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지막하지만 또렷한 (‘삶은 어떻게 글이 되는가?’ 에세이쓰기 1기 작품집)
권라희, 여천경, 이승하, 이정배, 이정희, 정희연 | 푸른향기
18,000원 | 20250821 | 9788967822439
삶은 어떻게 글이 되는가?
푸른향기 에세이쓰기 1기 작품집, 함께 쓰는 즐거움
재미와 공감, 감동이 있는 6인 6색 에세이
도서출판 푸른향기에서 진행한 에세이쓰기 수업 작품이 한 권의 책으로 나왔다. 유난히 더웠던 여름, 여섯 명의 작가는 ‘나지막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글을 썼다. 각자의 개성과 스타일에 따라 낱말을 고르고, 문장을 배열하고, 은유의 말들을 찾아냈다. 매주 목요일 밤, ‘공간 사계절’에 모인 작가들은 포트럭 파티를 하듯이 써온 글들을 펼쳐놓고, 낭독하고 합평했다. 서로에게 최초의 독자가 되어. 합평을 거친 글들은 다시 퇴고의 손길을 거치며 새로운 작품이 되었다.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뻗고, 자라고, 흐르고, 번지고, 솟는’ 여름이었다. 시인이고 여행작가이자 출판사 대표인 한효정 작가가 멘토가 되어 따듯하고 날카로운 피드백을 해주었다.
<본문 속으로>
창작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수많은 초고를 모아둔 거대한 수장고를 내 안에 짓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름 붙여지지 않은 감정들, 아직 형체를 갖추지 못한 이야기들, 세상의 시선을 견딜 준비가 되지 않은 진심들이 그곳에 보관되어 있다.
- 권라희 <도시를 비춘 거울, 날 비추다>
술 한 잔씩 털어 내다보면 복잡다단한 생각 대신 단순함에 젖어든다. 한 병 이상 비우고 나면 무엇이든지 아무래도 상관없어지는 것 같다. ‘그래, 그럴 수 있지. 뺨을 때리는 것만으로 속이 안 풀렸을 수 있지, 돈이 정말 없었을 수 있지.’ 술이 만들어낸 관대함으로 위로받는다. 다음 날 술이 깨고 나면 여전히 복잡다단한 세상 속에 있더라도, 잠시라도 해방감을 얻을 수 있다.
- 여천경 <누구를 위해 잔을 부딪치는가>
가장 안온한 삶을 보내고 있을 때조차 다음 생에 또 태어나고 싶다고 선뜻 답하지 못하면서 아이를 낳는 것이 맞을까. 지금까지 보고 듣고 느꼈던 삶은 축복이라기보단 맞닥뜨린 과제를 끊임없이 해결하는 과정이었다. 때때로 찾아오는 즐거움과 행복도 있지만, 삶은 기본적으로 생존과 맞닿아있다.
- 이승하 <아이를 낳기 미안해서>
우리는 각자의 엔딩을 향해 걷는다. 그리고 여정의 매 순간 다시 묻는다. “지금 나는 나를 살고 있는가?” 그 질문 앞에 멈추지 않고, 나만의 문장을 써 내려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충분하다. 나만의 서사, 나만의 결말. 그것이 우리가 이 세계에 남길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문장이 아닐까.
- 이정배 <인생의 매뉴얼로부터 멀어지는 법>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벌판 위 런닝머신 같다. 끝도 없이 자작나무 숲을 달린다. 나는 정지해 있고, 자작나무들이 거꾸로 달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열차는 달리고 달려 작은 역에 멈췄다. 대륙 속 작은 산골 마을, 굴뚝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는 고요한 하늘을 향해 가만히 오르고, 기찻길 따라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은 잠시 머무는 손님을 향해 손 흔들며 웃음꽃을 피웠다. 그 웃음은 바람을 타고 내 마음속까지 닿았다.
- 이정희 <먹고 먹고 또 먹고>
언젠가부터 여행할 때 사롱과 비슷한 커다란 머플러를 챙겨 다니기 시작했다. 머플러는 때로는 돗자리가, 때로는 옷이나 담요가 되어주었다. 해변가든 잔디밭이든 마음에 드는 곳이 나타날 때마다 그것을 펼치고 털썩 주저앉아 경치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것이 그렇게 평온하고 행복감을 주는 행동인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내게 알려준 것은 사롱의 사용법이 아닌, 여행지에서 긴장을 풀고 자연스럽게 주변에 녹아드는 그녀의 여행 노하우였다.
- 정희연 <당당한 그녀의 사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