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적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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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1년(성종22)~1553년(명종8).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이다. 초명은 적(迪)이었는데 중종(中宗)의 명으로 언적(彦迪)으로 고쳤다. 외숙인 손중돈(孫仲暾)을 사사하였다. 1514년(중종9) 문과 별시에 급제하였다. 이후 이조 정랑.사헌부 장령.밀양 부사 등을 거쳐 1530년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 김안로(金安老)의 기용을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다. 귀향한 후 경주(慶州) 자옥산(紫玉山)에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1537년에 홍문관 교리로 서용되었다. 이후 전주 부윤.대사성.대사헌.홍문관 부제학.한성 판윤.우참찬.이조 판서 등을 거쳐 1542년 좌참찬이 되었다. 1543년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이듬해 병으로 사임하였다. 1545년(인종1) 다시 출사하여 좌찬성이 되었다. 인종이 승하하자 원상(院相)을 맡았다.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 판의금부사로 추관(推官)에 임명되어 위사 공신(衛社功臣)에 녹훈되고 여성군(驪城君)에 봉해졌으나 곧 사직하였다. 1547년(명종2) 양재역 벽서 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어 죽었다. 학문적으로는 주희(朱熹)의 주리론(主理論)에 입각한 이우위설(理優位說)을 주장하여 손중돈(孫仲暾).조한보(曺漢輔) 등과 무극태극 논쟁(無極太極論爭)을 벌였고, 이황(李滉)에게로 계승되는 영남학파 성리설의 선구가 되었다. 저술로는 《구인록(求仁錄)》,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봉선잡의(奉先雜儀)》 등이 있다. 종묘에 배향되었고, 1610년(광해군2) 문묘에 종사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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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미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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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불교의례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한국예학총서』(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면서 유가례, 시속례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다. 그래서 불교의례집인 『(국역)천지명양수륙재 의범음산보집』(양사재)을 번역하였고, 조선조 가례학의 대체적인 체계와 중요한 학설을 개관하는 데 도움을 주는 『(국역)가례증해』(민속원) 번역 작업에 참여하였으며, 이와 관련된 「佛家의 喪禮와 僧喪服圖」, 「『석문가례초』의 五服圖 연구」, 「晦齋 李彦迪의 『奉先雜儀』 연구」 등의 논문이 있다.
현재는 경성대학교에서 초빙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 예속과 관련된 강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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