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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96855116
· 쪽수 : 112쪽
· 출판일 : 2020-11-16
책 소개
목차
저자의 말
투명 속의 모순(2019년 상반기)
필름 소보루/자전의 수동성/통증/콘돔/詩,發/디비노럼/거꾸로 쓰는 편지/독주회/해피 버쓰데이 투/인터뷰/0에서 359까지 걸었다 나는 이제 차라리 댄스/정물화/불금/Queen of diamonds/상수에 왔으나 제비다방 문을 열지 못하고/0/1/(ab)생트/360/
섬광은 빛이 아니었으므로(2019년 하반기)
여의도 블루스/상실/블루/검은 모래/버드가드/박테리아 리칭/순천향병원 입구/나는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너무 많은 것을 듣는다 거울의 얼룩을 닦으며 생각한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 나는 늘 벽의 안 쪽에서 귀를 틀어막고 웅크린 채 투명 속에 놓여있다 얼룩이 잘 닦이지 않는다 이제는 희미해진 내 오른팔 흉 걸린 기억들이 썩은 핏물이 되어 거울 위를 흘러 다닌다 벽 너머로 구급차가 지나간다 입안으로 흥건하게 고이는 혐오를 삼킨다 왜 나는 아직도 살아있나 한 발짝 물러서서 멀쩡한 눈과 귀를 감춘다 잘 닦이지 않던 얼룩 위로 푸른 바다가 번진다/워프/섬광/좌표들
텅 빈 극장 속의 커튼콜
월담/1+3.3Log1/환
저자소개
책속에서
거리 위에서 빵을 씹다가 어른이 됐다.
빵은 고독만큼 썼고 고독처럼 곧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씹으면 씹을수록 빵의 원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뜨겁게 부풀어 오르기 전, 무구하고 투명한 날들의 밀가루 반죽을 생각하면 슬픔과는 무관한 눈물이 고였다. 자꾸만 곳곳에 달라붙으며 내 음성을 끈적이게 만들던 것들. 하루 종일 발버둥 치던 기호와 구강 속에 갇힌 진동들. 목이 막혔다.
절대적인 규칙과 법칙이 점령한 도시. 이곳에서는 스스로를 증명한 것만이 제 둥지를 튼다. 쏟아지는 권력들 사이에서 익명의 틈입 하나로 빵은 부풀어야 했다. 체스말을 움직이듯, 단 한 번의 가벼운 손짓만이 있었을 뿐이다.
가끔은 내 손에 붙들린 넋들이 부르르 떨기도 했다. 그때마다 베이킹소다가 빨래에 쓰이기 시작했다는, 어느 슬픈 역사를 떠올렸다. 수차례 뭉개지고 부활하는 수명주기의 패턴을. 설 곳을 찾지 못해 부채꼴의 무덤 앞으로 등 떠밀린 그 내력들을.
빵봉지에 묻은 설탕은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았고
부스럭거리는 이불을 덮고 눕는 밤이면
오후 내 반짝이던 가루들과 함께 무언가가 하염없이 내 속에서 들끓고 있었다
---「필름 소보루」중에서
당신 눈꺼풀의 외벽 그 무너지는 해변 속에 내가 있다
밀려오는 슬픔도 없이 썰물이 지는 섬. 우리는 우리가 닿지 못한 평평한 미래를 향해 걸었다. 한참을 걷다 보면 뒤따라온 모래들의 중력으로 발걸음이 무거워지기도 했다. 바짓단과 함께 간밤의 꿈들을 풀어주는 것으로 우리는 과거와 이별하는 법을 배웠다. 그때만큼은 너의 그림자 너머로 식어가던 노을마저 환한 미래가 되어 손에 곧 닿을 듯했다.
아무리 걸어도 우리는 좀처럼 말이 없었다. 방파제의 쓸쓸함으로 주저앉아 흐느끼던 너의 어깨를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우리였기 때문에 결코 마주 볼 수 없던 반대의 얼굴이 있다. 둘 중 누구 하나 마른 입술 사이의 쉬운 고백들을 열어보지 못했으므로.
당신이 내 세상의 종교이던 때 나는 너무 맹목적인 신앙이었다. 바닷가에 우두커니 한 줄기 구원을 기다리는 어느 이교도의 미련함. 내 심장을 만지던 하얀 손등 대신 철썩이는 파도 앞에 뺨을 번갈아 기대봐도, 뉘우치지 못한 마음들은 여전히 아득한 바닷속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물먹은 심장에서 네가 마를 때까지 달리고
달렸다 입안에선 짠맛이 돌았다.
말라붙은 해조류의 몸짓으로, 또는 우울의 주검으로, 그러니까 내가 한 줄의 문장으로 너의 입술에 매달리던 때마저도 우리는 쉽게 포개질 수 없는 다른 시간 속을 지나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 나는 안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어차피 너는 이 세상에 있지도 않은 애인이고, 나는 그저 고쳐 쓰는 일기 같은 것. 훔쳐 온 미래와 반송된 과거들로 더러워진, 이를테면 결코 마주 볼 수 없는 사면四面 방파제의 외로움 같은 것.
나의 현재는 당신보다 먼저 살기 위해 쓰여지는 편지다. 네가 살아있는 한 나는 죽어서도 깃들지 못할 넋들의 비유. 흐르는 시간 속으로 나를 띄우는 당신의 어린 손을 본다. 바다가 멎는다. 흐르지 않는 미래 속에 당신은 이제 없다
---「Queen of diamonds」중에서
누나 나는 내가 작년 겨울에 죽을 줄 알았어 거꾸로 들린 고개를 벽장에 여러 번 처박고 가족의 얼굴도 잊은 채 나 이제 그만 죽어도 되지 않을까 수십 번 고민하고 겁에 질린 패잔병의 몸짓으로 안절부절못하다가 신경안정제 항우울제 감정 조절제 뭐 기타 등등 이름도 외우기 힘든 약들 한꺼번에 일곱 알을 불 꺼진 입속으로 털어 넣고 먹은 것도 없이 잿더미로 수북한 검게 그을린 위장을 달고 다시 울분의 힘으로 시를 쓰던 내가 이제는 약 없이도 잠에 들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아침마다 출근을 해 웃기다 그치 내가 살았던 오늘 하루는 눈 딱 감고 죽지 못했던 작년의 그 두려운 마음과 또는 모종의 망설임이 만든 거겠지 아님 제대로 된 시 한 편 쓰지 못했다는 갈 데까지 간 어느 시인들을 향한 동경이었는지도 모르지 아무렴 어때 살아있으면 됐지 그래도 가끔은 죽고 싶은 맘도 더러 드는 거지 새벽마다 목 조르던 그 빌어먹을 자생적 우울과는 무관하게 차라리 위악이나 실컷 떨어볼 걸 그랬나 봐 어디서 위애僞哀 라는 질 좋은 발음 하나 구해와서는
오늘도 나는 너무 많은 곳에 지문을 남겼다 피아노 건반 위를 흐르던 연습실과 박정대 시집을 펼쳐보던 6호선 개찰구 너머에도 내 무덤을 세우고 말았어 내가 머물렀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곳들이 손쉽게 장지葬地로 굽어지고 있었으니 나는 이제 어디서든 죽을 수 있겠지 누나 누나는 나 죽이고 싶지 않아? 때가 오면 같이 죽자고 해놓고 난 아직 안 죽었잖아 그래도 누나는 나보다 어른이었으니까 잘 알겠지 누나도 결국 무수한 나의 이름들 그 중 하나였다는 거 더 이상 사랑하지도 그립지도 않은 누나가 오로지 한 줄의 문장으로 소비되기 위해 내 흉 걸린 손목 속에 영원으로 살고 있다는 거 이해하지 죽어서도 뜬 눈일 수밖에 없다는 거 단지 나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0/1」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