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의 밥상 (동쪽의 바다와 사람에 관한 이야기)
엄경선 | 온다프레스
16,200원 | 20250905 | 9791198964076
소중한 자연 산물을 하나둘 잃어가는 실종의 시대,
동해바다 뭇 생명들이 다시 살아나기를 기다리며
기나긴 폭염 아래서 동해 바다를 보고 있노라면 바닷속은 안녕한지 궁금해진다. 새벽 항구에 가보면 5년 전까지만 해도 제법 잡히던 오징어와 도루묵, 도치가 이제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중한 자연 산물을 하나둘 잃어가는 실종의 시대”라는 작가의 말이 실감난다.
『동쪽의 밥상』은 속초 출신의 작가 엄경선이 가깝게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부터 멀게는 조선시대 허균의 음식평론집까지 망라하여 영동 지역의 음식 문화를 소개하는 에세이집이다. 지리로 따지면 좁게는 속초, 고성, 양양의 음식 문화를, 넓게는 멀리 함경도 해안에서부터 경북 영덕의 해안까지의 그것을 아우른다.
2020년 초판 출간에 이어 5년 만에 개정판을 내놓는다. 강원도의 별미인 동치미 막국수, 장칼국수 등을 추가한 것이 특장점이다. 또한 초판 발행 후의 동쪽 음식 문화에 생긴 변화를 반영하고, 옛 문헌들 내용도 바로잡았다. 책의 전반을 살펴 여러 오류와 실수를 잡아낸 터라, 이제는 가히 ‘영동 지역의 음식비평서’로서는 첫 손에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자부할 수 있겠다.
작가의 추억 속 음식들은 꽤 낯설다. 이를테면 “마땅한 군것질거리나 간식거리가 없던 시절에는 이 도루묵 알이 훌륭한 간식”이었다는 말은 단지 현 20, 30대뿐 아니라 영동 지역에 연고가 없는 중장년 세대에게도 생소하게 들린다. 이 책이 소개하는 서른 가지 식재료, 음식은 어떨까. 순채, 갯방풍, 식해(식혜가 아님 주의), 털게, 섭죽, 도치, 양미리, 도루묵… 이 이름을 쭉 나열하면서 ‘혹시 이것들 먹어봤어요?’라고 물어보면 ‘처음 들어보았다’는 답이 돌아오곤 한다. 동쪽의 산맥이 이렇게도 높았나 싶다.
2017년 서울-양양 간 고속도로가 열리면서 수도권 시민들이 영동 지역을 자주 찾게 되었고 그 뒤로 어느 정도 이곳의 음식문화가 알려진 편이다. 다만 ‘도시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몇 가지 음식 위주로 소개되다 보니, 관광객들의 손에는 고작 닭강정 정도가 들려 있을 뿐이다. 작가 엄경선은 작가 본인이 어린 시절 맛보았고 이제는 자취를 감췄거나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토산품에서부터, 과거에는 귀했으나 이제는 도리어 흔해진 것들까지 두루 그 사연을 살펴본다.
가자미, 멸치, 양미리, 도루묵, 대구, 명태, 임연수, 오징어 등 영동 지역의 주요 먹거리는 생선이다. 그렇다고 단지 생선만이 이 지역에서 사랑받았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이제는 희귀식물이 되어버렸지만 순채, 갯방풍은 예로부터 보통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식재료이자 약재였다. 조선시대 명문장가 허균은 그 향기가 사흘 동안 가시지 않는다며 갯방풍의 맛을 상찬했다. 임금 진상품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지금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양양 낙산의 배, 지금은 모두 사라져버린 소금버덩(소금가마)의 사연들은 이곳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는지를 알려주는 기록들로 값어치가 있다.
명태, 정어리처럼 한때 동해안의 최대 어획량의 주인공들이었던 생선들이 이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 사연들은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명태는 이를 부르는 호칭만 백여 가지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서민 음식으로 각광받아왔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어획량이 급격히 줄더니 이제는 여러 명태 살리기 프로젝트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근래 들어서는 오징어 어획이 크게 줄어든 것 또한 이슈다.
“기후 변화로 한 종의 물고기가 사라지면, 그것과 관련된 산업과 문화도 함께 사라진다. 명태, 도루묵을 비롯한 한류성 어종들이 사라지는 건, 북방에서 전해온 바다음식 맛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수십 년 동안 남북이 분단으로 나뉘었어도 바다 물길은 막힘없이 흘러왔는데, 그나마 바다음식을 통해 공유해온 남북의 음식 문화는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까. 그 변화의 와중에 『동쪽의 밥상』이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이 책의 서문 중)
이 책은 이 같은 다양한 영동 지역의 향토음식을 매개로, 오랫동안 쌓여온 이곳 사람들의 삶과 음식 문화를 다뤘다. 작가 엄경선은 멀리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옛 문헌 속에 나오는 이야기를 연구하고, 어린 시절 자신의 추억을 되새겨보기도 했다. 어떤 날은 배를 타고 험한 바다로 나가는 친구 이야기를 듣고 왔고, 또 어떤 날에는 매일 새벽같이 나가 시장에서 생선을 파는 지인의 이야기를 청취했다. 이 책이 삶의 문화로서 지역음식을 이해하고 맛보고자 하는 이들에게 조금의 생각거리라도 얹어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