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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문학의 이해 > 한국문학론 > 한국비평론
· ISBN : 9791196054564
· 쪽수 : 296쪽
· 출판일 : 2023-09-27
책 소개
목차
머리말•4
1부 반짝이며 부서지는 햇살
반짝이며 부서지는 햇살•12
― 정완영의 『시암의 봄』
‘존재’와 ‘소속’ 사이의 갈등•17
― 김영석의 『거울 속 모래나라』
압도하며 다가오는 밤비 속의 심상•25
― 한영옥의 『다시 하얗게』
지모밀에 눈 내리던 날•34
― 진동규의 『곰아, 곰아』
‘시(詩)집’ 보내고, ‘시(媤)집’ 보내고•42
― 오탁번의 『시집보내다』
‘웃고’ 있는 ‘눈물의 이슬’•49
― 마종기의 『마흔두 개의 초록』
세월의 문턱에다 대고 불 지르고 싶은•56
― 이수익의 『침묵의 여울』
시, 아무도 돌보지 않는 고독에 바치는•62
― 천양희의 『새벽에 생각하다』
‘아련한’ 퉁소 소리와 ‘가파른’ 능선 길•69
― 최명길의 『아내』
감사하고 눈물겨운 ‘숲길’의 맑은 바람•76
― 허형만의 『만났다』
2부 황홀한 고수의 검광(劍光)
도저하고 거침없는 시•84
― 김수우의 『젯밥과 화분』
부세(浮世)에서 기다려지는 ‘밀애’•94
― 이성렬의 『밀애』
콩 넝쿨처럼 쑥쑥 푸르게 오르는 시•101
― 김영탁의 『냉장고 여자』
밝은 어조의 죽음, ‘나도 곧 갈 테니 꼭 거기서 만나’•114
― 유자효의 『꼭』
뻘 묻은 아낙네의 튼튼한 종아리•119
― 김종태의 『오각의 방』
황홀한 고수의 검광(劍光)•125
― 강영은의 『최초의 그늘』
냉철한 시선, 따뜻한 가슴•131
― 이상옥의 『그리운 외뿔』
정오가 되면 제 그림자를 바싹 끌어드리는 나무•140
― 구재기의 『휘어진 가지』
순수한 영혼이 그려낸 적막한 그러나 아름다운 풍경•146
― 이상원의 『내 그림자 밟지 마라』
‘도저히’ 따라잡기 힘든 높이와 깊이의 ‘도저함’•151
― 한성례의 『웃는 꽃』
소소한 기쁨에도 활짝 웃는 삶•157
― 동시영의 『비밀의 향기』
3부 아름다운 슬픔
섬돌 위에 보석처럼 빛나는 꽃•166
― 김은령의 『차경』
정당성과 확실성에 찬 뚜렷한 선•173
― 김원옥의 『바다의 비망록』
“저저바저저바젖어봐” 참새노래를 들을 줄 아는 귀한 귀•179
― 한소운의 『꿈꾸는 비단길』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분명히 드러내는 시•185
― 정경해의 『술항아리』
허공을 잡아 허공에 매다는 ‘황홀한 텅 빔’•191
― 신승철의 『기적 수업』
거침없이 달려가는 자전거, 기타 선율 타고•198
― 김승강의 『봄날의 라디오』
‘평범함’에서 ‘비범함’을 발굴하는 놀라운 혜안•204
― 전병석의 『천변 왕버들』
시조의 정형미학을 ‘간 맞게’ 펼쳐 보이는•210
― 김민성의 『간이 맞다』
면도날처럼 스쳐 지나가는 반성적 성찰•215
― 조승래의 『하오의 숲』
코스모스가 별을 터는 아침의 소박한 아름다움•220
― 민창홍의 『닭과 코스모스』
해거름에 걸리는 ‘물먹은 눈길’의 서정•226
― 문현미의 『깊고 푸른 섬』
석양녘엔 스스로 바다가 되는 오랜 조력(釣歷)•233
― 윤이산의 『물소리를 쬐다』
4부 통점에서 아프게 피어나는 꽃
비 뿌리는 야구장•242
― 김요아킴의 『왼손잡이 투수』
통점에서 아프게 피어나는 꽃•250
― 이희섭의 『스타카토』
살아 있으니 살아야 하는 오늘•256
― 최준의 『칸트의 산책로』
‘싸리’에 부여되는 새로운 의미와 가치•263
― 류인채의 『소리의 거처』
‘물의 가면’을 벗고 잠수하고 싶은 마음•269
― 윤인미의 『물의 가면』
삼각형 밑변의 존재 이유•276
― 김석인의 『범종처럼』
어찌하여 ‘수식’은 잊어야 하는가•283
― 이우디의 『수식은 잊어요』
곱지만 슬픈, 꽃상여 지나가는 ‘꽃길’과 눈 쌓인 ‘새벽길’•290
― 강흥수의 『새벽길』
저자소개
책속에서
1부 반짝이며 부서지는 햇살
반짝이며 부서지는 햇살
― 정완영의 『시암의 봄』
19세기 말 르네상스 이후 최초의 총체적인 미술혁신으로 기록되는 인상주의는 이후 모든 미술의 물꼬를 바꿔버리는 중요한 미술사조이다. 인상주의는 이상화된 인물, 균형 잡힌 구도 등 기존의 전통을 배제하고 빛과 색채를 통하여 ‘인상’ 즉 짧은 시간에 시각적 감각으로 포착된 사물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들은 색채가 사물의 본원적이고 지속적인 성질이 아니라 사물의 표면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요소, 즉 날씨와 대기, 빛의 반사작용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임을 알아챘다. 그 결과 작품들은 물결치는 화필과 짧은 붓의 터치로 물 위에 부서지며 반짝이는 햇살처럼 진동하는 에너지로 충만하다.
정완영 시인의 글을 읽으며 직감으로 다가오는 것이 바로 이런 그림을 보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그의 시는 자연을 재현하는 자연의 하부(下部)적 위치에서 벗어나 하나의 예술작품 자체로서의 독립적 존재를 추구한다. 이는 바로 신선한 붓의 터치와 다양한 물감의 물질성으로 넘실대는 빛을 표현하는 인상주의 회화와 비견된다.
내가 사는 艸艸詩庵은 감나무가 일곱 그루
여릿 녀릿 피는 속닢이 淸이 속눈물이라면
햇살은 공양미 삼백석, 지천으로 쏟아진다.
옷고름 풀어놓은 강물, 열두 대문 열고 선 산
세월은 뺑덕어미라 날 속이고 달아나고
심봉사 지팡이 더듬듯 더듬더듬 봄이 또 온다.
- 「시암의 봄」 전문
위의 시는 시집의 「서시」이자 표제 시이기도 하다. 그만큼 이 시집을 대표하는 시라고도 할 수 있다.
시인이 사는 ‘시암’에는 다른 나무도 아닌 ‘감나무’가 딱 ‘일곱 그루’가 있다. 대상을 감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추상어보다는 구체어를 찾아야 한다. 얼마나 많은 시인이 이를 간과하고 있었던가. ‘나무’보다는 ‘감나무’가, ‘몇 그루’보다는 ‘일곱 그루’가 선명하고 명징한 심상으로 육박해 들어와 우리는 쉽게 노시인과 함께 시암의 뜰에 서게 된다.
이제 우리는 시암에서 찬란한 봄빛의 잔치를 본다. ‘여릿 녀릿’ 돋아나오는 감나무의 연둣빛 새싹 위에 ‘햇살’은 ‘지천으로 쏟아진다.’ 그의 감각적인 붓의 터치는 새싹을 ‘속닢’으로, 그리고 ‘청의 속눈물’로 그려내며 물결친다.
시인이 보는 강물은 ‘옷고름 풀어놓’고 산은 ‘열두 대문 열고’ 서 있다. 뜰 안에서 보는 ‘빛 잔치’와 뜰 밖의 활짝 열린 대자연의 모습은 “천부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수사와 우주적 상상력”(시인 문태준)으로 천의무봉한 시인이 빚어낸 시암의 봄 풍경이다.
시인의 형안은 특정한 때와 장소에 따라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빛과 색의 조화를 정확히 포착한다. 『시암의 봄』에서 인상주의 화가 모네의 <양귀비 꽃밭>을 보는 것 같은 많은 시편이 산견된다.
주황만도 아닌 꽃이, 분홍만도 아닌 꽃이/ 우리들 사람들만 보라고도 안 핀 꽃이/ 하늘로 이어진 길목에 등불 내다 겁니다.
- 「능소화」 두 번째 수
우리 집 석류나무는 함부로는 꽃 안 피웠다/ 오뉴월 타작마당 새로 먹인 도리깨로/ 한바탕 땡볕을 튕겨야 불꽃처럼 터져났다.
- 「우리 집 석류나무는」 첫 번째 수
시인에게 능소화는 ‘하늘로 이어진 길목’에 내다 건 ‘등불’이다. 그의 석류꽃은 ‘한바탕 땡볕을 튕겨야 불꽃처럼 터져’나는 꽃이다. 그는 순간에 스쳐 가는 빛과 색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잡아내는 포수다.
다시 「시암의 봄」으로 돌아가자. 그는 이제 그가 인식하고 서경한 봄날의 시암 위에 자신의 정신세계 한 자락을 얹히려 한다. 즉 ‘그리기’가 아닌 자신의 의식을 독자에게 들려줘야 할 시의 ‘주제’라고도 할 수 있는 ‘말하기’ 차례가 된 것이다.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시인이 결코 감상에 기울 일은 없다. 그는 평심으로 객관적인 시야를 확보한다. 마디진 삶을 살았지만, 93세가 된 시인에게 세월은 빨리도 달아났다. ‘뺑덕어미’ 심봉사 속이듯. 그래도 천지조화는 더듬더듬 봄을 또 데리고 왔다. ‘심봉사 지팡이 더듬듯’.
덧없이 세월이 흐르고 그래서 덧없이 봄이 또 온다. 그는 자신의 신산했던 긴 삶에 대한 구체적인 소회는 가슴에 묻어둔다. 이 마지막 연은 평범한 듯 보이지만 독자들이 시인의 가슴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 잔잔한 물결의 속삭임을 듣게 한다.
시인은 「시암의 봄」에 주를 달고 “60년 동안 쓰고 지우고 했던 고심의 날의 흔적들을 낙엽처럼 긁어모아” “천지간에 분축(焚祝) 드리는 심정”이라고 심경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시작(詩作)이 ‘한 생을 마무리하는 작업’이 될 것이라고 서늘한 소회를 밝혀 후학들이 옷깃을 다시 여미게 하였다. 그러나 이런 말은 주석에 달았을 뿐 시편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남 말인 것처럼 ‘세월은’ ‘날 속이고 달아나고’ ‘더듬더듬 봄이 또 온다’고 시치미를 뗄 뿐이다.
참으로 뜻밖의 만남이었다. 지난 4월 하순, 산 벚이 계곡의 속살까지 깊이 파고들 무렵 필자는 안동의 문인들을 만나러 남행하고 있었다. 여유가 있던 남행길이어서 김천의 <백수문학관>에 들렸고. 아무런 사전 약속도 기별도 없었지만, 우리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노 시인이 달려왔다. 문단에 워낙 과문(寡聞)한 필자는 맑은 물이라는 ‘백수(白水)’가 김천의 천(泉)을 파자(破字)한 것임도, 그게 바로 노시인의 호라는 것도 몰랐다. 대화 중 시인은 놀라운 기억으로 그의 철학과 시학을 해박하게 설명하였고 가끔 재치 있는 농담으로 일행을 웃기는 일도 잊지 않았다.
‘청이 속눈물’이라는 시어는 지금도 내 가슴을 친다. 보통 사람이라면 ‘심청’을 썼을 텐데 왜 ‘맑을 청(淸)’ 외자로 시어를 골랐을까. 직관은 순간이지만 시를 다듬는 것은 오래 걸린다. 그는 ‘맑은 물’이라는 그의 호처럼 맑다. 현대사회에서 시조의 존재가치를 분명하게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정완영 시인의 이러한 ‘맑음’이 아닐까.
‘존재’와 ‘소속’ 사이의 갈등
― 김영석의 『거울 속 모래나라』
몬드리안(Piet Mondrian)이라는 네덜란드 화가가 있었다. 다른 사람처럼 그도 초기에는 자연적 사실주의 그림을 그렸다. 이후 아르 누보, 야수파 등의 영향을 수용하고 발전시키며 독자적인 조형성을 개척하였다. 어느 날 전시회에서 피카소와 브라크의 큐비즘 작품들을 보고 그는 새로운 경향을 경험했다기보다는 신의 계시를 받은 것처럼 충격에 휩싸였다. 그는 큐비즘의 조형성을 더 잘 터득하기 위해 파리로 간다. 그곳에서 화가는 이 양식을 독자적으로 해석해 낸 작품들을 발표하여 호평을 받는다. 브라크와 피카소에게 큐비즘은 조형적 탐구의 결론이었지만 몬드리안에게는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는 일종의 종교인 신지학(神智學, Theosophy)에 심취하였다.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수평과 수직이 직각으로 만나 영구적인 균형을 얻고 완전한 미를 이룬다는 그의 신조형주의 이론은 신지학이 그 밑바탕이었다. 그는 마침내 자연을 단순화하는 단계를 넘어 수평과 수직의 대비로 우주와 자연의 모든 법칙을 요약하였다.
김영석이라는 시인이 있다. 다른 유명 시인처럼 그는 문단의 최고 등용문인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이후 수년간 독자적인 문학수업을 하다 다시, 다른 신문의 신춘문예에 당선해 시단의 주목을 받는다. 이 작품은 당시 신춘문예의 장시 경향을 불식시키고 새롭게 선보인 단시 형식이었다. 그는 등단 23년 만에 첫 시집인 『썩지 않는 슬픔』을 출간한다. 이때부터 시인은 새로운 시 형식을 모색한다. 사물을 보이는 모습이 아닌 관념과 철학의 본질로 해석하는 ‘관상시(觀象詩)’라는 분야를 개척했고 또 1984년 발간된 『도(道)의 시학』을 통해 우리의 정서, 우리의 시각에서 시를 써야 한다는 문학이론을 이미 확립한 바 있다. 그는 마침내 올해 봄 시와 산문이 하나의 구조로 결합된 새로운 형식의 시를 묶은 『겨울 속 모래나라』를 세상에 밀어낸다. 몬드리안의 수직과 수평이 대립하는 것처럼 산문과 운문은 대립한다. 그에게 산문은 몬드리안의 수직이며 시는 수평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대립은 직각으로 만나 사각형을 만들고 영구적인 균형을 이루게 된다.
시인은 이 새로운 형식의 시를 편의상 ‘사설시(辭說詩)’라고 부른다고 말한다. 사설시라는 장르는 아직은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것도 아니며 사전이든 관련문학 서적 어느 곳에도 찾아 볼 수 없는, 시인이 스스로 만든 조어(造語)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중견 평론가이기도 한 시인은 ‘편의상’이라는 수식어를 앞에 달았다. 편의상이란 말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그 의미가 천양지판으로 다르다. 그러나 이미 언론들은 편의상이란 말은 본 기억도 없는 것처럼 사설시를 정의한다. 예로 한국일보 문학단신은 이 시집의 발간을 보도하며 “사설시는 시와 산문이 하나의 구조로 결합된 시를 뜻한다”고 명쾌하게 그 정의를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말 그대로 ‘신’과 ‘지혜’라는 말에서 유래한 ‘신지학’의 뿌리는 동양철학과 종교에 두고 있다. 그래서인지 몬드리안은 추상은 그 불멸의 사각형에 삼원색과 무채색만을 사용한다. 바로 목, 화, 토, 금, 수의 오행에 상응하는 청, 적, 황, 백, 흑이자 한국의 오방색이다. 그의 사각은 한국의 조각보와 놀랍게 닮아있다. 그의 회화에서 사각 면들이 그림의 배경인지 혹은 형태인지 알 수 없다. 그의 공간은 특별한 형태 때문에 부차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형태와 등가의 비중을 가진다. 공간이 형태가 되고 형태가 공간이 되는, 즉 공간과 형태가 같은 가치를 지니는 구성이다.
이것은 김영석 시인의 사설시에도 들어맞는다. 동양의 고전을 섭렵하고 또 그것을 번역하기도 했던 시인은 산문과 운문의 어느 한쪽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싶지 않다. 그는 이 두 가지가 한 작품에 공존하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좀 더 높은 수준의 새로운 시적 영역’을 기대하는 것이다. 사실 그가 번역했던 『삼국유사』에는 물론 동서양 옛 문헌들에는 운문과 산문이 구분되지 않고 공존하고 있다. 판소리에서도 사설은 창자(唱者)가 노래 사이사이에 엮어 넣는 이야기다. 이는 노랫말과 이야기가 한 작품에 공존하고 있다는 말이다.
시인은 산문으로 이야기한 후 “이러매 내가 노래한다.”라는 서술을 사용하며 운문으로 넘어가는 독특한 구성으로 두 가지를 결합하는 형식을 보이고 있다. 이런 장치는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같은 방식으로 산문과 운문 사이에 삽입했던 “이에 찬한다”[讚曰]는 서술과 흡사하다. 또한 불경의 첫머리에 한결같이 붙는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는 서술과도 연결된다. 이처럼 평론가기도 한 시인은 옛 문헌의 산·운문의 결합방식을 견인함으로써 사설시라는 새로운 형식에 그 논거를 제시하는 한편 설득력을 제고하고 있다.
시집에 수록된 12편의 작품들은 역사·신화·설화·개인사·철학적 우화 등이 주요 소재가 되고 있다. 특히 대부분 글에서 모든 현상이 생기소멸(生起消滅)하며 원인인 인(因)과 조건인 연(緣)이 상호 관계한다는 연기(緣起)설화적 사유가 짙게 깔렸다. 『삼국유사』에서 향가와 산문을 연결하는 ‘찬왈(讚曰)’ 또한 ‘연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12편의 작품 중 「매사니와 게사니」부터 「바람과 그늘」까지의 다섯 편은 사설의 길이도 길고 나름대로 이야기 구조로 되어 있다.
표제작 「거울 속의 모래나라」를 중심으로 읽어보자. 기승전결이 분명한 서사를 가진 이 시는 오히려 소설에 가깝다. 도입부에 한 마디 아포리즘까지 곁들여 있다. 막말로 소설은 사건에 대한 서술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의미의 보유체인 문장이 모여 하나의 ‘단위 사건’이 되고 이러한 단위 사건이 모여 이야기의 줄거리를 구성하게 되는데, 사건은 주인공이 부딪치는 상황과 그에 대한 주인공의 반응이 될 것이고 이 반응은 사유, 독백, 느낌, 대화, 등을 포함하게 될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이 「거울 속의 모래나라」에 들어 있다. 특별한 것은 이 작품-다른 네 작품도 마찬가지지만-의 서사가 매우 환상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환상적 특징은 상징성으로 자연히 연결된다.
이러한 환상과 상징성은 다의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앞으로 다양한 해석 시도가 이루어지겠지만 모든 접근을 가능하게 하면서도, 어떤 확실한 일의적인 해석은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이 작품이 될 것 같다.
우리는 내부세계를 의미하는 ‘존재’와, 외부세계를 의미하는 ‘소속’과의 두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두 세계는 언제나 화합 대신 갈등의 형태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거울 속의 모래나라」의 주인공 P는 바로 양쪽 세계를 상징하는 거울 밖과 거울 안에서 극단적인 갈등을 겪는, 그리고 상반된 두 방향에서 정신적 방황을 하다가 결국 좌절하고 마는 대학강사이다.
주인공은 거울 속에 들어가기 전 「언어와 인식의 형상으로서의 세계」라는 논문에 매달려 고심하고 있다. 갑자기 ‘수천 마리의 불개미가 뇌수를 파먹’는 두통을 느끼고 거울에 이마를 기댔는데 주인공은 거울 안의 세계로 들어가고 만다. 여기서 P라는 호칭과, 골 때리는 논문제목과 대학강사라는 직업은 우리가 보기에도 주인공이 세계의 ‘소속’에서 벗어나려 하는 당위성을 보여준다. 거울 안의 세계라고 그에게 안식을 주는 곳은 아니다. 그곳은 사람들이 「ㅂㅅㅅㅅㅅㅈㄹㄹㅊ」이라는 ‘자음들만 연결되는 듯한’ 해괴한 말을 쓰는 사람, 아니 ‘사람의 탈을 뒤집어쓴 ‘헛것’들이 사는 곳이다. 꽃, 풀, 산, 들 보이는 모든 것은 ‘모래의 신기루에 불과한 모래나라’였다.
그는 다시 세계소속의지를 보이며 복귀를 희망하지만 그것도 여의치 못하다. 소속의식의 가장 명시적인 현상은 살을 맞부딪치는 성애(性愛)다. 그러나 주인공에게는 여자 역시 순수세계를 배신하는 외부세계의 일원으로 쟁취할 수 없는 속성을 띠게 된다. 주인공이 거울 밖으로 내다본 아내는 ‘벌건 대낮에’ 주인공의 방에서 ‘생전 처음 보는 어떤 사내놈하고’ ‘땀으로 번들거리는 알몸뚱이’로 ‘엉겨 붙은 채 꿈틀대고’ 있다. ‘개 같은 연놈들은 아주 날을 받아 뿌리를 뽑기로 작정하였는지 지친 기색도 없이 질기게 그 짓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계의 소속에 있어 에로스는 가장 강렬한 본능적 표현이고 물론 그 대상은 여자다. 주인공은 모래나라에서 주인공과 같은 도시에서 서점을 경영하는 K라는 여자를 만난다. 곡절 끝에 거울을 등지고 몸을 던져 거울 밖으로 탈출한 주인공은 거울 속에서 헤어진 K라는 여자를 찾아본다. 놀랍게도 서점도 그녀도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몰라볼 뿐 아니라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주인공을 바라본다.
주인공은 세계탈출의지와 세계소속의지를 지향하는 이중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두 세계는 합일할 수 없는 것이고 이러한 인식은 출구 부재의 환경으로 작품의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구원에 대한 방법도 대안도 없는 주인공은 ‘존재’와 ‘소속’ 사이의 미로에서 방황하다 끝내 좌절하고 만다. 작가는 미문으로 주인공의 좌절을 가슴 아프게 쓴다.
그럼 이 여자와 거울 속의 여자 중에 어느 하나가 <그 여자>라는 말인가 … 그의 풀죽은 말들은 자음과 모음이 제각각 뿔뿔이 흩어진 채 부실부실 모래알처럼 떨어져 내렸다. … 그의 눈에서 일순 잔물결의 불씨처럼 눈물이 반짝였다.
위에서 인용한 문장처럼 작품의 내용은 비현실적이며 몽환적이지만 그 내용을 묘사하는 작가의 문장은 유려하지만 예리하고 정확하다. 이는 우리의 의식에 아직 자리 잡지 않은 미래의 현실에 대한 리얼리티라고 할 수 있다. ‘예술은 때로 고장 난 시계처럼 현실보다 앞서 간다’하지 않는가. 카프카나 최상규의 소설을 읽는 것 같은 김영석의 이런 독특한 초사실에 대한 사실주의는 미래의, 혹은 사차원의 리얼리즘이라 칭해야 적절할 것 같다. 작가의 문장이 얼마나 차가운 객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논리적으로 정치한지 이 작품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철학적 관념의 표출을 보자. 주인공의 독백으로 나타나는 거울 안에서의 사유다.
애초에 거울이 없었다면 나는 <나>를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었으리라.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따라서 거울 속의 <나>를 보기 전에 나는 <나>를 알 수가 없을뿐더러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가 있은 다음에 <거울 속의 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거울 속의 나>가 먼저 있고 나서야 그것을 바라보는 <나>가 파생한다. 달리 말하면 거울이 <나>를 생산하기 때문에 거울은 언제나 <나>에 선행하고 <거울 속의 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나>에 언제나 선행한다.
… 거울을 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거울이 없거나 그것을 보지 않는다면 선후의 논리가 발생하지 않고 선후의 논리가 없으면 <나>는 파생하지 않는다. 일단 거울을 통해서 <거울 속의 나>로부터 내가 파생되고 나면 <거울 속의 나>는 실상에 가까운 것이 되고 파생된 <나>는 가상에 가까운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거울을 보지 않는다면 거울은 논리적 허구의 가상에 가까운 것으로 전락하고 <거울 속의 나>로부터 파생되기 이전의 <나>는 오히려 존재의 실상에 가까운 것이 되어 버린다. 이렇게 되면 존재와 부재의 주고받음처럼 실상 즉 가상이고 가상 즉 실상이라는 모순과 역설이 만들어 질 수밖에 없다.
‘실상이 가상’이고 ‘가상이 실상’이라는 역설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사유가 냉정한 논리로 전개되고 있다. 그의 엄정한 글은 20세기 최고의 추상화가인 몬드리안의 사각형 회화를 보는 것 같다. 수직과 수평의 직각으로 이루어진 불멸의 사각형은 또한 사각의 평면일 뿐이기도 하다. 그의 초사실에 대한 사실주의 글쓰기는 주인공 P뿐 아니라 독자에게도 출구 부재의 환경을 만든다. 초사실의 돌발은 계속 다음 장을 넘기게 하지만 상황의 해명은 없다. 처음부터 다시 독서해보지만 의문의 순환 고리는 계속된다. ‘나’와 ‘거울 속의 나’처럼. 그러나 결국 ‘실상이 가상’이고 ‘가상이 실상’이라는 작가의 역설에 동의한다. 작가는 나를 존재와 소속의 두 세계 사이에서 맴돌게 하고 있다. ‘중심에 접근하지 못하는 원운동’의 반복이다.
지금 김영석 시인의 시평을 쓰고 있는 것인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