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의 민낯
설지 | 부크크(bookk)
12,800원 | 20201222 | 9791137229204
어느 가을, 마당을 쓸던 제자가 스승에게 말했다.
"스님, 낙엽을 깨끗이 치웠습니다."
이를 본 스승은 나무를 흔들어 낙엽 몇 장을 흩뿌리곤 말했다.
"가을은 원래 이런 것이다."
선불교의 가장 큰 특징은 번뇌를 다루지 않는 것이다. 선불교는 번뇌를 긍정한다. 번뇌의 소멸을 기대하지 않으며, 욕망과 정서로 펼쳐지는 번뇌의 세계에 기꺼이 응한다. 상좌부불교의 아라한들이 보리수나무 아래 앉아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절멸하고 있을 때, 선종의 선사들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가득한 저잣거리를 노닐었다. 아라한들이 춤과 노래에 눈을 감고 귀를 닫은 채 분소의와 발우 하나로 금욕적인 삶을 살아갈 때, 선사들은 거문고를 튕기고 차를 즐기며, 깨달음의 시를 지었다. 선종에서는 아내가 있고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 그들의 깨달음과 모순되지 않았다. 초기불교에는 깨달은 재가자가 없지만, 선불교에서는 깨달은 재가자를 찾는 것이 어렵지 않다. 이 책은 선불교의 사상, 선불교의 수행, 선불교의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자아와 욕망과 정서를 그려나가는 선불교의 세계를 담았다.
「책 속에서」
초기불교에서 깨달음의 목적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삶은 고통의 연속일 뿐이라는 염세적 통찰이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삶이 고통스러워도 계속해서 태어나겠다는 다짐을 한다. 모두가 ‘다시 태어나지 않을 때 까지’ 자신은 계속해서 태어나,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숭고한 염원이다. 숭고하기는 숭고하지만, 이 역시도 염세적 통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러한 대승에서 선불교가 파생한다. 선불교는 불교계의 이단아다. 선불교는 삶에 대한 절대적 긍정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건다. 생사의 불안에서 벗어나면, 생사 그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다. 탐진치 그대로의 삶을 통째로 긍정해버리는 것이다. -----p. 45
고통은 고통대로 가져다 주는 미장셴이 있고, 불행은 불행대로 가져다 주는 미장셴이 있다. ‘인생에 실패하면 재능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시詩의 세계에 접근하게 된다.’ 에밀 시오랑의 말이다. 오직 행복만 삶의 목적이 된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서글픈 일일 것이다. 삶이 가져다주는 다양한 재료들을 적극적으로 요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우리는 삶에 내던져졌고, 운명이 다할 때까지는 살아내야 하는 것이니까. -----p. 53
전통불교의 수행자들처럼, 우리는 우리의 욕망과 정서와 어리석음을 ‘주시’하거나 혹은 화두 위에 올려놓아서 수시로 태워버릴 수 있다. 죽음이 올 때까지, 끊임없이 샘솟는 욕망과 정서와 어리석음을 끊임없이 태워버리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전통적인 불교 수행자의 삶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욕망과 정서, 어리석음을 껴안을 수 있다. 고통과 결핍을 껴안을 수 있다. 껴안는다는 것은 그것을 수용함으로써 해소하고자 함이 아니다. 정면으로 의욕해가는 것이다. 욕망에, 정서에, 고통에 망설이지 않는 것이다. 그 모든 재료들이 다채로운 삶을 구성하게 된다. 이것은 선불교적 삶이다. -----p. 63
‘화’는 인간관계에 있어 많은 부분을 조율해준다. 화는 서로가 지켜야 할 매너와 거리를 알려준다. 분노는 부당한 것에 대한 해명을 요구한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적개심을 느낀다는 것은, 그와 우리 사이에 해결해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신호이다. 중요한 것은 화를 억제하고 억누르는 것이 아니다. 화가, 분노가, 적개심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무엇을 알려주려 하고 있는가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분노를 없애기보다 분노를 근사하게 표출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p. 85
우리는 수행할 수 있다. 또, 우리는 그냥 ‘살아갈 수도’ 있다. 본래면목을 통찰한 뒤에, 우리는 여전히 본래면목에 주의를 기울인 채 경계 속을 헤엄치며 공부를 해나갈 수 있다. 반면, 본래면목을 통찰한 뒤에, 우리는 수행이라던가 깨달음이라던가 하는 것들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온전히 삶 자체를 누릴 수 있다. 자기 향상에 대한 족쇄에서 벗어나, 삶의 불완전성을 온전히 만끽할 수 있다. -----p.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