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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36. 이승엽

나. 36. 이승엽

이승엽 (지은이)
  |  
김영사
2018-04-04
  |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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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36. 이승엽

책 정보

· 제목 : 나. 36. 이승엽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명사에세이 > 기타 명사에세이
· ISBN : 9788934993780
· 쪽수 : 300쪽

책 소개

우리 시대 국민타자, 홈런왕 이승엽의 에세이. 지금까지 우리가 알지 못했던 그의 숨은 노력과 고통, 수많은 선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지금 그를 만든 태도와 사람, 두려움과 고난들을 이겨온 시간들을 정리했다.

목차

1장. 나는 이승엽
야구와의 첫 만남
기회는 생각지 못한 곳에서 온다
똥엽이의 고집
내뜻대로만 살 수 없다
마음으로 치고 머리로 뛴다
오늘도 달린다
지름길은 없다
다시 되찾고 싶은 것

2장. 가족의 힘
언제나 내가 더 미안하고 사랑한다
아낌없이 주고 간 어머니
이정표를 세워주신 아버지
어린 신부
아빠 반성문
다른 아버지가 되고싶다

3장. 나의 가장 강력한 무기
진정한 노력은 배반하지 않는다
나의 유일한 무기는 노력
야구는 나이로 하는 게 아니다
경산 볼파크의 별이 빛나는 밤
실패의 시작은 만족의 순간
칠 수 없으면 치게 한다
4장. 나를 믿는다
라팍에 가장 먼저 출근하기
내가 나를 믿지 못했던 순간
홈런을 치고도 고개를 숙인다
교과서에 나오다
나보다 훨씬 잘 나갈 후배들

5장. 후회 없는 선택
대학이냐, 프로냐?
투수에서 타자로 다시 태어나다
이상과 현실 그 사이에서
메이저리그에 왜 안 갔어요?
두번째 메이저리그 프러포즈
왜 아빠는 안보여?
불행의 끝

6장. 내 이름을 걸고
난 대한민국 대표다
밖에서 보는 마음
8회의 사나이
이제는 말할 수 있다

7장. 최고의 당신!
최고라고 믿게 해준 백인천 감독님
더 나은 길을 찾아준 박흥식 코치님
투지를 키워준 김성근 감독님
오! 나의 고마운 스승님
스윙이나 한 번 더! 요시히코 코치님
야구인의 자세를 새로 배운 요미우리 자이언츠
정신 번쩍! 라이벌
좋은 지도자란?

8장. 이승엽만 아는 이승엽
그만두고 싶었다
나와의 싸움
한국 야구와 일본 야구
혼자가 아니다
교과서에 나오다
36번의 비밀

9장. 리스타트
아름다운 이별
마지막 마음
행복한 날
나만의 길을 만들어 달린다
희망의 이름으로

보너스. 이승엽의 야구 수업
7할의 실패, 3할의 성공
시작은 기 싸움부터
타격 준비
볼 배합 전쟁과 기본
4할 타자와 대척점
홈런을 치는 방법
가상의 상대 - 양현종

이 책을 마치며

저자소개

이승엽 (감수)    정보 더보기
1976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녀석 고집 참 세다'는 이야기를 숱하게 들으면서 자라왔다. 한 번 하기로 마음 먹으면 무조건 해야 직성이 풀리는. 중앙초등학교에서 야구를 시작했고 경상중과 경북고를 거쳐 1995년 프로 무대를 처음 밟았다. 데뷔 3년 만에 정규 시즌 MVP에 오른 뒤 1999, 2001, 2002, 2003년 통산 5차례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았다. 홈런 하면 이승엽이라는 이름이 떠오를 만큼 홈런 타자로서 이름 석 자를 제대로 알렸다. 2004년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 야구로 범위를 넓혔다. 희로애락을 모두 경험하면서 한 단계 성숙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2012년 삼성에 복귀한 뒤 3차례 통합 우승의 기쁨을 만끽했다. 프로 선수로서 이례적으로 은퇴 시점을 예고했고 KBO리그 최초 은퇴 투어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야구 인생 2막을 시작한 이승엽은 KBO 홍보대사, 이승엽 야구장학재단 등 왕성한 활동을 전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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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그냥 어릴 때부터 공 던지고 치는 게 좋아서 친구들 모아놓고 나무 막대기 놓고 고무 공으로 맞추며 놀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왜 그렇게 좋았고, 무엇이 나를 야구의 매력으로 이끌었는지 정확한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그저 동그란 공이 좋았던 것 같기도 하고, 그 조그만 공을 내 마음대로 던질 수 있는 게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운명이란 말을 이럴 때 하는 게 아닐까? 정확히 나는 그것이 야구인지도 몰랐다. 7살 때 생긴 프로 야구를 보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야구라고 부르는 구나!’라는 걸 알았고, 매일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을 불러 당당하게 야구하자고 꼬셨다. 지금처럼 학원이나 사교육이 극성일 때도 아니고 서울 아닌 지방이라서 그렇게 부모님들의 학구열이 높지도 않았던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책가방도 바닥에 팽겨치고 동네에서 친구들과 야구라고 부르기도 뭣한 운동을 하고 매일 옷은 흙과 땀으로 범벅이 된 채로 집에 갔다.

만약 지금 운동선수가 되길 꿈꾸는 어린이의 부모님이 계시다면 말씀전하고 싶다. 돈 많이 버는 프로야구 선수로 키우겠다고 생각하시면 그 아이는 행복할 수 없다. 그 아이가 평생 행복한 운동선수로 커가려면 운동이 즐거워야 하고, 운동을 계속 하고 싶어야 한다. 타고난 실력이 있어도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는 질 수밖에 없고, 열심히만 해도 안 된다, 즐기는 사람에게는 이길 수 없다. 내가 야구를 계속 할 수 있던 비결은 이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난 야구할 때 가장 좋고 행복하다.
“아버지! 저 야구 선수 됐어요”
신발은 마당에 휙휙 날려버리고 안방으로 뛰어 들어가며 내가 한 말이다. 내 마음 속에서 가장 바라던 말이어서 감독님의 권유 한 마디에 벌써 난 마운드 위에 서 있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었다. 한 번 해야 한다고 마음먹으면 무조건 해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야구가 하고 싶다고 부모님을 무조건 졸랐다. 하지만 부모님은 내가 생각한 것과 강경하게 반대하셨다. 그저 막내 아들이 어른들의 충동질에 허파에 바람 잔뜩 들어 투정 부린다고 생각하셨다. 집안에 운동선수로 대성한 사람도 없었고, 그 당시 운동선수는 가정형편 어려운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는 편견도 심했다. 그렇다 보니 부모님의 걱정은 끝이 없었다.
여기서 내 고집은 끝나지 않았다. 가장 나의 큰 고집으로 유명한 한양대와 삼성 프로 입단 사이의 일이다. 참 많이 알려진대로 나는 삼성에 입단하기를 바랐지만, 아버지는 한양대 입학을 강력하게 추천하셨다. 정말 어렵게 어렵게 삼성의 입단이 결정되었다. 지금껏 내가 한 선택의 99%는 스스로 내린 결정이다. 어른들 눈에는 똥고집이라고 보였던 것들도 그때 내게는 절실하게 포기할 수 없는 나의 의지였고, 내 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후회가 없다. 부모님이 반대한다고 야구를 하지 않았다면 착한 아들이 될 수는 있었겠지만 야구 하는 걸 허락하지 않은 부모님을 평생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감독님의 좋은 인상과 나를 위해준 소소한 마음들이 내 인생을 움직였다.
나는 그전까지 메이저리그가 아니면 삼성에 남겠다고 했다. 그만큼 메이저리그에 갈 자신이 있었고 일본 진출은 전혀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래서 당시 김재하 단장님은 내가 메이저리그 또는 삼성 둘 중 하나를 택할 것이라 믿으셨고 윗선에 다 그렇게 보고하셨다. 하긴 내 주변과 정작 본인인 나도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내 진로가 일본 진출로 급선회하면서 김재하 단장님께서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다. 그래서 아직도 죄송한 마음이 크다. 메이저리그에서 뛰지 못한 이유는 단순했다. 에이전트와 내가 생각했던 기대치와 메이저리그에서의 평가는 다소 엇갈려서 조건이 너무도 안 맞았다. 나는 그 평가가 잘못되었고 당신들이 실수한 것을 증명해내고 싶었다. 마침 일본에서 입단 제안이 왔기에 일본 야구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일본에서 타자로 성공하는 게 쉽지 않다는 이유로 만류하기도 했다.
한국에 있을 때도 멘탈의 중요성은 어느 정도 느꼈는데 온전히 내 마음대로 내 실력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때에 따라 욕심을 내려놓고 팀을 위해 희생 플라이도 날려야 하고, 장타를 치고 싶어도 사인에 따라 번트를 대기도 해야 한다. 그리고 기회가 오면 반드시 잡아야 한다. 수비 실수를 하면 다음 공격에서도 위축되기 마련이고, 우리 팀에서 9점을 낸다고 하더라도 상대팀에게 10점을 내주면 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기는 경기는 계속 이기도록 지켜나갈 힘을 키워야 하고, 지고 있으면 포기하지 않고 이길 수 있다는 마음으로 계속 나를 믿어야 한다.
아내에게도 미안하다. 아내는 스무 한 살 어린 나이에 나와 결혼했다. 재능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을 텐데 운동선수의 아내로 살면서 많은 것을 포기했다. 그래도 힘든 티 안 내고 잘 버텨준 덕에 맘 편히 야구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아내가 힘들어 하거나 아쉬운 내색을 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아이들 교육도 다 맡겨 놓아서 미안한 마음이 더 크다. 난 아이들에게 그저 좋은 아빠 노릇만 한다. 인상 쓰고 혼내는 일은 모두 아내의 몫이다.
사랑하는 두 아들에게도 참 고맙고 미안하다. 만인이 알아보는 사람의 아들로 피곤하고 말 못할 고민도 많았을 텐데 티 안내고 씩씩하게 잘 커줘서 정말 고맙다. 야구 경기의 결과에 따라 집안 분위기도 달라지고 모두 아빠의 스케줄대로 움직여야 했는데 불평 한 마디 안하고 늘 ’아빠가 최고!“ 라고 말해주는 아이들이 정말 최고의 내 아이들이다. 은퇴하면서 한 가지 약속한 것이 있다.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겠다는 것이다.
가장 큰 패인은 그에게 진 것이 아니다. 토끼와 거북이 경주처럼 내가 자만했던 것이고, 누군가를 의식하고 연습을 하거나 경기에 나가면 안되었는데 내 머릿속에는 우즈가 가득 차 있었다. 우즈가 다음 해에도 잘하라는 법은 없지만 내 마음 가짐을 바꿔야 했다. 제 2, 제 2의 우즈가 나타나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 일을 계기로 또 다른 누군가가 나를 넘을 수 있기에 절대 만족해선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시즌이 끝난 뒤 절치부심의 각오로 1999년 시즌을 준비했고 54홈런을 기록하며 생애 두 번째 홈런왕에 등극했다.
야구장에 일찍 가면 마음이 편안하고 여유가 생겼다. 그러나 처음부터 모범생은 아니었다. 일본 무대에 진출하기 전까지는 아슬아슬 대장이었다. 선수단 미팅 시간이 오후 3시 30분이었는데 10분 전에 도착할 정도였다. 하지만 삼성 복귀 이후 야구장에 가는 게 너무 좋아서 단 한 번도 지각하지 않았다. 야구장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하는 게 용품 정리였다. 배트, 장갑, 글러브, 헬멧, 스파이크 등 야구 용품은 내 분신과도 같다. 군인에게 총기 손질이 아주 중요하듯 야구 선수도 야구 용품을 손질하는 일은 중요하다. 매일 닦고 하나하나 세세히 살펴봤다. 일본 무대에서 뛰면서 몸에 배인 습관이기도 했다.
그러다 타석에 들어섰는데 초구, 2구가 파울과 스트라이크로 들어왔다. 타자는 투 스트라이크가 되면 90% 이상은 진다. 정말 끝났다고 생각했다. 왜 하필 올림픽에서 이런 일을 겪게 된 걸까. 이런 생각을 하다 죽더라도 혼자 죽자고 마음 먹었다. 내가 스윙을 돌려보고 스스로 납득이 가도록 자신 있게 돌려보자고 생각했다. ‘제발 한 번만’ 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공을 쳤는데 느낌이 달랐다. 스윙이 딱 된 거였다. 그 전까지 쳤던 스윙들이랑은 확실히 달랐다. 갑자기 자신감이 붙으며 그렇게 꿈 꿨던 기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구가 담장을 넘어가는 걸 확인하고 나서 나도 모르게 두 팔을 번쩍 들었다. 8회 1사 1루 2 대 2 상황에서 일본 대표팀의 좌완 이와세 히토키를 상대로 오른쪽 펜스를 넘기는 2점 홈런을 때려낸 것이다. 그동안 내 어깨를 짓눌렀던 부담감과 아쉬움을 말끔히 떨쳐내는 순간이었다.
야구에 만약이란 건 없지만 가끔 '프로에서 타자 대신 투수로 뛰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질문을 받는다. 나도 궁금하다. 아마도 1,2군을 오가면서 중간 계투로 뛰다가 일찍 은퇴하지 않았을까 싶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있다. 투수로서 성공의 꽃을 피우지 못한 책임이 내게도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혹사 여파로 팔꿈치 상태가 악화됐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깁스를 푼 뒤 재활 치료를 제대로 하지 못해 팔이 제대로 펴지지 않아 뼛조각이 생겼다고 한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경기가 있는 날에는 진통제를 먹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통증을 이겨낼 수 없었다.
2003년 12월 11일. 서울 모 호텔에서 기자 회견이 열렸다. 수많은 취재진이 내 앞에 있었다. 아시아 홈런 신기록을 세웠을 때도 이정도의 열기는 아니었다. 평소와는 달리 유독 많이 긴장했다. 나는 가슴 속에 품어놓은 미리 준비한 A4 용지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9년간 아들처럼 키워주신 삼성…" 그러는데 나도 모르게 울컥하기 시작했다. 기자 회견장 뒤편에 있던 구단 직원들과 눈이 마주쳤다.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1995년 입단 첫해부터 그때까지의 수많은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나를 금지옥엽처럼 대해주신 분들에 대한 고마움과 이별을 앞둔 아쉬움이 교차했다. 구단 직원들은 “네 선택은 틀린 적이 없었다. 계속 함께 하면 좋겠지만 네 선택을 존중한다. 삼성에서 했던 것처럼 일본 무대에서도 잘 해주길 바란다”는 덕담으로 자리를 마무리해주셨고 난 고개 숙여 감사의 마음으로 건네받았다.
요미우리 2군 시절은 내 야구 인생에서 가장 쓰디쓴 약같은 시간이다. 삼성에서 9년간 뛰면서 단 한 번도 2군으로 강등된 적이 없었기에 그 충격은 더욱 컸다. 2006년 정규 시즌 개막전부터 4번 타자로 뛸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라 다쓰노리 감독님과의 관계도 언제부터인가 멀어져 갔다. 2010년까지 2년간 불편한 동거가 이어졌다. 모든 건 내 탓이었다. 프로 선수는 성적으로 보여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끝 모를 부진 속에 2군에 머무르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삶의 활력소 같은 건 없었다. 하루하루가 무기력의 연속이었다. 야구하면서 그런 적은 처음이었다. 어느날 큰 아들 은혁이가 “아빠 친구들은 경기하고 있는데 왜 아빠는 집에 있느냐”고 물었을때 가슴이 아팠다. 가장으로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가족에게 미안했다. 몸과 마음 모두 지쳐갔다. 일본 생활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 시작하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커졌다. 이른바 향수병이었다.
한국 복귀 소식이 전해진 뒤 삼성을 제외한 다른 구단들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았다. 조건도 파격에 가까웠다. 하지만 내겐 삼성 말곤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구는 내가 태어난 곳이고 내가 프로 입단해서 계속 뛰었던 곳이다. 많은 도움을 받았던 곳이기에 삼성만 생각했다. 삼성이 아닌 타 구단 유니폼을 입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 역시 파란 피의 사나이 아닌가. 8년 만의 삼성 복귀. 파란 유니폼을 다시 입고 대구 시민야구장 타석에 들어섰을 때의 그 짜릿함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딜 가든 “이승엽 선수 정말 잘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마음고생 많았을 텐데 고향에서 마음 편히 하시길 바랍니다”, “이 선수가 삼성 유니폼 입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는데 돌아와줘서 정말 기쁩니다”고 반겨줬다. 내가 심장이 제대로 다시 뛰기 시작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36번은 이제 영구결번이 되어 이승엽 고유 번호로 남게 되었지만 사실 36번은 내가 원했던 번호가 아니었다. 야구 첫 시작을 27번으로 시작해서 27번을 원했으나 다른 선배가 달고 있었다. 또 투수 출신이어서 최동원 선배님의 11번도 원했는데, 역시 다른 선배가 가지고 있었다. 신인 선수 가운데 가장 늦게 계약하는 바람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당시 남은 등번호는 딱 두 개 뿐이었고 그중에서 앞 번호인 36번을 고를 수 밖에 없었다. 오래 사용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1∼2년 쓰다가 바꿀 생각이었다. 하지만 2년차 데뷔 첫 3할 타율을 달성한 데 이어 3년차 정규 시즌 MVP에 등극하면서 ‘아, 36번은 내 운명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36번을 계속 쓰기로 했다. 일본 무대 진출 후 33번, 25번, 3번을 달기도 했지만 가장 애착이 가는 등번호는 당연히 36번이다.


"왜 야구 선수가 되었습니까?" 가장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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