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트 킹덤 (15세기 후반에서 현재까지 러시아의 민족 만들기와 제국을 향한 탐색)
세르히 플로히 | 글항아리
27,000원 | 20260116 | 9791169094771
존재한 적 없지만 전쟁까지 불러온 상상의 단일체, 범러시아 민족
잃어버린 왕국을 좇다 근대 국가의 길을 잃어버린 러시아의 역사
15세기 후반부터 우크라이나ㆍ벨라루스와의 관계 속에서 자라난
러시아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의 뿌리를 추적하다
제국이 정체성이 되어버린 민족
러시아 민족 만들기 프로젝트가 직면한 독특한 과제
전후 탈식민주의 시대를 거치며 제국주의는 민족주의와의 결합에서 빠지고 점차 과거의 유물이 되어가는 듯했다. 대영제국이 해체되며 인도를 비롯한 영연방의 식민지들이 하나둘 독립했고, 독일 역시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를 독일 민족 국가로 통합하려는 구상을 포기했다. 최근 러시아, 중국의 제국적 행보는 이러한 세계 흐름에서 벗어난 예외 사례로 치부되곤 했다. 그러나 2026년 새해 벽두부터 전해진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 소식은 민족주의의 고양이 제국주의와 얼마나 빠르게 결합할 수 있는지 단번에 드러내며, 여전히 역사를 뒤적여 두 개념의 조합 공식과 경로를 파악할 필요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동유럽사 연구자인 세르히 플로히 하버드대학 교수는 2016년 모스크바 한복판, 크렘린궁 인근 광장에서 러시아 제국과 민족이 얽히고설킨 매듭을 상징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이웃 나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대공이자 키이우 루시의 군주였던 볼로디미르를 기리는 동상이 러시아 수도 한복판 가장 중요한 장소에 세워진 것이다. 1147년 모스크바를 창건한 유리 돌고루키 동상보다 더 높이, 더 중심에 자리한 이 동상의 위치는 러시아의 역사적 정체성에서 키이우 루시, 더 나아가 우크라이나가 지니는 함의에 골몰하게 한다. 그 함의는 동상 제막식 연설에서 블라디미르 푸틴이 볼로디미르 대공을 러시아 영토를 넓히고 중앙집권 국가의 토대를 마련한 정치인으로 호명할 때 분명해진다. 푸틴은 그가 “여러 민족, 언어, 문화, 종교로 이루어진 연합”을 이룩했다는 언급을 빠트리지 않는다.
저자는 볼로디미르 대공 동상과 푸틴의 연설에서 키이우 루시라는 ‘잃어버린 왕국’ 신화를 되찾으려다가 근대 국가로 거듭나는 길을 상실하고 또 하나의 ‘로스트 킹덤’이 된 러시아의 모습을 본다. 미궁에서 빠져나가는 실타래의 매듭을 푸는 직조공처럼, 이 책은 민족주의와 제국주의가 교차하는 약 600년의 러시아 역사를 정교하게 풀어내며 근대 민족 만들기에 있어서 러시아가 직면한 과제의 보편성과 독특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오늘날 러시아는 인종·문화·정체성의 ‘정신적 지도’와 러시아연방의 정치적 지도 사이를 조화시키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회학자 어니스트 겔너가 말한 근대 민족주의의 핵심 요구, “정치적 단위와 민족적 단위가 일치해야 한다”는 원칙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20세기에 제국 해체를 경험한 열강들도 겪었던 보편적 문제다. 하지만 러시아의 문제는 한층 더 깊다.
러시아 문제의 핵심은 러시아 민족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있다. 러시아 민족은 오로지 러시아 연방 안팎의 러시아 인종으로만 구성되어 있는가 아니면 동슬라브인인 우크라이나인과 벨라루스인도 포괄하는가? 다른 제국들이 피지배민과 국가 기원 신화 및 역사적 뿌리를 공유하지 않았던 것과 달리, 하필 러시아는 이를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와 공유해왔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근대 민족의 발명을 다룬 기존 연구들과 이 책이 차별화되는 지점도 러시아 민족의 이러한 조건을 조명하는 데에 있다. 저자는 제도적으로 실재하지 않았던 범러시아 민족이 발명되어온 역사를 추적한다.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러시아인으로 구성된 범러시아 민족은 지도에서 찾을 수도 정치적 실체로 구현된 적도 없지만, 러시아 정치·문화 엘리트와 대중의 의식 속에는 강력한 현실로 기능해왔다. 이러한 상상의 단일체가 실제 지도 위의 국가들보다 더 큰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정도다.
범러시아 민족에 기반한 러시아 제국은 영국 사학자 제프리 호스킹의 표현대로 영국처럼 “제국을 소유한” 형태가 아니라 “제국 그 자체”다.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는 영국의 식민지들처럼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서 수익을 가져다주는 영토가 아니라 이미 러시아 제국 본토의 일부처럼 여겨진다. 러시아는 중국과 더불어 제국의 행보를 보이는 예외 사례가 아니라 제국의 또 다른 유형에 해당하며, 이러한 제국의 탈식민화 또한 다른 종류의 과제를 요구한다. 이 책의 서평을 쓴 소련 역사학자 마크 에델이 인용한 중국사학자 피터 C. 퍼듀의 탈식민화의 두 유형을 참조해보자. “제국을 소유한 경우 식민지를 버리고 본토 핵심을 보존할 수 있다…. 제국 그 자체라면 주변부의 상실은 국가와 사회의 완전한 변형을 의미한다.”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는 제국의 매듭을 풀기보다는 ‘잃어버린 왕국’이라는 과거 체제의 복원을 추구했다. 그 결과는 2014년 크림반도 합병과 우크라이나 동남부 침공, 그리고 2022년 우크라이나와의 전면전 돌입으로 이어졌다. 저자는 책 말미에서 러시아가 포스트-제국 세계의 요구에 맞춰 영국과 독일 등 제국처럼 러시아연방의 국경 안에서 근대적 시민 국가를 형성하기를 촉구하고,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냉전 혹은 이보다 더 끔찍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출간 후 9년이 지난 오늘날의 현실은 새로운 냉전 체제일까, 아니면 이미 더 끔찍한 국면에 접어든 걸까. 확실한 건 제국을 뺀 민족 개념을 새롭게 상상해야 한다는 점, 여기에는 국가와 사회의 완전한 변혁이 수반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 매듭을 풀려면 이 책의 시선을 빌려 키이우 루시라는 ‘잃어버린 왕국’의 기억이 어떻게 러시아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를 형성해왔는지 거꾸로 되짚는 작업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