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그늘 (사피엔스는 정말 진보했는가?)
정광일 | 퍼플
12,800원 | 20251027 | 9788924178784
《진보의 신화를 의심하다》 — 문명의 거대한 착각에 대한 인문학적 고발
돌도끼에서 인공지능까지, 인류는 ‘진보’라는 이름 아래 쉼 없이 달려왔다. 더 빠르고, 더 크고, 더 효율적인 세계를 만들어온 끝에 우리는 문명의 정점에 도달했다. 그러나 문명의 속도는 인간의 내면을 남겨두고 홀로 질주했다. 이 책은 그 끝에서 묻는다. 과연 인간은 진보했는가, 아니면 단지 더 정교하게 변형되었을 뿐인가?
《진보의 신화를 의심하다》는 인류 문명을 빛과 그림자 모두의 시선에서 다시 읽는다. 불을 다스리며 문명을 시작한 인간이 어떻게 그 불에 스스로를 태워왔는지, 풍요를 꿈꾼 농업혁명이 어떻게 질병과 전쟁을 낳았는지, 그리고 신이 사라진 자리에 시스템과 자본이 어떻게 새로운 신으로 자리 잡았는지를 드러낸다. 이 책은 기술·자본·종교·국가가 만들어온 거대한 ‘진보의 서사’를 해체하며, 인간이 잃어버린 감정과 관계, 의미의 복원을 모색한다.
저자는 한 시대의 문명을 바라보는 것이 곧 인간 자신을 성찰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18세기의 증기기관에서 21세기의 인공지능까지 이어지는 문명사의 궤적 속에서, 인간은 편리함과 효율의 유혹에 취해 자신을 기계로 만들었다. 노동은 생존의 수단에서 정체성의 굴레가 되었고, SNS는 자아의 분열을 가속화했다. 감정은 상품이 되었으며, 인간은 자본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데이터 단위로 환원시켰다. 진보의 언어가 세상을 지배하는 동안, 인간의 언어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문명의 몰락을 예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속에서 인간이 다시 태어날 가능성을 보여준다. “인공지능 이후의 인간”이라는 장에서 저자는 인간이 기술의 경쟁자가 아니라, 그 경계를 넘어설 존재임을 말한다. 인간이 진정으로 회복해야 할 것은 능력이 아니라 의식이며, 진보의 다음 단계는 기술이 아닌 ‘성숙’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후반부의 ‘새로운 인간, 새로운 문명’은 속도보다 깊이를, 효율보다 공존을 선택하는 철학을 제시한다. 느림과 결핍의 미학, 기술을 넘어선 의식의 진화, 그리고 진보의 방향을 다시 묻는 마지막 질문은 독자를 근본적인 사유의 자리로 이끈다. 인간이 만든 모든 진보의 지표가 허상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진짜 문명의 시작은 오히려 ‘멈춤’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진보의 신화를 의심하다》는 철학, 역사, 과학, 사회를 넘나드는 문명 비평서이자 인간에 대한 회복의 선언이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가 인간의 역사를 거대한 서사로 그려냈다면, 이 책은 그 서사의 뒤편에서 침묵한 인간의 내면을 조명한다.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가 문명의 원인을 탐구했다면, 이 책은 문명의 결과를 묻는다.
“진보는 인간을 구원하지 않는다. 인간이 진보를 이해할 때만 문명은 성숙한다.”
이 한 문장은 책 전체를 관통하는 선언이자, 우리 시대가 다시 돌아봐야 할 인간의 자화상이다. 기술의 시대를 사는 독자에게 이 책은 묻는다 — 당신이 믿는 ‘진보’는 누구의 언어인가? 그리고 그 길의 끝에, 인간은 여전히 인간으로 남아 있는가?
이 책은 문명의 화려한 겉모습 아래 감춰진 인간의 진실을 마주하게 한다.
《진보의 신화를 의심하다》는 우리가 잊은 가장 오래된 질문을 되살린다.
“진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정말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