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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88927809067
· 쪽수 : 128쪽
책 소개
목차
1부
물가에서 우리는
모든 가구는 거울이다
식탁의 목적, 물컵
식탁의 목적 혹은 그 외의 식탁들
식탁의 목적, 냉장고 불빛
식탁 자리
식탁의 목적, 그러니까 우리는
식탁의 오래된 풍경
여름
여름에게 하고 싶은 말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2015
종점들
당신이나/그 앞에 앉은 나나/귀신같아서 좋은 봄날의 소풍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2017
여름비
2부
우리는 모두 물방울이 아니다
공원
캐치볼
미끄러지는 세계
공원 2
한밤의 셔틀콕
폐허는 언제나 한복판에서 자라고
살이 부러졌다
시소의 세계에서 우리는
떠내려가는 금요일
43일의 43일이 43일 동안
사과 상자는 쌓여가고
3부
곁
밑
잠
잠 잠
곁
홀연
그네
워터볼
또다시 종점들
패전 처리 투수
재워주고 싶어
붉은 방
학교생활
학교생활-칠판
학교생활-상담실
익어가는 것들은 왜 매달려 있는가
4부
자전
화분 혹은 시인 케이
달리는 저녁
당신의 세계
두 번째 엽서
하염없이
파주
파주 2
파주 3
파주 4
파주 5
파주 6
파주 7
파주 8
파주 9
파주 11
파주 12
저자소개
책속에서
발을 씻는다
버드나무처럼 길게 발가락을 내어놓는다
세상의 모든 염려를 품고
울음을 참고 있는 나무들이 있어
오늘 당신과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앞이 캄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두 발이 물속에서 한없이 겸손해진다
눈이 없는 물고기처럼 당신의 발등에서 조금 자려고 한다
이제 더는 애쓰면서 살지 말아요
어떻게든 사는 건
하지 말아요
읽지 않아도 되는 세상은 없었으므로
이제 나는 눈 없는 물고기로 살거나 죽거나
당신 옆에 눕고 싶은 것일 뿐
상처 가득한 지느러미가 환해질 때까지
달빛이나 축내면서
어떤 당부도 희미해진 지금
말간 물이 발목에서 뒤척이는 건
마치 어떤 전생 같아서
몽유의 날들을 세어본다
세어보는 손가락이 붉어져서
물가의 나무들은 속으로만 발가락을 키운다
-「물가에서 우리는」
해변의 묘지 같아 그렇게 혼잣말을 하는 동안 나 없이도 식탁은 식탁이다. 공중에 떠 있는 바닥이라니 공중에 떠 있는 바닥이라니 가끔은 그 높이를 매만지며 낯설어지는 얼굴을 오래 떠올려보았지만 식탁의 에피소드는 끝났다. 낮이 지워지고도 밤이 오지 않았다. 유령처럼 그림자들이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든 이들은 깨우는 게 아니야. 창문을 닫으며 내게 남은 마지막 표정 하나를 내려놓았다. 11월이 시작되고 있었고 죽은 벌레들이 잘 말라가고 있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밥을 먹고 고요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식탁 위에는 바다, 아니고 모래, 감쪽같이 지워진 발자국을 따라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 부르던 노래들이 가득했다. 마주 앉은 얼굴은 자꾸만 멀어져서 해안선이 생겨난다고 나는 이제 없는 너의 다리를 발로 툭툭 찬다. 바닥이 만들어지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잖아. 나는 몇 개의 입술을 몰래 주워 넣고 말없이 밥을 먹는다. 고요해서 밥을 먹는다.
-「식탁의 목적, 그러니까 우리는」
이제 그만
여기서 살까
늙은 버드나무 아래
이름표도 없이
당신과 앉아서
북해의 별이 될 먼지들과
여기와 아무 데나를 양손처럼 매달고
웃었다
세상의 폐허 말고
당신의 폐허
그 둘레를 되짚어가면서 말이죠
폐허의 옷을 지어 입으면
등은 따뜻할까요
머뭇대다가 지나친 정거장들이
오늘 별로 뜨면
이제 어떤 먼 곳도 그립지 않을 테죠
모든 것의 뒤만 볼 수 있는 세상
갑자기 당신이 이해돼버렸어요
지하 계단을 밝을 색으로 칠해볼까요
거기 막 떠난 물방울을 그려 넣기로 해요
켜켜이 폐허의 지층을 닮은 물방울들이
물그릇에 담겨
무엇으로든 막 자라나는 동안
끝에 기대어
당신에 기대어
함께 지워질 수 있다면
-「종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