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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97137884
· 쪽수 : 212쪽
책 소개
목차
수사연구 기자의 이상한 하루_박생강
귀향_백이원
삼색 고양이를 따라가면_김경희
긴 코와 미스김라일락 강병융
구름기期_김학찬
최애의 후배_김의경
두 겹의 웃음_전석순
안부_정진영
저자소개
책속에서
〈수사연구 기자의 이상한 하루〉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양수연 편집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사연구》의 오랜 전통은 취재가 끝나면 편집장에게 전화를 걸어 당일 취재 사건에 대해 보고하는 것이다. 수사팀의 팀장에게 보고하는 식으로. 그 사건의 흥미로운 점이라거나, 그 사건이 몰고 올 사회적 파장 같은 것들. 특별한 게 없을 때면 그 경찰서 주변의 밥집 정보 같은 거라도 보고했다.
“박기자님, 취재는 잘 마무리하셨어요?”
양수연 편집장님의 목소리는 약간 쉬어 있었다.
“잘 끝났습니다. 파출소 탐방이라 특별한 사건에 대한 이슈는 없었고요. 이곳에서 관리하는 항구 주변을 오가는 배가 워낙 많아서 선박사고나 이런 것들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라네요. 또 여름부터 갈치낚시 축제가 있어서…….”
그때 나는 근대문화 거리를 따라 구 일본영사관, 현재는 근대역사관 건물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제법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나무숲에 둘러싸인 그 붉은 건물이 있었다. 사진으로 찍으면 판타지 속의 마법학교처럼 보일 것도 같았다. 실제로 드라마 〈호텔 델루나〉의 배경지로 유명해진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전화통화를 하면서 내가 계단에 발을 내딛는 사이 뱃고동보다 낮고 어딘가 목이 쉰 울음 같은 것이 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이내 그 소리는 사라졌다. 다만 내내 맑았던 하늘이 어느새 검은 구름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귀향〉
여자가 제주에 있다 다시 양동으로 나왔을 때 그 애는 정명여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느냐고 여자가 묻자 그 애는 조금 망설이다가 배운 것을 제대로 쓸 수만 있다면 뭐든…… 좋겠다고 우물거렸다. 이번엔 그 애가 물었다. 무엇을 하겠느냐고. 여자는 나도 그 비슷한 것이라고 답했다. 그 비슷한 것. 배운 것을 제대로 쓸 수 있는 일. 제주의 혹독한 바다에서 배웠던 것들,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호흡하던 것. 그것을 반드시 써먹고야 말겠다는 비릿하고 지독한 의지가 여자에게는 있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애를 본 일도, 양동에 머물렀던 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는 극단에 들어갔고, 막간 무대에서 노래하다가 오사카의 음반회사 사람에게 발탁되었다. 그 기회를 잡아 오사카로 넘어간 여자는 정식 가수로 음반을 취입했다. 데뷔는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여자의 비음 섞인 목소리와 호흡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창법은 뭇사람들의 귀를 단박에 사로잡았다. 그리고 이어 낸 음반으로 여자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 막간 가수에서 조선 최고의 디바가 되기까지 크고 작은 부침이 없었냐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양동에서 겪은 가난과 제주에서 했던 물질에 비하면 지금의 일들이야 까짓것,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당차고 당돌한 구석이 있는 여자의 성격과는 별개로 사람들이 열광한 것은 애달픈 정서를 속절없이 일으키는 그녀의 목소리였다. 울음을 우는 듯한 바이브레이션과 맑고 가는 목소리의 조화가 그랬다. 여자의 노래에서만 느낄 수 있는 서글픈 파형의 울림이 식민지 조선의 비애를 타고 팔도를 유랑했다.
〈삼색 고양이를 따라가면〉
중국집 주인장이 불쑥 말을 걸었다. 나는 그만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눈에 보이고 손이 닿으며 입 안에 고이는 침까지, 모든 것이 가짜라는 생각이 들자 머리까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서둘러 중국집을 나섰다. 문밖에서 가게를 힐끗 돌아보았다. 어느새 손님들로 가득 찬 내부는 꽤나 분주해 보였다. 그 순간 창가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중깐 두 그릇을 놓고 마주 앉은 중년의 아버지와 어린 딸의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입을 꾹 다문 채 오로지 먹기만 했다. 조명 때문인지 아버지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을 훔쳐내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고는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중년의 남자치고는 순진무구한 눈빛이었다. 나도 그를 따라서 어색하게 웃었다. 수미야, 가볍게 살아. 그제야 허공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내리치기 시작했다. 비를 피하려 중국집 간판 아래 서 있는데 사라진 삼색 고양이가 어디선가 훌쩍 나타났다. 고양이는 입을 크게 벌리고 가짜 하품을 했다. 이 순간이 어색하거나 지루한 거겠지. 나는 천천히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돌연 하품을 멈춘 고양이가 낮은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냐- 냐- 간헐적인, 그러나 규칙적인 울음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