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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97682025
· 쪽수 : 168쪽
· 출판일 : 2022-10-31
책 소개
목차
시인의 말
이바위산의 멧돼지들
구강 다리에서
거울을 보며
산불
시가 꿈꾸는 세상
거문도
알콜 중독
이발을 하면서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
인천국제공항에서
산막초등학교 제4회 동창회
도청
양키 고 홈
낙엽이 휘날릴 때
들깨 타작
종합인력
천마령을 넘어서
담배
복날
따뜻한 겨울
폐농
울엄니
우수 경칩 지나
겨울 같지도 않은 겨울이
벌초
반성
제부도
백구
노근리, 그해 여름
산불감시원 2
드론
쌍둥이
어머니의 남자
봄바람 꽃샘바람
고향
밤꽃 피는 유월에
꽃피는 5월
길 위에서
정상 부근
메추리집
아리랑치기
빙어 낚시
5월의 신부
붉은 악마
베트남 여자
꽃호박
자본의 굴레 3
자본의 굴레 4
헌화
겨울 교단
둔치에서
남녘의 편지
지하 수기
어느 돌멩이의 외침
겨울제
토고의 꿈
대장장이의 노래
미아리의 밤
미아리의 밤 2
친구의 죽음
파도의 시
해설
시간을 견디는 질박한 진정성‧송은숙(시인)
저자소개
책속에서
시가 꿈꾸는 세상
언젠가,
그리 멀지 않은 어느 화창한 봄날
우리는 아침 일찍 관광버스를 타고
2박 3일쯤 백두산으로 여행을 떠날 것이다
관광버스는 노래방 기계 뽕짝을 틀어 놓고
얼씨구, 지화자 좋다
버스가 흔들리도록 어깨춤을 추면서
아침부터 몇 병이고 소주병을 깔 것이다
판문점 지나 평양 가서
평양냉면이나 온면으로 점심 식사를 하고
휴대폰으로 기념사진도 찍을 것이다
관광버스는 북녘 땅을 달리고 달려 저녁 무렵
백두산 자락 어느 호텔에 도착할 것이다
더러는 감격에 겨워 평양 소주를 마시고
더러는 내일의 일정을 위해
설레는 잠을 청할 것이다
아직 눈도 채 녹지 않은
혹은 봄 햇살 가득한 백두산 자락
원시림의 맑은 공기와 풀꽃들의 향기에 취해
흰나비 팔랑거리며 초원 위를 날고
야생화 지천으로 피어 새들이 노래하는 민족의 영산
백두산의 봄은 장엄할 것이다
맑고 깊푸른 천지에 올라
우리는 감격의 눈물을 흘릴 것이다
하루 이틀 가지고는 턱없이 부족한 백두산 관광
어깨를 서로 부둥켜안고 단체 사진을 찍으며 우리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목놓아 부를 것이다
통일을 가로막는 미국과 일본은 물러가라
군사 강대국 중국과 러시아도 물러가라
어울렁더울렁 우리 민족끼리 하나 되어
우리는 또다시 관광버스를 흔들어 댈 것이다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을 것이다
도청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이제 와 고백하건데
춥고 외롭고 고통스러웠던
27년의 세월
나는 그 자식을 죽이고 싶었다
욕하고 약올리고 잠 못들게 하는
27년 전 그 자식의 출현에
나는 조금씩 미쳐갔다
귓속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 자식의 목소리가 가는 곳마다 따라왔다
내가 시골로 가면 시골로 따라오고
내가 서울로 가면 서울까지 따라왔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고
사람이 이상해졌다고
그들은 나를 신경정신과로 보냈다
나의 병명은 분열정동장애였다
우울증, 자살위험, 피해망상, 조현병 등등
신경안정제, 수면유도제, 아티반을 먹으며
나는 그 치욕의 순간들을 견뎌야 했다.
그 자식의 도청이란 건
단순히 내게서 무얼 알아내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나를 무너뜨리고 그것을 즐기려는
일종의 스토킹이었다
한번 도청에 걸리면 벗어나지 못하고
죽어야 한다고 협박도 했다
썩을 놈의 자식,
내가 그의 정체를 알았을 때
나는 아연실색했다
무슨 수사기관의 도청이 아니었다
단지 심부름센터 같은 허접쓰레기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시골 앞집 자식이었다
잠에서 깨어날 때부터
약을 먹고 다시 잠이 들 때까지
단지 증거가 없다는 이유 하나로
하루 24시간,
안 그래도 힘든 세상에
찰거머리처럼 신경을 건드리고 괴롭히는
별 이상한 놈
실은 그놈이 정신병자였다
아무도 믿지 않고
믿어 주지도 않는
오히려 내가 미친 놈 취급을 받아야 했던
춥고 외롭고 고통스러웠던
27년의 세월
문제는 전파무기 마인드컨트롤이었다
휴대폰처럼 도청기(통신교환기)로 뇌에 전파를 쏘면
인간의 뇌는 좋은 안테나가 될 수 있다는
뇌 해킹까지 가능하다는 어이없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정신병자로 살아온 27년의 세월
그 고통의 댓가로 1년에 1억씩
27억의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 했더니
이제는 그 자식이 나를 죽이겠다고 한다
나도 그 자식을 죽이고 싶다
그래 마지막으로, 외나무다리에서 만나
맞짱을 떠보자
서부의 쌍권총잡이들처럼
천마령을 넘어서
하는 일 없이 무덥고 머리 아픈 날이면
우리는 4륜구동을 타고
천마산 고갯길 천마령을 넘는다
구비구비 천마산 산림도로를 따라
산막리 내천마동에서 고갯길을 넘으면
산세도 울울창창한 용화면 조동리
옛날엔 배가 고파 닭서리 가던 길
시인 권구현의 구천동 숯장수가
영동 장으로 숯 팔러 가던 길
아니, 여기는 9백 고지가 넘는
백두대간 능선으로 이어지는 빨치산 루트
역사의 맥이 뛰며 살아 숨쉬는 곳
천마산 능선에는
지금도 인민군들이 활동하던
빨치산 동굴이 있고
천마령 너머엔 계곡을 따라
민주지산 자연휴양림이 있고
막걸리에 손두부를 파는 가겟집도 있다
저무는 햇살 바라보며 툇마루에 앉아
손두부 안주에 막걸리를 마시면
아, 오길 잘했다 정말 참 잘했다
저절로 힐링이 되는 천마산 고갯길
우리는 오늘도 4륜구동을 타고
굽이굽이 산림도로를 따라 천마령을 넘는다
폐농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저 편찮으시기 시작하면서
농사일을 하나씩 접었습니다
감자, 고구마, 고추, 배추
어느 것 하나
어머니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나 같은 건달 농사꾼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어머니가 지으시는 농사일을
곁에서 거드는 정도밖에 안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몸져누우시고 부터는
혼자서 농사일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어머니가
밭에 한 번 가보자 하셨습니다
들깨라도 심어야 할 텐데
듬성듬성 감나무가 심겨진 웅골 밭은
개망초꽃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메밀꽃 필 무렵의 메밀밭처럼
별빛으로 피어 있는 하얀 개망초꽃
우거진 풀밭에는 발 디딜 틈조차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개망초꽃 풀밭을 헤치며
밭을 한 바퀴 둘러보셨습니다
멀고 먼 은하수를 건너
멀어져 가는 별처럼
어머니는 불러도 대답이 없으셨습니다
평생을 바쳐서 일구던 그 밭뙈기들이
밤하늘의 별빛처럼 눈물겨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