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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27291365
· 쪽수 : 116쪽
· 출판일 : 2019-12-10
저자소개
책속에서
두 해 전 겨울 해인사에서 같이 살았던 스님이 죽었다는 소식. 때이른 죽음들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우울증걸린 중만큼이나 꼴불견도 없다지만. 그렇지만 나는 사실 조금 우울하다. 가끔은 사는 것이 지겹게 느껴진다. 인생이, 젊음이, 시간이 연기처럼 사라진다. 홀로 나이들어가는 것이 두렵다. 때로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할 때도 있다. 어쩌면 아무 말도 하지 말았어야 했는지 모른다. 잠자코 있어서 승려의 위의를 갖췄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기엔 내 긍지가 그리 대단치 못하기에. 이렇게라도 글을 쓰지 않으면 너무 일찍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느낌. 밤이 깊다. 정신이 무겁다.
습한 도량은 하안거가 끝나기 전부터 여치가 등장한다. 방아깨비는 귀여워서 봐줄만 하지만 두꺼운 검지 손가락만 한 여치들이 날개를 펄럭이며 몸에 달라 붙는 것은 몇 해를 거듭해도 적응되지 않는다. 이것들은 밝은 불을 좋아해서, 밤에도 등을 켜놓는 해우소 같은 데는 새벽에 무리를 지어 용맹정진하고 있다. 여치 뿐이면 다행인가. 개울가 가까운 곳으로 포행이라도 간다면 머리가 세모난 독사들이 일광욕을 즐긴다. 독사들은 거만스러워서 사람을 봐도 도망가는 법이 없고 기껏해야 몸을 제껴 길을 내줄 뿐이다. 돈벌레나 지네한테는 그리 시달려본 적이 없는데, 어떤 스님은 자는 도중 지네한테 물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고 한다. 봄에는 꽃가루 알레르기가 나를 괴롭게 한다. 여름에는 풀을 뽑고 가을에는 낙엽을 쓸고 겨울에는 눈을 퍼낸다.
‘결국 모든 것은 마음의 문제다.’ 그렇다. 인생이란 마음의 문제다.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손에 쥔 이 마음을 뜻대로 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수많은 수행을 통해, 뼈를 깎는 각고의 노력을 통해. 마음을 이렇게 저렇게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할 지 모른다. 그러나 마음에는 경계도 없고 실체도 없어서. 마치 흐르는 물과 같아서. 붙잡으려 한다면 유유히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갈 뿐이다. 마음은 전능하지만. 인간은 그 마음에 대해서도 무력하여. 그리하여 삶이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라 하여. 인생이란 왕의 옷을 입어도 결국 신하가 되어버리는 것이라 하여. 나는 조금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