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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근현대사 > 일제치하/항일시대
· ISBN : 9788933707753
· 쪽수 : 736쪽
· 출판일 : 2020-07-30
책 소개
목차
신판 서언
초판 서언
Ⅰ 일본 육사 출신의 계보
Ⅱ 일심회의 야망
Ⅲ 고종 황제와 이토 통감의 확집
Ⅳ 추정 이갑
Ⅴ 김광서의 꿈과 모험
Ⅵ 비극의 장군 홍사익
Ⅶ 이우 공, 저항의 생애
Ⅷ 계림회 시말기
부록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생 명부
저자소개
책속에서
갑오개혁이 단행된 이듬해인 1895년, 내부대신 박영효의 주선에 따라 일본에 건너간 유학생 가운데 군인을 지망한 21명은 육군사관학교 제11기생으로 진학하여 1899년에 졸업했다. 그러나 박영효가 실각하여 재차 일본으로 망명한 뒤로부터 그들은 당시의 배일적인 정부로부터 친일분자로 간주되어 버림받는 신세로 전락, 도쿄 시내에서 울분의 나날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이 비밀결사 혁명일심회革命一心會를 결성하여 보수정권 타도를 결의한 것은 이 같은 사정 때문이었다.
그 뒤 일부 장교들은 일본에 망명 중인 유길준과 접촉하게 되면서 더욱 과격한 생각을 품게 되었으나 이보다 조금 앞서 귀국한 동기생 중 일부가 민영환의 열성 어린 노력으로 무관학교 교관으로 취직이 되는 등 여건이 크게 호전되자 일심회 동지들도 1902년 초까지는 모두 귀국하여 군부 내에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이에 따라 현 정부 타도라는, 그들이 전에 품었던 혁명 결의도 점차 퇴색해 갔다.
- 제2장 〈일심회의 야망〉
고종 황제는 이른바 보호조약 체결과정에서 이토가 보여준 강압적인 수법에 완전히 감정이 상해버렸다. 그에 대한 지난날의 신망은 원성으로 일변했다. 다만 황제는 조약 그 자체에 대해서는 국민들이나 우국지사들과는 달리 그처럼 불만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시종무관 어담은 회상하고 있다. 그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오직 한 사람, 황제만은 이 보호조약을 그토록 불만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것은 측근의 신임 두터운 자만이 아는 바로서 황족, 각원閣員이라도 생각하지 못한 점이었다. 물론 이를 표면에 나타내지는 않았다. 왜 황제가 이를 불만으로 여기지 않았는가 하면, 과거 한국은 청국의 속국으로서 최근 일청전쟁 전까지는 어떤 것이나 청국의 지배 간섭을 받았는데, 이번 보호조약은 그 청국에 대신하여 일본으로 바꾸어진 데 불과했기 때문이다. 외교권만 일본에 내준 것을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대상代償이 적은 것을 오히려 축복했다. 바꿔 말하면, 한국의 장래는 이 보호조약에 의해서 보장받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 때문에 받은 다소의 굴욕은 이미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폐하의 진의이다.”
이 어담의 관찰이 어느 정도 진상을 꿰뚫은 것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어쩌면 고종 황제는 조약체결 타결 과정에서 원안原案에 없던 제5조항이 추가되어 “일본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할 것을 보증한다”고 한 것에 적이 마음을 놓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고종 황제가 이즈음 이토와 일본 군부에 대해서 전적으로 그릇된 판단을 내리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당시 육군은 전승의 여세를 몰아 한국과 만주정책에 있어서 무단적인 급진정책으로 나가려 했다. 이에 대해 비교적 온건하게 국제협조를 중시하는 외교운영을 주장한 것이 이토를 정상으로 하는 문관들이었다. 그런데도 황제는 이토를 견제하려는 속셈에서 일본 군부를 이용하려고 했다. 어담은 이 위험천만한 모험의 내막을 회고록에 쓰고 있는 것이다.
- 제3장 〈고종 황제와 이토 통감의 확집〉
이처럼 이토는 비교적 자주성이 강했던 지난날의 개혁정치가들과 일정한 거리를 둔 채 통감부의 지시와 명령에 순종하는 이완용과 그 친일내각의 몇몇 각료만을 동반자로 하여 시정개혁을 이끌어 갔다. 그는 사법제도, 특히 재판 및 감옥제도를 획기적으로 개혁함으로써 고종 통치 40여 년간에 걸쳐 척족 민씨 일파와 황실의 근친들이 자행한 온갖 악정과 수탈에 시달려 온 한국 민중의 호응과 지지를 얻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개혁의 성격과 내용이 어떻든 간에 일본인이 지배하는 통감부라는 정치기구에 속박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비록 통감부는 법전조사국을 만들어 한국의 오래된 관습을 조사 연구하여 참작하는 등 사법개혁에 신중하게 대처한 일면도 있었지만, 한국 민중은 자신들이 익숙한 관습을 무시한 채 일본이 서구문명에서 따온 근대적 제도를 일방적으로 강제하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재판제도는 그런대로 어느 정도 실적을 거둔 편이었지만, 그 밖에 재정·화폐·지방제도에 대한 개혁은 실제로 민중의 부담을 줄여준다거나 생활에 획기적인 개선을 수반한 것도 아니었으므로, 차츰 불만이 쌓여 민심의 호응을 얻을 수 없었다. 이토는 본국에서는 ‘지혜의 정치가’라는 평판을 듣기도 했으나, 한국에 와서는 자주성을 빼앗긴 한국민이 품고 있던 이 같은 민족적 감정이랄까 민족주의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이는 결국 보호정치를 실패로 끝나게 한 요인이 되었으며, 그 자신도 이 때문에 불행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
- 제3장 〈고종 황제와 이토 통감의 확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