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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88925727806
· 쪽수 : 367쪽
· 출판일 : 2012-07-25
책 소개
목차
회오리바람이 지나간 자리
아주 긴 하루
햇살이 넘실거리는 교정에서
재회하는 밤의 숲
기억이 잠식하는 아침
궁지에 몰린 금붕어
해금解禁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다
Present
작가 후기
저자소개
책속에서
“그만하자.”
가냘픈 호흡이 하얗게 허공을 불태우고 사라졌다. 그 환영 같은 움직임을 따라 고개를 조금 외로 꼰 환우가 작게 웃었다. 차갑다고도 따뜻하다고도 말할 수 없는, 그저 입술 끝이 그저 당겨 올라간다. 그가 엷은 숨처럼 표정 없는 말을 토했다.
“그만하자고. 뭘?”
환우가 느리게 웃음기를 지우고 그녀를 응시했다. 솜털 하나의 움직임마저 얼려 버릴 매서운 눈빛이었다. 재인보다 눈치가 백단보다 빠르니 못 알아들었을 리 없는데도, 눈앞에서 현실도피를 하려는 것이다. 재인이 현실로부터 스스로를 떼어 놓았을 때 환우의 심정이 이랬을까. 그녀는 떨리기 시작한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는 걸 스스로도 느꼈다.
“정말 그만해야 돼.”
환우의 머리가 다시 반대쪽으로 천천히 기울었다. 어려운 산수 문제를 앞에 둔 어린 아이처럼. 썰물이 빠지듯 표정이 사라진다. 재인은 그가 이런 눈빛을 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얗게 질린 그의 눈에서 감정이 사라지는 게 이상할 정도로 선명하게 보였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아이 같은, 그런 얼굴 하지 마, 환우야. 재인의 눈에서 눈물이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편이 서로에게도, 선생님께도…….”
풋. 그가 느닷없이 날카로운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푸르고 찬 겨울 밤하늘로 메마른 웃음이 거미줄처럼 뻗어 나간다. 흡사 뾰족한 돌이 주머니 안에서 구르는 것 같은 웃음에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재인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그를 아연하게 바라보았다. 스스로는 멈출 수 없는 것처럼 웃는 얼굴이 낯설고 두렵다. 얼마나 그랬을까 문득 툭 끊어지듯 웃음을 멈춘 그가 얼굴을 들었다. 무섭도록 고요한 창백한 얼굴이 그녀를 향해 입술을 열었다.
“또 선생님인가. 그런데…….”
뺨을 할퀴던 바람이 어느새 멈췄음을 깨달았다. 환우의 울림 좋은 목소리가 잠잠한 정원 안에 울린다.
“너와 난 무엇도 한 적이 없어. 네가 말했듯이.”
분명 그걸 방패로 삼은 건 그녀였다. 재인은 입술을 깨물며 불안한 시선을 환우로부터 옮겼다. 그녀의 고갯짓을 뒤따라온 손이 턱을 감아쥐더니 자신을 향하게 했다. 그녀의 얼굴에 아로새겨진 눈물길을 따라 느리게 핥아 기겁했다. 그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눈동자를 감추듯 부드럽게 눈매를 휘었다.
“한 번도 내 것이었던 적이 없는 재인.”
환우가 그녀의 앞에 바짝 다가왔다. 노란 현관 조명이 잠시 꺼졌다가 그의 움직임에 반응해 다시 켜졌다. 어둠에 하얗게 잠겨 있던 그의 눈 밑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오늘.”
환우는 덜덜 떨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다 손목 안쪽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며 손이 너무 차가워서 흠칫했다.
“낮에 갤러리에 왔지.”
“봐, 봤…….”
“당연히 봤지. 재인이잖아.”
그가 잡고 있던 손목에 이를 세워 꽉 물더니 얇은 피부를 빨아들였다. 예고 없는 통증에 낮게 신음하는 재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환우가 심장 사납게 웃었다.
“가엾고도 사랑스러운 재인. 감추려야 감추지 못한 표정이 아주…… 도발적이었지.”
아름다운 뒷모습의 여성에게 속삭이던 몸짓. 부드러운 미소. 세상에 그들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런 그들에게 재인은 강렬한 소외감과…….
“질투하고 있었어.”
허를 찔린 재인이 손을 잡아 빼려 했다. 그가 놓아주길 용납하지 않은 한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 시도다. 그 당혹한 눈빛을 똑바로 마주한 환우가 깊게 웃었다.
“그러고도 도망쳤지만.”
사냥감 앞에 도사린 맹수처럼 눈이 백열등 아래서 붉게 빛났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뭘 할 건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만두라고? 시작도 안 했는데.”
그가 다시 큭큭 낮게 목을 울리며 웃음 비슷한 것을 흘려냈다. 정말 재미있는 말이라도 들은 듯한 태도지만 눈에 표정이 없다. 그 깊은 안쪽에서 일렁이는 색깔 없는 불길을 본 것 같아 그녀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가 한쪽 입술을 기묘하게 비틀어 올렸다.
“널 몰아세운 게 아니라, 너무 풀어준 거였군,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