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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96798710
· 쪽수 : 284쪽
책 소개
목차
Ⅰ. 체크인
호텔이 무너진다
드림초콜릿 오시는 길
도박중독자 박사장
불면증 환자 나주임
닫아도 안 닫히는 문
지배인의 교수법
너의 달란트를 사장에게 알리지 말라
민주경찰 민경위
사람이 있었다
Ⅱ. 이제는 잘 자요
502호 키 주세요
영업정지보다 무서운
살인자들의 도시
나는 미치지 않았어
야 이 병심들아
없었던 것들
카이사르의 것
남쪽바람개비은하
민실장의 가정법
군포화력발전소
엄마가 산다
Ⅲ. 체크아웃
늙은 백조는 과로사한다
드림초콜릿은 호텔이다
아버지 죽이기
나주임의 비밀수첩
세 사람의 일은 세 사람만 알겠지
된장계란볶음파쌈
내일은 내일의 캐셔가 온다
리뷰
책속에서
혹시 개방병동에 있던 박사장 아저씨 기억하시나요? 네, 호텔 운영한다는 그 도박중독자 아저씨 말이에요. 아저씨네 호텔에서 캐셔를 구한다길래 〈먼데이서울〉 관둔 다음 날부터 거기로 출근했어요. 저도 안다고요, 정신병자들끼리 연애하다간 어떤 재앙이 벌어지는지. 병원 있을 때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어요. 그런데 그 아저씨 애인 있어요. 돈은 많이 안 줘요. 뭐, 캐셔로 일해서 큰돈 벌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지만. ‘아는 운동권’이 악독한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는데 ‘아는 도박중독자’ 사업주도 만만치 않더라고요. 24시간 교대로 일하고 새벽에 세 시간쯤 자는데요, 옛 동지들이 계산기 두들겨보더니 최저임금 위반 사업장이라고 난립니다. 빨갱이들이 하는 말이니 아마 맞을 거예요. 늘 그렇듯, 아는 사람을 조심해야 합니다. 며칠 전에는 저를 사무실로 따로 부르더니 청소 노동자들이 저의 ‘다나까체’에 당황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다나까체 아시죠? 합니다, 합니까, 이런 군대식 존대법 말이에요. 그러면서 ‘가족 같은 분위기’를 깨지 말아달래요. 그래서 아부지 같은 분들한테 딸처럼 살갑게 청소를 시키라는, 별 개같은 미션이 하나 더 추가됐습니다. 가족이라니. 넌 니 가족들도 최저임금 안 주고 부려먹냐 묻고 싶었지만, 차 키도 제대로 못 받는 무능한 노동자가 할 말이 아니라서 그냥 삼켰죠.
부주의한 불륜남들이 중년의 로맨스에 종지부를 찍고 빤스 바람으로 집에서 쫓겨나는 주된 이유 중 하나가 카드 영수증이나 내역서 때문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내연녀와 뜨거운 불장난을 즐기고 돌아온 남자가 소파에 널브러져 있다. TV를 켜놓고 자울자울 졸다가, 문득 바지 주머니 안에 뭔가 이물질이 부스럭거리는 것을 감지한다. 주차 티켓인가. 주유소 영수증이겠지. 그는 TV에 눈길을 고정한 채 종이 조각을 꺼내 꼬깃꼬깃 접었다가, 손가락 끝으로 이리저리 공굴려도 보았다가, 이내 소파 뒤로 퉁? 튕긴다. 그게 무슨 코딱지인 양. 불행하게도 그것은 코딱지가 아니므로, 며칠 뒤 그의 아내는 청소기를 돌리다가 누가 봐도 구겨진 호텔 영수증같이 생긴 종이 쪼가리를 주워서 펴본다. ‘아라비안모텔’이라는 상호명이 선명하게 찍힌. 그것도 대낮에 삼만 원이 결제돼서 출장 숙박료라고 발뺌하기도 어려운. 모텔 대실 영수증을. 남자는 좌우 싸대기를 연타로 맞고 석 달을 집에 못 들어간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각서를 한 장 쓴 뒤에야 그는 귀가를 윤허받는데 그의 자리는 더 이상 가장이 아니다. 불가촉천민이다. 얄궂은 것은 한국의 슬픈 현실인데, 똑같은 상황에서 성별이 바뀌면 곧장 가정법원행이거나 최악의 경우 칼부림이 난다.
리재는 나 때문에 죽은 게 맞아요.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았을 때 돌아갈 수 있는 단 하나의 언덕, 그게 나였기 때문에 리재는 죽은 것이지요.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 하나밖에 남지 않았을 때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그 아이를 벼랑 끝으로 내몬 것은 나예요. 그리고 내가 리재를 죽이고, 내 배로 낳은 내 아이가 죽었는데, 내가 죽어버리는 건요. 너무 쉬워요. 너무 쉽고, 가볍죠.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게 리재를 위하는 길이 맞아요. 당신들은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면 리재를 잊을 거예요. 그건 자연스러운 겁니다. 죄스러워하지 말아요. 하지만 나는 그 아이를 기억해야지요. 기억하고 슬퍼할 사람이 한 명쯤은 있어야 리재가 덜 가엾지 않겠어요. 그래서 난 그냥 살기로 했어요. 명이 씨는 명이 씨 몫의 삶을 살아요. 리재의 몫 따윈 신경쓰지 말아요. 자기 몫의 삶을 제대로 사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다하다 저엉 안 되면, 그냥 대충 살아요. 그러면 또 어떤가요. 나는 이제야 그걸 깨달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