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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예술/대중문화 > 영화/드라마 > 시나리오/시나리오작법
· ISBN : 9788936506841
· 쪽수 : 400쪽
· 출판일 : 2005-04-21
책 소개
목차
책머리에 몇 마디
제1부 희곡
수치羞恥
황진이黃眞伊
땅 밑을 흐르는 강
제2부 TV 드라마
자유로의 터널
제3부 시나리오
갈매기의 묘지墓地
단군檀君
저자소개
책속에서
기억을 더듬으면 내가 희곡 창작에 손을 대게 된 것은 저 자유당정권 말기 반독재 투쟁에 나섰다가 옥고를 치르면서 옥중에서 주로 전후(戰後) 프랑스에 풍미하고 있는 무신적(無神的) 실존주의 작가들의 작품이나 이론을 집중적으로 읽다가 나는 홀연이랄까, 감득한 것이 “인간 실존에 내재된 것은 불안이 아니라 수치심이다”라는 깨달음이었다. 특히 나는 알베르 카뮈의 희곡 <오해>를 읽고 그 등장인물의 실존 속에 결해 있는 것이 바로 수치심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세상에 나가기만 하면 나의 이 거창한(?) 사상을 이론적으로 형성하려고 별렀다. 그런데 그렇듯 내 머리에 명료히 구성되어 있던 인식과 논리가 출옥하자 차차 둔화되고 겨우 그 상념의 편편들을 형상화하여 여기에 함께 수록하는 희곡 <수치> 한 편을 완성하였다. 이렇듯 나는 시로서는 형상화할 수 없는 자신의 사물에 대한 본질적 인식이나 그 논리, 즉 사상을 구상적(具象的)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희곡이나 시나리오를 써 보기로 한 것이다. -‘책머리에 몇 마디’에서
프롤로그
캄캄한 무대에 순백(純白) 차림의 황진이의 혼령이 스스로 빛을 발하며 나타나서 관중들을 향하여 대화하듯,
혼 령 나는 황진이올시다. (말의 어미는 연기자의 자연스러운 말씨대로) 지금으로부터 450년 전 이 땅에 살던 속칭 송도 기생 명월의 혼령이올시다. 그러나 여러분! 두려워하지들은 마십시오. 혼령은 혼령이지만 흔히 전설에 나오는 피묻은 원한에 사무친 그런 악령이 아니라 불교의 말을 빌리면 왕생극락 직전, 기독교의 말을 빌리면 천당에 들기 직전, 즉 혼령이 이 세상 인업(因業)의 허물을 다 벗어 버리고 종국적 생명으로 완성되기 직전의 선한 혼령이니까요.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돌연 세상에 나타났냐구요? 그것은 구상(具常)이라는 오늘의 시인이 하도 나의 시나 삶에 애정을 갖고 때마다 추켜들고 나서기 때문에 거기에 마지막 보답을 하려구요. ……그때까지 외부 세상과의 오직 외가닥 줄이었던 아버지를 잃고 난 우리 모녀는 완전히 세상과 격리된 상태에서 3년상을 마치고 났을 때 당면한 문제는 나의 혼사였습니다. 어머니의 서두름으로 처음에는 그래도 매파가 심심찮게 들랑거렸습니다. 그러나 소위 반갓집에서들은 선을 볼 때엔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고 돌아가서는 번번이 딱지를 놓는 것이었죠. 되물어 볼 것도 없이 천첩의 소생을 양반집 체모에 며느리로 맞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올시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모든 것이 내 죄다”라고 탄식을 하시곤 했죠. 하기야 더러는 청혼이 없는 것은 아니었죠. 양반 중에서도 대감 댁에서라면서 후실이나 작은집으로 달라고요. 그러나 이 경우 나의 어머니는 펄펄 뛰시며 “내 딸에게 내 신세를 되풀이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고 또 더러는 나를 이리저리 훔쳐본 동네 총각들에게서 청혼이 들어올라치면 이 역시 어머니는 길길이 뛰시면서 “황 진사의 딸을 상것〔常人〕에게 줄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나의 출생과 그 성장기에서 맛본 모멸적 환경이 나로 하여금 일찍이 인간의 계급적 신분에 대한 모순과 남자 중심의 사회규범에 대한 부조리에 심각한 회의와 반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나 할까요. 바로 이 무렵 그 운명의 상여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제1부 희곡, ‘황진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