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자의 오두막 (이준성 소설집)
이준성 | 시간낭비
14,400원 | 20240115 | 9791198009128
죽음에 관한 발칙한 상상의 나래,
삶의 가치를 되새김질하는
현대의 바니타스 정물화
바니타스 정물화라는 것이 있다. 17세기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지역에서 유행한 장르인데, 삶의 덧없음을 상징하는 해골, 촛불, 꽃 등을 그리는 것이 특징이다. 거대한 도시 번화가의 장식과 광고판, 그리고 거기서 웃고 떠들며 먹고 마시는 사람들, TV와 인터넷에 넘쳐나는 때깔 좋은 풍경과 인물들, 여기저기서 들리는 삶과 사랑의 찬가, 생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격려, 번영하는 문명에 대한 찬사, 신기술에 대한 열광, 모든 게 잘될 거라는 전문가의 밝은 말씀, 행복을 위한 조언, 그림자라고는 있을 리 없이 항상 웃는 마스코트나 캐릭터의 얼굴, 이런 음흉한 것들 사이에서 메탈은 현대의 바니타스 정물화이다 (‘메탈’에서)
〈복수자의 오두막〉은 현직 변호사인 작가가 초단편 소설〈줌 아웃〉에 이어 두 번째로 낸 책이다. ‘죽음’을 주제로 한 단편소설 10편을 묶어낸 것으로, 저자는 소설의 형식을 빌려 현대적 바니타스 정물화를 그려냈다.
바니타스 정물화는 죽음에 대해 직접 경고하는 해골과 당장은 아름다워 보일지라도 덧없이 사라질 운명인 촛불, 꽃, 모래시계 등을 함께 배치해 그림을 바라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인생은 결국 소멸함을 상기시킨다. 또한 바니타스 정물화에는 사치품 등 화려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물건들도 함께 그려지고는 하는데, 결국 이것들은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것들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잡혀서 도망칠 수 없는 그 여자와 절대 놓아주지 않는 아버지는 온몸에 불이 붙은 채 같이 쓰러졌다. 아들은 소화기를 집어 들지 않았다. 두 사람의 눈이 불에 휩싸여서 자기를 보며 어떤 비밀을 말해 주려는 듯이 감기지 않는 것을 그대로 보고 있다가 뒤로 돌아서 들어왔던 문을 열고 나가 다시 계단을 통해 뛰어 내려갔다. 요란한 비상벨이 울리고 있었고, 로비로 나오니 방에서 튀어나온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직원들의 유도로 밖으로 대피하고 있었다. 벌써 소방차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아들은 그 와중에 화재보험계약에 대해 생각했다. 어쩔 수 없이 그 여자는 아버지와 함께 갔지만, 이제 호텔은 온전히 자기 것이었다. (‘복수자의 오두막’ 중)
이 무도한 자는 지금 자신의 업적과 위대함에 도취하여 있지만, 여러 나라를 침략해 정복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죽였던 그도 나중에 누군가에게 복수를 당해 비참하게 죽게 됐는지 어땠는지는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복수자의 오두막’ 중)
마치 옛이야기를 읊어주듯 풀어낸 소설 속에서, 평생을 복수에 바친 아버지는 그 복수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복수를 행하다 그만 죽어버렸다. 죽음 이후는 없다. 수많은 사람을 죽여서 부와 명예, 권력을 쟁취한 왕도 그 업적과는 상관없이 언젠가는 죽는다. 현실에서 누리는 사치와 부귀영화는 한순간일 뿐, 인간은 반드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을 생각하며 유한성을 깨닫고 지금, 이 순간의 가치를 다시금 되새기자고 말하는 듯하다.
나는 기름통 뚜껑을 열고 그 아수라장과 주변 바닥에 기름을 뿌렸다. 나는 내 고양이들의 이름을 고함쳐 부르며 이제 그만하고 떨어지라고 했다. 소용없었다. 푸른은 버스 밖에서 울어 댔다. 쥐들에 뒤덮인 양지와 무지개는 그 아래서 움직이지 않았다. 까마귀는 여전히 큰 쥐의 목을 물고 있었지만, 곧 떨어질 것처럼 보였다. 왜 쥐 한 마리 가지고 저렇게까지 싸우는지, 그 이유는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실수했다. 고양이들은 집에 두고 나 혼자 와야 했다. 세 고양이를 구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나는 토치를 켜서 불을 붙였다. 그 순간 이미 죽은 샛별과 또 지금 죽었거나 죽어가는 까마귀, 양지, 무지개를 위한 복수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그 난리를 끝내고 싶었다. 나는 쥐와 고양이가 엉켜 하나의 기괴한 생명체처럼 보이는 그 무더기에 불이 번지는 것을 확인하고 밖으로 나왔다. (‘고양이’ 에서)
주인공은 죽은 고양이의 복수를 하기 위해 나머지 네 고양이들과 함께 거대한 쥐를 잡으러 가지만 도리어 나머지 고양이들조차 죽음으로 잃어버린다. 집으로 돌아온 주인공에게는 과연 어떤 결말이 주어질까.
일상적 소재와 엮인 ‘죽음’
인간이라는 보편성을 획득하게 해 주는 속성
한편 저자는 전작 〈줌 아웃〉에서 이미 일상에서 떠오른 소재들을 흥미로운 이야기로 엮어낸 바 있다. 기존의 17세기 바니타스 정물화에 등장하는 소재들인 꽃, 초, 장신구 등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복수자의 오두막〉 작품 속 다양한 소재들은 우리의 삶과 근접해 있어 역시 일상적인 느낌을 준다. 작가는 삶의 반대 속성에 해당하는‘죽음’을 익숙함으로 풀어간다.
나는 수십 년 전에나 걸맞을 것 같은 훈계를 늘어놓는 아버지보다 개별성이 사라지고 죽음을 앞둔 인간이라는 보편성을 획득해 병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가 마음에 들었다. 뒤늦게 그를 나와 같은 하나의 인간으로 사랑하기에 이를 정도였다. 그가 죽고 나니 더욱 그랬다. 관 속의 아버지에게는 살아 있을 때와 다른 위엄과 매력이 있었다. 나는 그 옆에서 평온했다. (‘이’에서)
부모 없이 태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기에, 부모는 만인의 보편적 속성이다. 그리고 자식에게 삶을 주는 부모는 인간의 보편적 속성인 죽음 역시 포괄한다. 저자는 소설을 통해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주제를 독자들에게 계속해서 던진다.
영민은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에도 또 하루 늦게 찾아왔다. 만나면 하고 싶은 이야기, 물어보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는데, 이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됐고, 아무것도 모르게 됐다. 선영도 영민이 병원에서, 미국에서, 딱 하루 늦게 그녀를 찾아갔던 일을 알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걸 알았더라면, 선영은 영민을 찾아 연락하고 다시 만나려고 했을까? 그렇게 해서 다시 만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녀는 아프지 않게 됐을까? (‘하루’에서)
주인공은 단 하루 차이로 갈망하던 연인을 영원히 잃어버린다. ‘하루’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지는 시간이지만 활용하는 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소설 속 주인공에게 ‘하루’는 곧 죽음과 맞닿은 시간이다. 사랑했던 연인과 영원히 헤어지게 되는 하루다.
죽음은
알 수 없는 세계로 가는 것
스위스의 정신의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칼 구스타브 융은 “죽음의 저편에서 일어나는 일은 말할 수 없이 위대해서 우리의 상상이나 감정이 제대로 파악하기조차 어렵다”고 밝혔으며“죽음은 사라지는 게 아닌 알 수 없는 세계로 가는 것”이란 유언을 남겼다.
전쟁과 감옥으로 대치된 ‘죽음’에 다녀온 주인공들의 입을 빌려, 작가는‘죽음’ 은우리가 종착점으로 생각해야 할 개념이 아니라고 도리어 화두를 던진다.
살아서 돌아온 노인 전우들은 수시로 모여 밥도 먹고 술도 마셨다. 모두 자신이 전쟁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야말로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우리가 아닌가! 하면서 호기도 부렸다. 그러다가 나는 전쟁 끝나기 직전 크리스마스 때가 생각났고 또 그리웠다. 여봐 들, 크리스마스 때 어울렸던 옆 나라 노인들을 찾아가 볼 생각 없어? 그 사람 중 누군가 주소, 이메일, 전화번호 가지고 있는 사람 있지? 국경도 다시 열리고 교류도 다시 한다는데, 할 일도 없는 마당에 해외여행 삼아 가 보면 어때? 그것도 괜찮겠네. 갈 사람? 그중 몇 명이 같이 가 보자고 손을 들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서점에 들러 옆 나라에 대한 여행가이드 책(이런 책도 있었구나!)을 사 와서 돋보기를 끼고 그걸 열심히 들여다보며 여행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가 보고 싶은 곳도 많았고 먹어보고 싶은 것도 많았다. 그때 만났던 사람들 얼굴도 생각났다. 나는 책을 덮고 돋보기를 빼고 잠깐 울었다. (‘노인 전쟁’ 중)
죽음을 앞둔 채 등 떠밀려 전쟁에 나갔던 노인들은 죽음을 바로 옆에서 겪은 뒤 사회로 돌아와 삶에 대한 의욕을 고취한다. 새로운 경험과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며 죽음 직전까지 인생을 사는 것, 그것이 저자가 내린 해답일까.
감옥에서 보낸 10년의 세월은 내게 무엇이었을까? 들어갈 때의 나와 나왔을 때의 나는 매우 다르다고 느껴졌다. 그 안에서 끝도 없이 이어지는 기억과 생각과 상상에 잠겨 지내는 나, 그러면서 천천히 변화해 가는 나를 떠올려 보았다. 내가 감옥에서 나와 다시 들어온 이 세상은 내가 감옥에서 생각하고 상상했던 바깥세상보다 평이했다. 다시 들어가지 않을 감옥 안 세상이 이제는 바깥세상, 아니 높은 벽으로 막힌 저 너머의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이제 이 바깥세상을 직접 살아가야 하는 나는, 내가 갇혀 있었고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그곳이 생각난다. (‘감옥’ 중)
감옥은 사회적 죽음이다. 사람들이 ‘언젠가는 죽겠지’ 하고 인식하는 것처럼 주인공은 ‘언젠가는 감옥에 갈 것’을 인식하고 그에 대비한다. 죽음(감옥)을 겪은 뒤 화자는 생(바깥)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을지.
“아무도 안 죽어서 다행”
죽음의 허망함보다 이 생을 살아가는 것
아름다운 색색까지 꽃들을 꿈꾸는
나도 그때 죽고 싶었어. 진짜로 죽으려고도 했어. 창문을 열고 창틀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본 것도 여러 번이었어. 그런데, 왜 안 그랬는지 알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래, 내가 받은 편지 때문이었어. 우리 엄마 죽기 직전에 누가 손으로 쓴 세 장짜리 편지를 봉투에 넣어서 우리 집 우편함에 넣고 갔거든. 거기에 자기가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내가 얼마나 소중하고 대단한지, 절절하게 써 놓았더라. 끝에 이름을 써 놓았는데,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어. 그 편지를 보고 힘을 얻었어. 나를 이렇게 소중히 생각하고 높이 평가하고 또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었구나. 그래서, 다시 열심히 잘살아 보기로 했어. (‘밥 한끼’ 에서)
“우리는 애초에 한 사람이었으니 두 사람이 됐어도 서로 잘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우리 이 집에서 같이 살아.”
“나무와 화초에 물도 잘 주면서 말이지.”
“나도 새 이름을 하나 지어줘.”
“너는 그냥 그대로 ‘박준성’이지.”
아무도 안 죽어서 다행이었다. 은경은 나무와 화초에는 꽃들이 필지, 핀다면 어떤 꽃들이 필지 궁금했다. 은경은 각기 다른 예쁜 색깔의 아름다운 꽃들을 꿈꾸었다.
(‘아무도 안 죽는 일곱 머리 이야기’ 중)
작가는 소설집의 마지막 이야기에서 ‘아무도 안 죽어서 다행’ 이라고 말한다. 결국 죽음의 허망함이 아니라 생을 붙잡고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며, 그래서 ‘아무도 안 죽어서 다행’ 이므로 피고 또 질 아름다운 꽃들을 꿈꾼다.
독자들도 소설 〈복수자의 오두막〉을 읽으며 한 번쯤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면 어떨까. 진중하거나 둔중한 단어들로 점철된 어려운 심리학 서적이 아니라, 저자의 풍부한 상상력이 덧칠해진 한 폭의 바리타스 정물화를 감상하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