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개신교) 목회/신학 > 설교/성경연구
· ISBN : 9788932502236
· 쪽수 : 544쪽
· 출판일 : 2021-07-23
책 소개
목차
감사의 말
기고자
약어표
서론
성경 해석에 관한 아홉 테제
제1부 성경을 어떻게 읽고 가르칠까?
1. 고백적 방식으로 성경 가르치기_ 엘렌 데이비스
2. 성경이 교회에서 지니는 권위_ 로버트 젠슨
3 성경을 일관된 이야기로 읽기_ 리처드 보컴
4 두 번째 내러티브의 발견: 추리소설과 역사적 방법론의 구조_ 데이비드 스타인메츠
제2부 살아 있는 전통
5. 교부들의 주해는 지금도 유용한가?: 초기 그리스도인의 시편 해석에 관한 몇 가지 고찰_ 브라이언 데일리
6. 그리스도는 성 프란치스코와 닮았다_ 제임스 하월
7. 포스트모던 시대에 신실하게 성경 읽기_ 윌리엄 스테이시 존슨
8. 탈기독교 시대에 신실하게 설교하기_ 크리스틴 맥스패든
9. 신앙 공동체에서 성경을 삶으로 구현하기_ 그레고리 존스
제3부 어려운 본문 읽기
10. 비판적 전승 계승: 성경 내부의 해석을 찾아내기_ 엘렌 데이비스
11. 위험하게 살아가기: 창세기 22장과 좋은 성경 해석 탐구_ 월터 모벌리
12. 요셉과 우리 주님의 수난_ 게리 앤더슨
13. 부활에 비추어 성경 읽기_ 리처드 헤이스
14. 어떻게 진리를 알 수 있는가?: 요한복음 7장 14-18절 연구_ 월터 모벌리
15. “그의 사람들이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다_ 메리언 메이 톰슨
제4부 설교
16. 취약성, 언약의 조건_ 엘렌 데이비스
17. 자신에게 가하는 폭력_ 엘렌 데이비스
18. 소망의 포로_ 엘렌 데이비스
19.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 줄 하나님이 누구이겠느냐?_ 리처드 헤이스
20. 그물에 잡히다_ 리처드 헤이스
21.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_ 리처드 헤이스
주
참고문헌
책속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능력이 생길수록 우리는 자신의 해석에 의심을 품게 된다. ‘의심의 해석학’(the hermeneutics of suspicion)은 이 시대 성서학계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의심의 주된 대상은 사람들이 그 사회의 산물이라 여기는 텍스트 자체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 본문을 고백적 관점에서(자신의 믿음뿐 아니라 죄도 정규적으로 고백하는 공동체의 지체로서) 읽게 되면, 성경을 읽을 때 먼저 자신의 해석을 의심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다. 사실 대부분의 해석이 우리가 살아 온 시간 동안, 그리고 교회가 여러 세대에 걸쳐 지속되어 오는 동안 재고된 적이 없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성경을 집어 들어 읽은 뒤 다시 내려놓으면서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네”라고 말한다면, 반드시 심각한 문제에 빠지고 말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성경 본문을 읽는 것을 가리키는 전문용어가 ‘증거본문 찾기’(proof-texting)다. 성경 본문을 이용하여 자기 가설을 확증하려는 행위는 죄다. 그런 행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새로운 말씀에 저항하는 행위요, 성경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임을 철저히 부인하는 행위다. 이런 성경 읽기의 유일한 대안은 신약성경이 ‘메타노이아’, 곧 ‘회개’(문자적으로는 ‘마음의 변화’)라 부르는 것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읽는 것이다.
_“1. 고백적 방식으로 성경 가르치기” 중에서
성경에서 이스라엘 이야기가 지배 메타내러티브로 묘사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도리어 성경은 그 이야기를 바로에서 로마에 이르는 대제국의 지배 내러티브에 맞서는 저항 이야기로 묘사한다. 이런 지배 내러티브들의 특징은 그들의 영원성을 선포하고(사 47:7-8; 계 18:7) 자신들의 우주적인 신적 통치를 찬양한다(사 14:13-14; 단 4:30; 계 13:5-8). 틀림없이 이런 내러티브들은 억제를 정당화하고 모든 반대를 억누르는 종결의 내러티브며, 성경의 메타내러티브가 가장 제국적이고 호전적인 색채를 드러낼 때가 바로 이런 지배 내러티브에 맞설 때다. 특히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의 환상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책들에 나타나는 환상들은 신이라 자칭하며 이 땅을 지배하는 모든 통치자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권능을 강조하고, 모든 악을 물리치고 승리하실 하나님의 통치로 말미암아 이 악들이 궤멸당하고 쫓겨날 때를 내다본다. 이런 환상은 억압에 맞서는 비폭력 저항에 힘을 실어 줌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궁극성과 신성을 지녔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제국들에 지속적으로 맞설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단순히 이 세상 제국의 권력보다 강하고 성공적인 통치가 아니라, 그런 제국과 완전히 다른 종류의 통치가 실현되는 곳임을 주장한다. 기독교 역사의 비극적 아이러니는 기독교를 앞세운 제국들이 하나님 나라라는 상징을 차용하여 이 나라가 반대해야 할 세상 제국의 통치와 같은 종류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성경의 메타내러티브가 리오타르가 거부하는 메타내러티브와 훨씬 흡사한 메타내러티브로, 곧 기존 권력 구조를 정당화하는 메타내러티브로 변질되는 일이 일어났다.
_“3. 성경을 일관된 이야기로 읽기” 중에서
우리는 온갖 형태의 신학이 사실은 설교를 위한 이른 준비라는 것(결국 따지고 보면 신학을 철학이나 현상학이나 종교사와 구분해 주는 것이 바로 설교다), 그리고 전통을 살펴보면 기독교 설교는 무엇보다 성경 본문이 현재 교회의 삶에 제시하는 말씀을 강설하는 일이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 본문이 역사에 기원을 두고 모든 의미도 역사적 맥락을 담고 있음을 인식하며 그에 접근해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비록 역사를 초월해 계시지만 근본적으로 역사의 진정한 바탕이요 근원이신 분으로서 지금도 그 안에 계시고 적극적으로 활동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역사에 접근해야 한다. 즉, 하나님은 비록 존재론적 차원에서는 ‘역사에 매인’ 분이 아니지만, 역사가 이해 가능한 것이 되게 하는 조건으로서 끊임없이 그 안에서 발견되시는 분이다. 아울러 우리는 교회가 늘 성경을 그리스도에 관한 책으로 받아들여 왔다는 사실을 더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의 제자들이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성경대로…우리 죄를 위한”(고전 15:3) 것으로 해석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유대교 정경을 참조함으로써만 가능한 일이었고, 교회가 복잡한 여러 본문을 한 ‘성경’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교회의 믿음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해에서 우리의 기독교 신앙에 적합한 방식으로 ‘경건의 해석학’을 회복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성경 본문에 접근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헌신하는 그리스도인 예배 공동체의 신앙에 뿌리 내리고, 오랜 세월에 걸쳐 그 신앙을 끊임없이 설교해 온 말씀에서 영양분을 공급받는 접근법이다. 그리고 성경 메시지를 새롭게 적용하자는 주장에 대해 이렇게 질문하는 접근법이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에 관하여 아는 내용에 부합하는가?’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구원의 완전한 신비, 우리가 교회 안에서 받아들이고 경험했던 그 신비와 들어맞는가?’ ‘이것이 우리가 거룩한 삶을 영위하게 도와주는가?’
_“5. 교부들의 주해는 지금도 유용한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