당연히 그 역사적, 실천적 의미를 되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필자의 연구가 저항적 민족주의와 맥을 같이 했던 영토 민족주의에 대한 검토를 소홀히 하였던 점을 성찰하고 이를 소환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인식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일제가 강변했던 타율성론에 대한 검토로 귀결되었다. 타율성론은 우리 사회발전에 주체성과 독자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왜곡한 것이었고, 그것을 지정학적 주제로 표현한 것이 다름 아닌 ‘반도사관’이었다.
결국 필자의 문제의식은 자연스럽게 정체성론·타율성론의 또 다른 표현인 ‘반도사관’극복의 문제로 귀착되었다. 즉 한국의 영토는 역사적으로 현재와 같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반도에 국한되어 있으면서 대륙과 해양 사이에 끼어 있어서 그 자체 사회 발전의 동력이 제한되어 있는 만큼 불가피하게 대륙과 해양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는 주장을 논파하는 작업이었다. 이 작업을 통해 필자의 토지 연구가 국경 연구는 자연스럽게 접목되었다.

고려 국경에서 오늘을 묻는다

역사 발전의 올바른 방향을 더듬어 보고자 했던 순례길 끝에 당도했던 연구 대상은 바로 고려였다. 고려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필자는 진영모순의 해소와 냉전체제의 해체에 따른 평화체제로의 이행이 갖는 의미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묻고 있었다. 필자가 역사연구를 통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우리 민족의 평화와 통일이었다. 평화와 통일은 우리 사회의 정치경제적 지형의 변화는 물론, 생활공간이 대륙과 해양으로 확대되는 지정학적 인식의 변화를 의미했다.
이런 물음은 기존의 ‘영토’내부의 사회경제사적 분석을 통해서는 대답을 얻을 수 없었다. 기존의 토지 연구는 부와 권력을 중심으로 특정 역사 시기의 보편적 구조를 해명하는 데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에 대한 해명이 추상적이고 관념적이어서 실천적 함의를 얻기가 어려웠다. 또한 기존의 국경 연구는 국가의 주요 구성 요소로서의 영토에 대한 정보는 제공했지만, 국가 구성 주체들의 삶의 구체적인 부문을 유기적이고 총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 오히려 이 같은 국경 연구는 정서적으로 국수주의를 불러일으키는 비합리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필자는 영토와 생활공간을 연결시켜주는 실천적 함의를 가진 끈이 바로 ‘국경’이라는 판단에 이르렀다. 비로소 국경을 역사적으로 재조명하는 작업이 필요해졌다. 영역 침탈을 본령으로 하는 냉전체제를 해소하고 새롭게 시작되는 평화시대를 규정하는 특이성은 다름 아닌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끈이라는 인식에 이르렀다.
이처럼 정치경제학과 지정학의 접점인 ‘경계’를 모색하는 도정에서 필자는 고려서북경(高麗西北境), 압록강(鴨?江) 등의 위치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 지점에 이르기까지는 한국 사회의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을 담고 있는 일본제국주의 정치경제학을 극복하기 위해 시작한 고려토지제도 연구라는 오랜 우회로를 거쳐 와야 했었다.
그렇다면 현 시점에서 왜 하필 고려의 국경이 중심적 문제로 대두하게 되는 것일까? 국경에 관한한 그 영역의 광활함에 주목한다면 고조선도 있고 고구려·발해도 있을 텐데, 굳이 고려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현재 우리 헌법은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헌법 제 3조)고 규정하고 있다.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규정의 역사적 연원은 일제가 강요했던 간도협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일제는 개향에 이어,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을 거치며 우리 영토를 반도화시켜 나갔고, 또 이를 기반으로 한반도를 정치경제적 식민지로 만들어 갔다.
그러나 반도사관의 연원을 따져 묻게 되면 우리는 결국 고려의 역사에 당도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 영토의 서북국경이 한반도의 압록강(鴨綠江)으로 한정된 역사적 연원이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서부터 비롯했기 때문이다.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이 엄밀한 사료비판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지정학을 정당화하기 위한 근거로 오용되었고, 그것이 현재까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져 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같은 사실(‘반도사관’이『고려사』를 오용한 것)은 일제 식민지사관을 극복·청산하는데 고려 국경 연구가 결정적 중요성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나아가 일본제국주의 지정학 비판이라는 맥락에서 고려 국경사 복원의 필요성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물론 이런 연구 주제의 진화 과정은 고려 영토를 실증적으로 밝히는 작업에만 그치지 않았다. 영토와 영토를 이어주는 경계인 국경의 의미를 실증적으로 뿐만 아니라 철학적으로 새롭게 규정하는 작업을 병행해야 했다. 그것은 단순히 과거 제국주의 시대의 경험처럼 침략을 바탕으로 하여 세계를 분할하고 영역을 확대하는 것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새로운 인식을 요구한다. 그것은 기존의 영역 중심의 영토관을 해체하고 평화를 바탕으로 분할된 세계를 재통합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 해체와 재통합의 과정에서 떠오른 것은 상호 교통하는 네트워크로서의 ‘경계’였다.

고려 국경의 쟁점들

처음에 필자는 정치경제학을 바탕으로 고려 토지와 그 제도였던 전시과 (田柴科) 연구에 집중했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토지와 생활공간을 연결시켜 토지연구의 실천적 함의를 찾기 위한 연구의 내적 동기에 따라 필자의 관심은 국경문제로 옮겨갔다.
국경에 대한 본격적 연구는 다소 우연한 계기에서 시작되었다. 필자가 지정학을 바탕으로 한 고려 국경사 연구에 몰입하게 된 것은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의 사업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에서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가 간행했던 『조선사』의 번역 및 정밀해제사업을 진행하고 있었고, 그 중에서 고려사 부분을 필자가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이 사업에 참여하면서 필자는 이른바 일제의 ‘반도사관’의 실체를 확인하였고, 그 근거가 되었던 『조선역사지리』의 관련 부분을 역주하게 되었다. 또 반도사관에 의해 『고려사』와의 연관성을 의도적으로 배제·분리했던 『요사(遼史)』를 비롯하여 중국 정사(正史), 중국과 한국의 관련 지리지(地理志), 문집, 금석문(金石文) 등 사료를 광범위하게 검토·비판하면서 이들을 유기적으로 종합하려 노력했다.
이 책은 이같은 과정을 거쳐 작성한 논문 5편으로 엮었다. 이와 함께 『조선역사지리』 중에서 고려서북경(高麗西北境) 관련 부문에 대한 비판적 역주를 부록으로 실었다. 이 책에 실린 5편의 논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논문은 은사 강진철 선생님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며 쓴 글이다.1 선생님이 연구에 집중했던 시기는 진영모순이 가장 심각하게 작동했던 시기, 즉 냉전 시기에 걸쳐 있었다. 이 논문은 냉전이 해체되어 가고 있는 현 시기의 변화된 역사관을 바탕으로 선생님께서 각 시기별로 진행했던 연구들을 추적하였다. 특히 선생님의 연구주제가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고려 대외관계사 연구에서 고려 토지제도사 연구로 바뀌게 되는 사정을 살펴보았다.
선생님의 고려 토지제도사 연구는 여러 성과와 함께 한계도 지니고 있지만, 그의 연구에서 일관되게 관철되고 있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바로 토지 소유의 ‘강제성’을 폭로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필자가 고려 토지제도 연구에 참여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런 문제의식을 이어받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고려 토지제도 연구가 불가피하게 고려 국경 연구로 전환되지 않을 수 없음을 강조하고자 했다. 고려 시대의 토지소유의 ‘강제성’을 폭로한다는 문제의식을 계승하고 확장하기 위해 사고의 근본적인 축을 ‘영역에서 경계로 이행’시키는 작업이 수반되어야 함을 설명하고자 했다.
이 같은 문제의식의 전환과 확장은 우리 시대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맞물려 있었다. 기존의 냉전체제는 끊임없는 전쟁을 통하여 세계를 분할하고 약탈적 영역을 확보해 간 영역국가였다. 이에 비해 새롭게 전개될 것으로 기대하는 평화 통일체제는 기존의 약탈적 영역을 해체하고 상호 교류의 끈으로서의 경계에 서서 네트워크를 확대해 가는 경계국가를 지향하고 있다. 이제 우리 역사학도 각 국가의 자주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상호 교류의 적절한 경계를 정하기 위한 역사적 전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필자의 고려 토지제도사 연구가 고려 국경사 연구로 전환, 확장되어야 하는 이유였다.

두 번째 논문은 정면으로 고려 국경 문제를 다루었다.2 국경은 국가권력이 미치는 영토를 구분하는 경계이다. 영토는 당시로서는 재부(財富)의 원천이었고, 그 재부를 분할하고 배분하는 방식이 토지제도였다. 이 두 번째 논문에서 필자는 이와 관련된 기록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였다.
이런 연구과정을 통해 필자가 확인한 것은 기존의 고려 국경이 지금까지 잘못 설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논문에서 가장 주목한 것은 고려 국경으로 표시되었던 북계(北界)의 봉강(封疆)이었다. 필자는 이와 관련된 기록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 이 지역이 고려 태조 왕건 시기부터 조선 태조 이성계 시기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요좌(遼左), 요동(遼東) 등으로 표현되었던 지역이었으며, 이는 요수(遼水), 요하(遼河)를 거점으로 요양(遼陽), 심양(瀋陽), 철령(鐵嶺), 개원(開原) 등에 걸쳐 있는 지역이라는 것을 밝혔다.

세 번째 논문에서는 고려의 서북 국경에는 국경선으로서의 압록강(鴨?江)과 후방방어선으로서의 압록강(鴨綠江)인 두 개의 압록강이 있음을 논증하였다.3 1084년 당시 동경(東京)·개원(開原)·황룡부(黃龍府)로 이어지는 압록강(鴨?江) 연안 요(遼) 수비병의 규모는 1부(府), 1주(州), 2성(城), 70보(堡), 8영(營) 모두 함쳐 정병(正兵) 2만 2천 명이었다. 『고려사(高麗史)』,『요사(遼史)』, 『금사(金史)』를 비교하여 논증한 결론에 따르면, 기존 후방방어선인 압록강(鴨綠江) 아래쪽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어 왔던 강동(江東) 6주(州), 북경관방(北境關防;천리장성(千里長城)), 서경(西京) 등이 모두 국경선 압록강(鴨綠江) 쪽에 위치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국경선 압록강(鴨?江)은 현 요하의 철령 부근 지류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국경선 압록강(鴨綠江)과 후방방어선 압록강(鴨綠江)이 서로 다른 강이라는 이 논증은 사료비판을 통해 얻게 된, 다툼의 여지조차 없는 결론이다. 이는 기존의 연구가 제국주의 지정학에 대항하는 문제의식은 고사하고 최소한 이른바 ‘지명고증학’에도 충실하지 못했다는 것을 폭로하고 있다. 하지만 이 논증이 발표된 이후에도 화석화한 역사학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학계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이 논증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면서도 뒷자리에서는 필사(筆寫) 과정에서 발생한 오기(誤記)라고 강변하고 있다.
압록강(鴨綠江) 고려 국경설은 1913년 조선역사지리에서 국경선 압록강 (鴨?江)과 후방방어선 압록강(鴨綠江)을 의도적으로 혼동함으로써 조작한 것이다. 이처럼 조작된 압록강(鴨綠江) 고려 국경설을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편찬 『신편조선사』에서 각주도 붙이지도 않은 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이 같은 오류를 밝히는데 특별히 방대한 작업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역사학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사료비판에 충실하기만 해도 충분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 작은 노력이 가져온 역사 해석의 변화는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고려는 우리 역사상 가장 자주적이면서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가 존재하는 역사적 실체이다. 이 연구를 이처럼 ‘혁명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고려의 경계, 즉 지정학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를 통해 복원하였기 때문이다.

네 번째 논문은 고려 서북경이 현 압록강(鴨綠江)이라는 주요한 근거가 되어 온 보주(保州)의 위치를 밝혀내고 있다. 4『고려사(高麗史)』, 『요사(遼史)』,『금사(金史)』 등의 기록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 보주는 원래 국경 압록강(鴨?江) 연안에 있는 도시였다는 것이 이 논문의 핵심 논증이다. 또 이 ‘보주가 요(遼)·금(金) 교대기에는 압록강(鴨綠江) 유역 의주(義州)로 개칭되었다’는 기록에 대해서는 ‘보주가 요(遼) 선의군절도사(宣義軍節度使)에서 고려 의주방어사(義州防禦使)로 그 소속이 바뀌었음’을 말하는 것임을 밝혀냈다. 즉 보주(保州)-압록강(鴨?江)은 국경선, 의주(義州)-압록강 (鴨綠江)은 후방방어선이었음을 논증한 것이다.
보주는 고려와 요·금의 국경에 위치하여 지속적 쟁탈의 대상이 되어 온 상징적인 지역이었다. 따라서 보주의 위치가 어디인가는 고려국경 연구사에서 핵심적인 쟁점 중 하나였다. 그것을 어디로 추정하는가는 단순히 지명고증학의 문제를 넘어 일본제국주의의 지정학인 반도사관의 허구를 폭로하는 작업과 직접 연관되어 있는 사안이다.
보주에 대한 기존의 잘못된 연구는 무엇보다 압록강(鴨綠江)과 압록강(鴨綠江)의 혼동에서 비롯되었다. 일제의 『조선역사지리』에서 엇나가기 시작한 이 같은 오류가 아직도 대한민국의 공식 입장인 국사편찬위원회『신편조선사』에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 이것을 바로 잡는 것은 고려의 국경이 압록강(鴨綠江)에서 요하(遼河)로 확대된다는 사실로 정정하는 것일 뿐 아니라 역사 해석에서 사료비판의 중요성 또한 환기시키는 일이다.

다섯 번째 논문은 고려 건국 과정에서 개경(開京)과 함께 국가 경영의 양 날개로 기능했던 서경(西京)의 원래 위치와 그 변화를 다루고 있다. 고려 서경(평양대도호부)은 원래 고려 태조 원년(918) 대도호부(大都護府) 시기부터 현 요양(遼陽) 근처의 국경 도시로 존재하였다. 그러다가 거란 1차 침입 후인 성종 14년(995) 평양대도호부를 서경유수관(西京留守官)으로 개칭하였고 목종 원년(998)에는 서경을 호경(鎬京)으로 개칭하였다. 이같은 명칭변화가 의미하는 바는 이즈음에 국경 도시 서경을 후방에서 지원하기 위하여 현재의 평양(平壤)에 후방방어 거점을 설치한 것과 관련됨을 논증하였다. 즉 북계(北界) 방어사(防禦使) 체계의 정비와 궤를 같이 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고려 초기 서경의 위치가 어디였던가는 한국사의 강역(疆域)을 결정하는 핵심적 쟁점이다. 서경의 위치에 따라 한국사의 강역을 한반도로 한정할 것인가, 아니면 대륙으로 확장할 것인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물론 기존의 연구에서는 현 한반도 내에 있는 평양이 바로 그곳이라는 주장이 대종을 이루어 오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과 달리, 이 논문에서는 여러 사료를 종합하여 서경은 현 요녕성 요양 부근이었으며, 거란 1차 침입 즈음하여 현 한반도 평양에 후방방어기지를 설치하고 호경이라고 하였을 것으로 추론하였다. 그 논거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990년 성종 서경행차 교서에서 서경을 요성(遼城)이라고 하고 이를 평양웅도(平壤雄都)라고 한 점,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한 김부식(金富軾)과 그 동생 김부의(金富儀)가 평양을 주몽(朱蒙)의 고국과 연결시키고 고구려의 원래 지역이 요산(遼山)을 경계로 하며 평양의 옛터는 압록(鴨綠)을 경계로 한다고 언급한 점, 또 그 형 김부일(金富佾)이 서경 용언궁(龍堰宮) 준공 기념 치사에서 호경(鎬京)으로의 천도와 선왕 능묘에의 제사를 위한 요양(遼陽) 지역으로의 행차 등을 언급한 점을 핵심적 논거로 제시하였다.
서경의 대륙 위치설에 대해 고려의 강역을 임의로 확대하려는 국수주의적 역사 해석이라는 비난이 일각에서 일고 있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 방법론은 역사학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사료비판과 종합이다. 오히려 문제는 지금의 역사학이 이 같은 기본마저 충실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역사학의 위기는 바로 이 같은 기본적 방법론의 결여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본적 방법론의 회복은 곧 제국주의 지정학에 대한 비판 및 극복과 맞닿아 있다. 나아가 결국에는 평화시대 경계국가 설정을 위한 정치경제학과 지정학의 복권, 결합이라는 맥락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마지막으로 부록에서는 『조선역사지리』에서 ‘반도사관’의 원형을 제시한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의 글을 비판적으로 역주하였다. 쓰다는 당시를 풍미했던 독일의 실증사학이란 근대적 역사학 방법을 동원하여 고려의 서북국경을 밝혀내려 시도했다. 『조선역사지리』에 실린 「고려 서북계의 개척」이란 글이 바로 그것인데, 여기서 쓰다가 고려 국경을 한반도에 한정한 것이었다. 쓰다는 당시 국경을 마주하고 있던 고려와 거란의 관련 기본 사료인 『요사 (遼史)』, 『고려사(高麗史)』,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의 자료들을 서로 비교?대조하거나 검증하지 않고, 각각 분리하여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석함으로써 이 같은 결론을 내놓았다.
쓰다의 이같은 작업은 우리 역사를 현재의 압록강(鴨綠江) 안으로 축소하려는 시도였고, 이 같은 반도사관은 불행하게도 현재까지 우리 역사학계의 정설로 자리 잡고 있다. 이 논문에서는 바로 이런 반도사관의 원형을 제공한 쓰다의 글을 번역하고 이에 대해 비판적 역주를 달았다. 비판적 역주를 통해 필자는 역사적 자료들을 다시 유기적으로 연결.종합하여 요동(遼東)까지 걸쳐 있었던 원래의 우리 역사적 강토를 복원하려 시도하였다.
일각에서는 이 논문에 대해서도 ‘광활한 만주벌판’을 꿈꾸는 국수주의라 왜곡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왜곡을 근원적으로 해명하기 위해 필자는 반도사관이 근거로 삼고 있는 고려서북경(高麗西北境)에 대한 쓰다의 논문을 특별히 중요하게 비판적 관점에서 번역.분석했다.
‘근원적 해명’의 핵심은 바로 역사학의 원칙을 다시 상기 시키는 것이다. ‘국수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비판에 앞서 필자는 ‘사료비판과 종합’이라는 역사학의 기본원칙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 일제는 ‘과학적 실증주의’를 표방하면서 제국주의 지정학을 합리화하기 위해 고려서북경을 현재의 압록강(鴨綠江) 안으로 우겨 넣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우리 역사학이 무려 1세기가 넘도록 이를 무비판적으로 답습했을 뿐만 아니라 사료를 제대로 번역, 소개조차 하지 않았던 점이다. 이것은 역사학계의 책임 방기 외에 어떤 이유로도 설명할 수 없다. 필자가 이 논문에 대한 비판적 역주를 덧붙인 이유도 바로 역사학의 기본원칙을 환기시키는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위기에 빠진 역사학’을 소생시키고자 하기 위함이다.

시대의 경계에 서서 ‘경계’를 생각한다

모든 삶과 인식에서 가장 기본이 경계를 인식하는 것이다. 하나의 실체를 규정하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도 다름 아닌 타자와의 차이와 동일성을 표시하고 있는 경계이다. 좀 과도하게 일반화해서 설명하자면 필자가 그간 연구해왔던 주제들을 살펴봐도 그렇다. ‘시대구분론’도 바로 시대 사이의 경계론이었고, 평생 찾아 헤맨 고려토지제도의 기본 원리인 ‘전정연립(田丁連立)’도 사전과 공전 사이의 경계에 대한 연구였다.
하나의 실체가 진정으로 주체가 되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도 다른 실체와의 경계 설정이다. 그러나 그 경계란 언제나 양면적이다. 경계는 타자와의 구별(차이)과 소통(관계)을 동시에 포함한다. 따라서 영역을 지키려는 경향과 영역 사이의 소통을 매개하는 경계 사이의 권력투쟁은 불가피한 일이다.
하나의 실체는 타자를 배제하고 대결을 강화하면서 자신의 주체성을 강화하려 한다. 마찬가지로 영역도 자신의 헤게모니를 강화하기 위해 진영 간의 대결을 더욱 강화하려는 모험을 감행하기도 한다. 불행하게도 이 같은 모험은 현실의 지배적 영역이 경계를 지속적으로 억압함으로써 경계의 기능을 상실하게 만든다. 진영 간의 대결로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 할수록 역설적으로 주체성 강화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제약하고 약화시키는 결과가 되기도 한다. 이 같은 모험은 자신의 주체성을 강화시켜주는 계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파괴하는 것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이 같은 대결에서 경계를 회복하려는 노력은 지식인들의 숙명이다. 일제 식민지와 분단을 거치면서 대부분 지식인들의 삶이 그러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진영 사이의 대결을 거부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경계의 의미를 회복하는 일에 도전하는 것은 무자비한 폭력을 견뎌야 했으며, 개인사적으로 엄청난 희생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필자도 머슴살이하며 어깨 너머로 배운 문자 덕에 1970년대 대학 문턱을 밟을 수 있었다. 가난과 멸시가 몸에 밴 친구들은 으레 경제원론과 상법·민법을 끼고 내일을 설계하는 데 매달렸고, 이렇게만 한다면 새파란 20대 초반 나이에 영감(令監)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그 해 11월, 청계천에서 들려온 어느 노동자의 죽음은 필자의 생각을 돌려놓기에 충분했다. 립시(Richard Lipsey)와 사무엘슨(Paul Samuelson)의 경제원론 대신에 돕(Maurice H. Dobb), 스위지(Paul M. Sweezy), 바란(Paul A. Baran)의 정치경제학이 학습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되었다. 체제 내에서 개혁해나갈 것인가, 아니면 외부에서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혁해갈 것인가 하는 실천적 선택을 강요받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대체적으로 체제 외부의 변혁을 지향하는 기류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통일·노동·현장 등과 같은 실천적 영역뿐만 아니라 지식사회도 체제 변혁적 전략과 이론을 생산하는 데 몰두했다.
그러나 필자는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못하고 오히려 중립지대에 곁눈질하는 일이 잦았다. 여전히 사무엘슨의 경제원론을 손에서 놓지 못했고, 돕, 스위지 류(類)의 정치경제학의 핵심 주제인 ‘역사’, ‘자본’등의 주제에서도 벗어나지 못했다. 또 장일순·함석헌 등과 같은 종교적 이상에 심취하기도 했고 화이트 헤드(Alfred North Whitehead)의 과학철학에 의탁하기도 했다. 현실사회주의의 해체를 바라보며 노동가치설, 유물론이 내포한 근대적 실천론에 대해 회의하면서 포스트모던이나 옥시덴탈리즘에 기웃거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재적 발전론,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라는 근대적 결정론의 신념은 여전히 오랫동안 나를 사로잡았다. 교조주의라는 말이 가끔씩 귓바퀴를 스쳐가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을 보는 눈은 좀체 열리지 않았고 오히려 기회주의에 대한 자책감만 더해 갔다. 한쪽에선 여전히 혁명을 꿈꾸는 선배가 노려보고 있었고, 다른 한 편에서는 변절한 권력자가 비웃고 있었다.
이런 경험이 어찌 비단 필자만의 경험이겠는가. 각 영역이 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냉전과 분단의 시대에 지식인의 삶이란 대부분 각 진영에 귀속되기보다 경계선상에 서 있기 십상이었다. 독일의 송두율 교수가 강조했던 것처럼 경계인은 이 시대 지식인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경계’는 전쟁을 바탕으로 구축된 각 진영이 지배하는 시대에 지식인들이 숙명적으로 겪어야 할 실존적 삶의 공간이었다. 각 진영이 지배하는 지난 시대에 좌-우, 내부-외부, 하층-상층 사이를 끊임없이 동요하면서 부끄러운 경계로 되돌아갔던 모습은 지식인 한두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거나 비난할 일이 아니었다.
오랜 냉전기간을 거치며 내재화한 진영모순이 해소?정리되는 데는 여전히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아직도 경계는 양 진영이 추구하고 있는 영역의 확대와 침략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경계가 새로운 인식과 실천의 터전이자 중심원리가 되기에는 여전히 많은 난관이 예상된다.
직관적으로만 보더라도 모든 존재의 인식과 실천이 경계에서 시작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경계가 분화하여 마치 그물의 끈과 코처럼 상호 연관 관계를 이루게 된다. 여기서 끈인 경계가 코인 영역을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코가 탄생하면 끈을 제약하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영역이 거꾸로 경계를 제약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경계가 영역보다 먼저 탄생한 존재임을 부정할 수 없다.
바야흐로 전쟁과 영역이 지배하던 시대로부터 평화와 경계가 작동하는 새로운 시대로 이행하고 있다. 새 시대는 지금까지 영역의 지배 속에서 위태롭던 경계가 선차성을 다시 회복하고, 네트워크 형성이라는 새로운 역사 인식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영역국가’로부터 ‘경계국가’로의 이행이다. 필자의 고려 국경사 연구가 이같은 큰 역사의 흐름에 기여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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