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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97727375
· 쪽수 : 224쪽
· 출판일 : 2024-01-12
책 소개
목차
결
파위나 모드
나우
잠자리가 지나간 길
동선의 추억
바람이 다시 불 때
해설/ 음표로 그린 풍경의 사회화 <문학평론가 김선주>
작가의 말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우리가 슬픈 건 우리가 슬플 때 그 슬픔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진숙화가 쿠리하라와 정말 친구 사이였고, 쿠리하라가 그녀에게 이 곡을 준 후 세상을 떠난 게 사실이었다 할지라도, 그녀가 노래를 녹음하던 당시 이미 쿠리하라는 세상을 떠난 지 몇 달이 지났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 진숙화는 친구의 죽음을 생각하며 더없이 서글픈 심정으로 노래를 불렀겠지만, 노래를 부르다 설사가 나서 자주 화장실에서 끙끙거리며 냄새가 나는 물똥을 쌌을지도 모른다. 혹은 당시 불화가 있던 어떤 사람들에게 전화를 해서 쌍욕을 하며 싸웠을 수도 있고, 노래를 부르느라 종일 끼니를 불렀다면 녹음 작업을 마친 후 매니저가 사온 완탕면을 후루룩 짭짭 하며 맛있게 먹었을 수도 있다. 심지어 같이 작업을 한 사람들과 경박하게 웃으며 잠시 장난을 치거나 허전해서 만두를 몇 개 더 집어먹었을 지도. 그리고 한숨을 한 번 쉰 후, 다시 슬퍼했을 것이다.
―〈결〉 중에서
저녁에, 내가 나릴란 하고 부르면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내 코를 쥐어 잡고 흔들었다. 탁한 비음 속에서 그녀의 이름은 장난스럽게 들리곤 했다. 그녀를 나릴란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그녀의 가까운 사람들 중에서 나밖에 없었다. 나는 솜이라고 불렀고, 자주 나릴란이라고 불렀다. 그러면 내게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었다. 밤에, 그녀는 자장가를 불러달라고 말했다. 나는 클레멘타인과 해바라기의 노래를 불러주었다. 저음으로, 모든 노래를 단조로운 리듬과 거의 구별이 가지 않는 음정으로. 그녀는 클레멘타인이란 노래를 몰랐다. 그래서 나는 후렴구의 클레멘타인을 꼭 나릴란이라고 바꿔서 불렀다. 그러면 음정이 본래의 곡에서 더 멀어지곤 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음치란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나는 어느 노래도 정확하게 부르지 못했으므로, 내가 그녀에게 불러주는 음들은 사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노래였다. 까닦에 나는 그녀가 모르는 노래들만을 부를 수 있었다. 긴장한 목소리로 어제 부른 음과 오늘 부른 음이 정확히 일치하도록 노력하는 동안 그녀는 편하게 고개를 기대고 듣는다. 다 틀린 음정의 노래를, 그녀를 그런 노래라고 생각하며 듣는다.
―〈나우〉 중에서
내가 음치란 사실을 알고도, 그녀는 내가 부르는 장국영 노래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들어준 사람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꼭 장국영 노래를 불러 주리라 생각해 왔으므로, 밤이면 나는 그녀의 방으로 건너가 이불 속에서 손목을 꼭 쥔 채로 천장을 올려다보며 바람이 다시 불 때를 불러주곤 했었다. 사실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노래를, 분명 장국영의 몸에서 흘러 나와 내 몸으로 흘러들어 왔지만 입술에서 머뭇거리다 몸 안을 떠돌기만 하는 소리를, 지난 20여 년간 장국영이 내게 들려주었으나 세상에 결코 존재하지 않는 음정과 박자로, 나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들을 불러주었다. 사람은 언제나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에 다름 아니므로, 나를 그녀에게 보여주기 위해선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내가 살아온 삶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기엔 너무 많은 것을 기억해야 했고, 너무 많은 순간들을 구구절절이 설명해야 했으므로 나는 그녀에게 장국영 노래를 불러주거나, 그녀와 함께 비디오 방에서 장국영 콘서트를 보곤 했다. 분위기란 말은 지구를 감싸고 있는 공기란 뜻이다. 내 몸에서 가닥가닥 흘러나오는 음(音)들에, 장국영의 콘서트를 볼 때 나와 장국영 사이에 구름처럼 떠 있던 공기들에, 내가 지나온 모든 시간들이 농밀히 스며들어 있을 것이기에. 그토록 자주 그의 노래가 내 삶의 불어왔으므로.
―〈바람이 다시 불 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