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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고대~고려시대 > 고려시대
· ISBN : 9788933708446
· 쪽수 : 463쪽
· 출판일 : 2024-11-15
책 소개
목차
머리말
Ⅰ. 고려전기의 불교조각
****** 통일왕조의 출현과 새로운 불교미술의 전개
제1장.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과 후삼국 통일
고려의 후삼국 통일과 개태사 창건 /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의 분석 /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과 경북・충북 일대의 석불들 / 조각장인에 대한 추론 /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에 보이는 외래적 요소 / 개태사 본존상의 도상 문제
제2장. 하남 하사창동 철불좌상과 통일신라 도상의 계승
하남 하사창동 철불의 조성배경 / 하남 하사창동 철불의 양식 계보 / 하남 하사창동 철불의 조각사적 의의
제3장. 중부지역에 확산된 불교조각: 석불과 철불
북한산 일대의 석불 / 광주・하남시 일대의 석불 / 안성 일대의 석불 / 평택・시흥의 서해안 일대 석불 / 원주 지역의 석불과 철불 / 충주・괴산 지역의 석불 / 중부지역 불상들의 양식적 특징과 의의
제4장. 미륵존상 조성의 성행: 마애보살반가상과 석조보살입상
보살반가상 형식 / 보살입상 형식 / 보살상의 편년 / 석조보살상의 존명 / 조성배경
제5장. 지방 호족의 불교조각: 강릉・오대산 지역의 석조보살상
강릉・오대산 지역의 성격 / 한송사지 석조보살상 / 신복사지 석조보살상 / 월정사 석조보살상 / 조각적 특징과 의의
제6장. 현종대의 석탑 조각과 그 의장
현종대의 불교와 불사 / 예천 개심사지 오층석탑의 부조 /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의 부조 / 개성 현화사지 칠층석탑의 부조 / 제천 사자빈신사지 4사자 구층석탑의 인물상 / 영암사지의 석조의장 / 현종대 석조미술의 성격과 의미
제7장. 새로운 도상의 전래와 수용
승가대사신앙과 승가사 승가대사상 / 나한신앙의 성행과 그 미술 / 성불사 마애석가삼존과 십육나한상 / 국립중앙박물관 청동빈도로존자상 / 소조 및 도제 나한상 / 관음보살상의 새로운 형식
Ⅱ. 고려후기의 불교조각
****** 정토를 향한 염원과 현세극복
제8장. 목조아미타불상의 조성과 복장 묵서명
개심사 목조아미타불좌상과 봉함목 묵서명 /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과 조성원문 및 개금발원문 / 봉림사 목조아미타불좌상과 복장 전적 / 수국사 목조아미타불좌상과 기해명 다라니 및 개금발원문 / 자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과 개금발원문 / 아미타불상의 양식 / 아미타불상 조성배경과 의의
제9장. 귀족적 미의식의 정착: 12~13세기의 보살상
안동 봉정사 목조관음보살좌상 / 안동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 / 소형 금동보살입상
제10장. 왕실불사와 민천사 금동아미타불좌상
민천사의 창건 배경과 그 기능 / 민천사의 삼천불 조성 불사 / 민천사 금동아미타불좌상과 개경 주변의 불상들 / 민천사 금동아미타불좌상과 14세기 중엽의 금동불상들
제11장. 중생구원의 이미지: 14세기의 금동보살상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 / 지순명 금동관음보살입상・대세지보살입상 / 장륙사 건칠관음보살좌상 / 조각사적 의의와 성격
제12장. 현세구복 신앙의 편린: 호지불과 마리지천상
고려시대 밀교와 마리지천신앙 / 고려시대의 호지불과 마리지천상 / 마리지천상의 유래 / 고려후기의 마리지천상 / 마리지천상의 성격과 불교미술사적 의의
에필로그
참고문헌
도판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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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책속에서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에 보이는 외래적 요소
개태사가 창건되던 고려 초는 불상의 재료 면에서 철불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이를 입증하듯이 고려의 주요 지배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중부지역에는 고려초기에 주조된 것으로 생각되는 많은 철불이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개태사에는 당시 유행하던 철불좌상이 아닌 석불입상이 주존불로 봉안되었다. 이것은 당시 유행하던 풍수지리나 비보사상裨補思想과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개태사를 창건하면서 이른바 창건주인 태조나 그 측근세력들이 개태사 불상을 통해서 백성들에게 어떠한 의미와 상징을 전하고자 했는가 하는 문제와도 연관지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개태사가 창건되던 무렵 왕건과의 연계 아래 창건 혹은 중창된 사찰 가운데 문헌기록과 불상이 함께 전하는 사찰은 대체로 운문사雲門寺, 직지사直指寺, 삼화사三和寺를 꼽을 수 있다. 운문사는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보양寶壤의 조언을 받아 전쟁에 승리한 왕건의 경제적 지원으로 중창된 사찰이며, 김천 직지사는 「직지사사적直指寺事蹟」에 능여能如가 태조의 도움을 받아 중창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삼화사 역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실린 「석식영암기釋息影菴記」에 태조가 통일하고 나서 이 절을 크게 중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전해오는 운문사 석불좌상(도 1-16)과 삼화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도 1-17)은 개태사 석조삼존불상과 연결시키기에 무리가 있다. 삼화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뒤에서도 살펴보겠지만, 신라하대 9세기 후반에 제작된 상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운문사 석불좌상은 불두佛頭와 몸체에 훼손이 심하여 2006년에 보수되었는데, 지금의 상호相好는 새로 만든 것이다. 원래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육각대좌의 광배의 형태에서 볼 때, 제작시기는 고려중기일 가능성이 크다. 이 불상들과 달리 직지사 석조약사불좌상은 나말여초 조각의 특징을 보이고 있으나 표면 전체에 마멸이 심하여 조형적 특징을 알아보기 어렵다.
앞에서 언급한 석불좌상들은 그 조성시기와 관계없이 모두 온화한 상호와 단아한 체구의 불상으로서 통일 고려의 웅대하고 강력한 이미지를 나타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개태사의 주존인 삼존불상이 나말여초기에 활동하던 여러 조각장인 집단의 다양한 불상 유형 가운데 예천 동본리 석불입상(도 1-10)이나 봉화 천성사 석불입상(도 1-11) 같은 거대한 규모의 석불로 결정된 것은 충분히 의도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좌상이 아닌 입상으로 제작한 것은 입상이 부처님의 유행상遊行像으로서 보다 적극적인 중생구제의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제1장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과 후삼국 통일’ 중에서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도 11-1)은 충청남도 서산 부석사浮石寺에 봉안되었된 상으로 복장에서 주성기鑄成記가 발견되어 천력天曆 3년(1330)에 만들어진 것이 밝혀졌다. 부석사는 의상義湘스님이 통일신라 초에 창건한 신라화엄의 근본도량인 영주榮州 부석사와 동일한 이름의 사찰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수도 개경에서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면 어렵지 않게 연결될 수 있는 서산 지역에 앞에서 살펴본 개심사 목조아미타불좌상(도 8-2)이나 문수사 금동아미타불좌상(도 10-6)에서 볼 수 있듯이 많은 사찰들이 세워졌으며 그중에 영주 부석사와 같은 이름의 부석사도 세워진 것이다. 현재 부석사에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문화재의 흔적은 찾을 수 없으며 이 금동관음보살상을 통해서만 고려시대의 면모를 추측할 수 있을 따름이다.
보살상의 복장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도 11-1)에는 고려의 서주瑞州(서산) 부석사에서 당堂의 주존主尊인 관음상 한 구를 주조함으로써 현세에서는 재화災禍를 없애고 복록을 누리며 내세에는 아미타정토에 함께 태어나기를 바라는 계진戒眞을 비롯한 30여 승속인僧俗人들의 간절한 발원이 담겨 있다. 이 발원문 외에도 복장 속에는 종자만다라種子曼茶羅(분실), 옥제품玉製品, 동령銅鈴, 수정水晶 등의 여러 복장물이 들어 있었고, 특히 인간의 오장육부를 표현한 오색의 천과 곡물들이 발견되었다.
보살상은 대좌와 광배를 잃었고 보관과 지물持物도 없으나 상 자체의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체구는 풍만한 편으로 몸에 비해 머리가 크며, 방형의 얼굴은 예배상으로서 위엄 있는 모습이라기보다는 아름답고 차분한 여성적인 표정을 짓고 있다. 끝이 다섯 갈래로 나뉘어진 보계는 높이 솟아 있으며 앞머리는 중앙을 중심으로 가지런히 대칭되게 새겨졌다. 얼굴의 각 부분도 사실적으로 조각되었고 양어깨 위에는 수발垂髮이 흐르고 있다. 수인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어 설법인을 결하였고 보살상의 가슴과 무릎에는 영락이 화려하게 걸쳐져 있다. 윗옷은 여래상의 대의大衣 같은 형태이고 왼쪽 가슴에는 내의 치레장식이 있으며 허리에는 군의裙衣를 묶은 띠 매듭이 보인다. (중략) 형식이나 양식 면에서 부석사 상과 가장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 유형의 예로는 국립전주박물관의 금동보살좌상(도 11-3)을 들 수 있다. 이 상은 여러 면에서 부석사 상과 일치하나 상투(보계)와 앞머리, 얼굴 등의 세부 조각에 조금 더 깊이가 느껴지고 체구도 균형이 잡혀 있는 편이다. 반면에 내의 치레장식은 내부에 무늬가 새겨지지 않고 장식술도 달리지 않은 모습이어서 부석사 상보다 조성시기가 약간 늦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 보살상들에서 보이는 화려한 목걸이와 영락, 얼굴과 몸에 살이 많은 풍만한 표현은 부석사 상이 조성된 해에 그려진 교토京都 호온지法恩寺 소장〈아미타여래도阿彌陀如來圖〉(1330년)(도11-4)의 보살상들과 같은 고려 14세기 전반 불화에서도 나타나고 있어, 조각과 회화라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당시 유행하던 보살상의 이미지가 잘 드러난다.
부석사 상보다 양식적으로 앞서는 현존하는 14세기 상으로는 앞 장에서 살펴본 민천사旻天寺 금동아미타불좌상(도 10-2)이 있다. 이 상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충선왕 5년(1313)에 조성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민천사 상의 왼편 가슴에 조각된 눈에 띄게 커다란 내의 치레장식은 부석사 상의 다소 정형화된 내의장식보다 이른 표현이다. 민천사 상에서처럼 이목구비가 얼굴 중앙에 몰려 있는 방형의 얼굴과 둥근 육계는 네즈미술관根津美術館의 대덕 10년명〈아미타여래도〉(1306년)(도 10-10)에도 나타나는데, 이와 같이 풍만해진 방형의 얼굴이 점차 정형화되면서 부석사 상이나 국립중앙박물관의 지순명 금동 관음・대세지보살입상으로 이행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제11장 중생구원의 이미지:14세기의 금동보살상’ 중에서
이 상들을 통하여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불교가 당시 사회의 상류층에서 기층민에 이르기까지 신분과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고려시대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었던 정신적인 지주였고 구심점이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이르거나 정토왕생을 갈구하던 고려시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불상의 조성은 유력한 지배층 인물들은 물론이고 일반 평민들까지 참여하는 거룩한 행사였기 때문이다.
고려사회에 일었던 조상봉불造像奉佛의 열렬한 움직임에 대해 당시 사회의 일각에서는 부정적인 시각도 없지 않았을 터인데, 이규보李奎報가 그의 문집에서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의 장륙의 비로자나불상과 문수·보현보살상의 삼존상(1223년 이전)을 새로 조성한 승려 학주學珠의 불사에 대해서 소개한 내용은 고려후기 불교계의 정서를 잘 말해준다. (중략) 보현사 삼존상의 조성은 일부 불교도들이 아닌 사회 전반의 여러 계층의 주목을 받는 불사였던 것이 확실하다. 이 불사에 대해 이규보가 학주와 나눈 이야기에서 당시 승려가 생각하는 불상조성의 의미를 엿볼 수 있다.
“대저 심법心法으로 본다면 곧바로 그 정상頂上을 밟으려고 해야 할 터인데, 자네는 바야흐로 그 상을 만들고 있으니, 그 견성見性에 있어서 또한 멀지 않겠는가?” 하였더니, 대사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세속과 인정의 야박함이 매우 심한데, 어찌 사람마다 모두 곧바로 깨닫는 뜻을 알게 할 수 있겠는가? 무릇 인정이란 환경을 대함으로써 생각을 일으키고 생각으로 말미암아 인연을 얻은 다음에 참된 도道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네. 내가 이 상을 만드는 것은 대개 사람들을 진여眞如에 돌아가게 하고, 경불敬佛하게 하려는 것이네.” 하므로, 나는 비로소 그 말을 옳다고 하였다.
당대의 지식인을 대표하는 이규보가 그의 기문記文에서 거짓 없고 성실하다고 극구 칭송한 학주대사의 대답이야말로 곧 당시 불교도들이 갖고 있던 불교조각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에필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