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중국사 > 중국사 일반
· ISBN : 9788933706350
· 쪽수 : 448쪽
· 출판일 : 2012-10-20
책 소개
목차
제1부___ 풍운의 조화
1장 광복 초기의 흥분과 희망 / 2장 강대국의 개입과 한반도의 남북 분단 / 3장 신중 국의 외교 방침과 동북아시아 양대 진영의 대치
제2부___ 대치 시대
1장 3년간의 혈전 / 2장 바다를 낀 대치 시대의 설전 / 3장 1950∼1960년대 중·한 대 치의 국제요인
제3부___ 전환점
1장 1970년대 초반 국제 정세의 변화와 한국의 대응 / 2장 한반도 정세의 새로운 동향 ―남북대화의 시작 / 3장 한국 경제의 비약과 중ㆍ한 정부의 정책 조정 추세
제4부___ 최초의 접촉
1장 중·한 접촉을 촉진한 환경과 조건 / 2장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 속에서 공감대 발견 / 3장 우발적인 사건이 뜻밖의 계기가 되다―최초 중·한 정부 측 대표의 긍정적인 접촉
제5부___ 교류 경로의 확대
1장 중·한 경제개발 전략의 상호 선택 / 2장 중·한 경제무역 협력 관계의 급속한 발전 / 3장 체육경기와 국민교류의 붐 / 4장 문화교류의 유대를 만든 사람들
제6부___ 중·한 국교 수립
1장 남북 고위급 회담과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 2장 수교협상 / 3장 중·한 수교 / 4 장 중·한 수교 의미의 구현―한반도 핵 위기 해소의 전후 사정
제7부___ 쌍무 관계의 획기적인 발전
1장 경제무역 관계의 급속한 발전 / 2장 전방위적 문화교류와 협력 / 3장 정부와 민간 차원의 상호 빈번한 방문
맺음말___ 21세기 동북아 국제구도와 중·한 관계
책속에서
(제1부 풍운의 조화 중에서)
한편 조선의 정세는 불안정한 중국 정국에 비해 더 복잡했다. 그 주요 원인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에 있었다.
첫째로 국력이 약해서 항상 강국과 맞설 수 없는 피동적인 위치에 처했기 때문이다. 명明·청淸 이래로 중국과 조선은 서로 불평등한 관계이기는 했지만 내정과 외교 차원에서는 대체로 자주적인 종번宗藩 관계를 유지해왔다. 이러한 관계는 근대 초기 조선이 너무 일찍 구미 열강과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주는 보호 작용을 했다. ‘마관조약馬關條約’이 체결된 이후 조선은 이 보호 우산을 잃어버리면서 빠른 속도로 일본과 러시아의 각축장으로 화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일본에 병합되어 ‘황국신민화’를 통해 나라와 민족이 멸망하고 말았다. 조선 애국지사들의 조국 부흥을 위한 불굴의 투쟁은 구미 강국의 인정과 지지를 받기 어려웠다. 일본의 패전 항복 초기에 미국과 소련 등은 여전히 조선의 자주독립 요구를 무시한 채 한반도의 항복 수용 범위를 제멋대로 확정했다. 아울러 자의적으로 정치 세력을 선택해 내정에 개입함으로써 조선 광복의 역정이 시작부터 복잡한 국제환경 속에 함몰되어 남북 인사들의 호소가 힘을 얻지 못했다.
둘째로 여러 정치 파벌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각자 그 예속이 달라 권위를 지닌 핵심 역량이 형성되지 못했다. 1910년 일본이 조선을 병탄하자 각종 정치 세력이 독립을 회복하기 위해 단체를 결성해 활동을 전개했다. 1910년 하반기 이상설李相卨, 이동휘李東輝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광복군 정부를 설립해 스스로 대통령과 부통령을 각각 맡았다. 1912년 7월, 신규식申圭植은 동제사同濟社를 창립하고 박은식朴殷植을 총재로 추대했다. 1917년 7월, 재차 신규식이 발기해 임시정부 성격의 중앙총본부(조선사회당―옮긴이)를 조직하여 “중앙총본부가 유일무이한 최고 기관”임을 선언했다. 그리고 3·1독립운동의 자극을 받아 1919년 3월 17일 손병희孫秉熙를 대통령으로 하는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 4월 13일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하는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4월 23일 집정관 총재 이승만과 국무총리 이동휘가 이끄는 한성임시정부 등 3개 정부가 각각 성립되었다. 9월, 이 3개 정부가 상하이를 소재지로 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합병해 임시로 이승만이 대통령, 이동휘가 국무총리를 각각 맡았다. 그 뒤로도 임시정부의 수뇌부가 끊임없이 바뀌었고 내부 구성은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신한국민주당新韓國民主黨 등 좌·중·우파 정치 파벌들이 난립했다. 이와 더불어 민족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추종자가 각각 존재함은 물론 그 위에 출신 문벌과 지역 차이가 가세해 패거리를 짓고 권력을 탐함으로써 힘의 집중을 분산시키고 파당 활동의 범람을 부추겼다. 심지어 1945년 2월, 김준엽金俊燁 등 50명의 조선계 학도병들이 일본군을 이탈해 갖은 고난을 다 겪고 충칭의 임시정부에 찾아왔으나 임시정부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던 파벌 분쟁에 큰 실망과 분노를 느낄 정도였다. 김준엽은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만화를 그려 이러한 세태를 풍자했다. 동행한 장준하張俊河는 임시정부 전체 국무위원들 앞에서 “임시정부가 이렇게 많은 당파로 갈라져 서로 물고 헐뜯는다”라고 질책했고, 심지어 “일본군에 복귀해 비행기를 몰고 와서 충칭을 폭격하고 임시정부 건물에 폭탄을 투하하겠다”라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셋째로 민족 독립운동의 영웅들이 국외에 있었기 때문에 국내 민족투사들이 독립적으로 대세를 유지할 수 없었다. 일본 정부가 예상보다 빨리 패전 항복을 선언했기 때문에 당시 미국과 소련, 중국의 서남西南·화북華北 지역에 체류하고 있었던 이승만, 김구, 김약산金若山(김원봉金元鳳), 김일성金日成, 최용건崔鏞健, 무정武亭, 박효삼朴孝三, 박일우朴一禹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단시간에 귀국하기 어려웠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8월 15일 일본 천황이 정전 항복을 선언하고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가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라 할 때 서울에 남아 있던 여운형呂運亨, 안재홍安在鴻 등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하고 부분적인 경찰권을 접수했으며 심지어 조선인민공화국 성립을 선포했다. 하지만 여운형 등에게는 군대가 없었기 때문에 미국과 소련의 점령군 당국은 그들을 교섭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마침내 아베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나서 일본은 단지 동맹국에만 항복할 수 있다고 하면서 조선 국내의 혼란을 빌미로 8월 16일 경찰권을 도로 회수했고, 9월 9일 군대를 이끌고 미군 사령관 존 하지John Hodge 장군에게 투항했다. 미·소 양국은 여운형 등을 배제한 채 한반도의 운명을 좌지우지했다.
일본의 패전 항복을 경축하는 축제 분위기가 어느 정도 진정 국면에 들어서자 한반도의 각 정치 파벌들은 조선의 건국 방침을 둘러싸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8월 9일, 소련군이 조선 북부에 진격해 나진, 청진, 함흥, 원산, 평양 등의 도시를 연이어 탈환했으며 김일성 부대가 소련군과 함께 원산에 상륙했다. 10월 13일, 각 도道의 당 간부에 대한 연설에서 김일성은 ‘해방된 조선이 어떤 길을 걸어야 할 것인가?’라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 통치로 자본주의 발전이 크게 억제되어 조선 사회는 수많은 봉건적 잔재가 남아 있는 식민지 사회이다. 이 때문에 반드시 노동 계급의 영도하에 민족통일전선을 건립하고 반제 반봉건적 민주혁명을 실행해야 한다. 이 투쟁 속에서 공산당은 결코 소극적이거나 피동적이어서는 안 되며,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우리나라 통일과 독립 실현을 주장하는 당파와 협력해야 한다. 그리고 친일적 지주, 매판買辦 자본가, 민족 반역자를 철저히 숙청해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8월 10일, 옌안 주재 조선독립동맹 총연맹은 전투를 호소하며 “조선 인민은 긴급히 행동하여 새로운 조선민주공화국을 세울 것”과 “일본군의 모든 조선 병사는 무기를 들고 팔로군과 신사군에게 항복할 것”을 촉구했다. 아울러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 동포는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 가입하여 조선을 수복하자”고 호소했다. 11일 조선의용군 사령관 무정 등은 주더가 옌안 총사령부에서 하달한 제6호 명령에 따라 부대를 이끌고 팔로군과 함께 동북을 거쳐 조선에 진군했다.
8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李靑天 등은 국내 정진군挺進軍을 신속히 편성하여 미군과 함께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함으로써 건국의 기초를 다지기로 결정했다. 8월 18일, 국내 정진군 총사령관 이범석李範奭은 주한 일본군을 상대로 항복 접수 문제를 교섭하기 위해 부관 김준엽과 수행원 장준하 등과 함께 미군 수송기 편으로 직접 여의도로 날아갔다. 하지만 일본군의 저지와 동행한 미군 간부의 단호하지 못한 태도 등으로 인해 결국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다. 최초로 조국에 발을 디뎠던 조선 군관은 그다음 날 다시 중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