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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한국 근대사

(1863~1910)

이계형 (지은이)
청아출판사
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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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한국 근대사 (1863~1910)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근현대사 > 근대개화기
· ISBN : 9788936811228
· 쪽수 : 456쪽
· 출판일 : 2018-02-08

책 소개

올바른 역사 인식으로 보는 한국 근대사. 통상적으로 한국 근대사라고 하면 개항 이후부터 1945년 8월 일제로부터 해방될 때까지를 이른다. 그러나 <한국 근대사>에서는 그 시기를 좀 더 압축해서 1863년 고종의 즉위와 흥선대원군의 집권부터 1910년 경술국치까지 다룬다.

목차

서문

제1장 흥선대원군의 개혁 정치와 쇄국 정책
1. 19세기 국내외 상황
19세기 국외 상황 - 아편 전쟁과 중화주의 붕괴 | 일본의 대응 | 조선의 대응
19세기 전반 국내 상황
2. 고종 즉위와 흥선대원군의 개혁 정치
흥선대원군 이하응
고종 즉위
흥선대원군의 개혁 정치 - 인사 개혁과 국가 기구 정비 | 경복궁 중건 | 서원 철폐 | 삼정 개혁
쇄국 정책 실시 - 병인박해 | 병인양요 | 오페르트의 남연군 묘 도굴 | 제너럴셔먼호 소각 사건 | 신미양요 발발 | 척화비 건립
흥선대원군의 하야

제2장 근대 국가 체제로의 전환과 갈등
1. 고종의 친정 체제 구축과 개항
고종의 친정 - 친정 체제 구축 | 운요호 사건
조일 수호 조규 체결
2. 수신사 파견
수신사 파견 - 제1차 수신사 | 제2차 수신사와《사의조선책략》
개화 물결과 보수 유림의 반대
3. 통리기무아문 설치와 개화 정책 추진
신사유람단 파견
영선사 파견과 기기국 창설
별기군 창설
4. 서구 열강과의 조약 체결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체결
조영, 조독 수호 통상 조약 체결
조러 수호 통상 조약 체결 - 영국의 거문도 점령
조불 조약 체결과 선교 자유 문제
5. 근대 교육의 첫걸음과 근대 문명 수용
최초의 근대 학교 원산 학사
동문학 설립
육영공원 설립
개신교 학교 설립 - 배재 학당 | 이화 학당 | 언더우드 학당
<한성순보>, <한성주보> 창간
광혜원, 근대 병원의 탄생
6. 수구파와 개화파의 갈등
임오군란 - 구식 군인의 반발 | 일본 공사관 습격 | 민씨 척족 처단
흥선대원군의 제1차 재집권
청 군대의 파병과 흥선대원군의 실각
제물포 조약 체결 - 민비의 피난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 체결과 국내 상권의 붕괴
청의 간섭
제3차 수신사 박영효 파견
7. 개화파 간의 갈등, 갑신정변
개화파의 대두 - 미국으로 외교 사절 파견
개화파의 갈등과 분화
급진 개화파의 갑신정변 준비
3일 정권 수립 - 14개조 혁신 정강 공포
한성 조약과 톈진 조약 체결 - 한성 조약 | 톈진 조약

제3장 근대 국민 국가 수립 운동
1. 동학 농민 운동과 청일 전쟁
제1차 동학 농민 운동 - 개항 이후 조선 사회, 경제 상황의 변화 | 교조 신원 운동의 전개 | 고부 민란과 제1차 동학 농민 운동
청일 전쟁의 발발
제2차 동학 농민 운동
2. 갑오개혁
제1차 갑오개혁 - 교정청 설치 | 군국기무처 개혁
제2차 갑오개혁
제3차 갑오개혁, 을미개혁
3. 을미사변과 을미 의병
을미사변 - 춘생문 사건
단발령 시행
을미 의병 - 경기, 강원도 일대 | 충청도 일대 | 경상도 일대 | 호남 일대 | 북한 지역
을미 의병의 역사적 의의와 성격
4. 아관파천과 각국의 이권 침탈
아관파천
러시아와 일본의 비밀 협상
구미 열강의 이권 침탈
일본의 이권 침탈
5. 독립 협회
서재필의 귀국과 <독립신문> 창간
독립 협회 결성과 독립문 건립
토론회 개최와 반러 운동
만민 공동회 개최
독립 협회 지회 설립
의회 설립 운동과 해체
6. 대한 제국 성립
대한 제국 선포 - 고종의 환궁 | 대한 제국 성립
황제권 강화와 광무개혁 - <대한국 국제> 제정과 황제권 강화 | 원수부 창설과 군사력 강화 | 열강의 철도 부설권 쟁탈 | 식산흥업 정책과 황실 재정 확충 | 통신, 교통 시설의 확충 | 서울의 명물, 전차 | 양전 사업 실시 | 서울의 도시 정비 사업 | 애국가 제정 | 그 외 개혁들
광무개혁의 역사적 의미와 한계

제4장 통감부의 국권 유린과 구국 운동
1. 을사늑약 체결과 반대 투쟁
러일 전쟁 발발과 <한일 의정서> 체결
일제의 한국 ‘보호국화’ 추진
을사늑약 체결
외교적 저항
잇따른 자결 순국
의열 투쟁
을사 의병 봉기
2. 통감부 설치와 반식민 통치
통감부 설치
통감부의 반식민 통치
3. 대한 제국 멸망
헤이그 특사 파견
고종 황제의 퇴위와 시민들의 저항
정미 7조약 - 일방적인 조약 체결 | 군대 해산
경술국치, 대한 제국의 멸망
4. 구국 운동 전개
의병 운동 - 중기 의병 | 후기 의병 | 연합 의병 부대 결성과 서울 진공 작전 | 일제의 남한 폭도 대토벌 작전 | 전환기 의병 활동 | 의병의 독립군 전환
계몽 운동 - 계몽 운동의 사상적 기반 | 정치 단체, 학회의 결성과 활동 | 신민회 결성 | 사립 학교 설립 운동 | 언론, 출판 운동 | 국채 보상 운동 | 국학 운동 | 국문학 연구 | 역사학 연구 | 민족 종교 운동
의열 투쟁 - 장인환과 전명운의 일제 고문관 스티븐스 처단 | 안중근의 이토 처단 | 이재명의 이완용 처단 시도

그림 출처

저자소개

이계형 (지은이)    정보 더보기
국민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문학박사)를 받았다. 국민대학교, 중앙대학교, 가천대학교 등에서 강의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조사규명위원회·대한민국역사박물관건립추진단 전문위원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숫자조선연구, 식민지 조선인의 삶》(2014), 《한국 근대사》(2018), 《최현배(우리 말글을 목숨처럼 지킨)》(2019), 《한 줄로 읽는 한국근대사 연표 1863~1945》(2020), 《한말 ‘한일조약’ 체결의 불법성과 원천무효》(2021), 《끝내지 못한 독립운동가 이야기, 최명식 회고록》(2022), 《해방 후 김구의 백범일지》(202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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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국정을 직접 챙기게 된 고종은 흥선대원군 시기에 활동했던 인물들을 내치고 자기 측근 인물들로 자리를 채워 나갔다. 왕위에 오른 지 10년 만이었다. 먼저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을 영의정으로, 박규수(朴珪壽, 1807~1877)를 우의정으로 임명했다. 이유원은 함경도 관찰사를 거쳐 고종이 즉위하면서 좌의정에 올랐으나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수원 유수로 좌천되었고 경기도 화도읍 가오곡 향리에서 은거하고 있다가 고종의 부름을 받았다. 박규수는 영조, 정조 시기에 실학자로 이름을 날렸던 박지원의 손자로 제너럴셔먼호 사건 때 평안도 관찰사로 활약했으며, 당시 해외 사정에 가장 밝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었다.
다음으로 흥선대원군을 하야시키는 데 공이 큰 인물들을 중요한 자리에 앉혔다. 민씨 척족 중에서 민규호(閔奎鎬, 1836~1878)를 이조 참판에, 조 대비의 조카인 조영하(趙寧夏, 1845~1884)를 금위대장에 발탁했다. 이외에 민씨들을 이조, 호조, 병조 등 주요 보직에 임명했다. 또한 흥선대원군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자들도 등용했다. 심지어는 흥선대원군의 친형 이최응(李最應, 1815~1882)과 맏아들 이재면(李載冕, 1845~1912)까지 불러들였다. 이로써 고종 주변에는 그의 측근과 민씨 척족 세력들이 권력을 장악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정치를 펼쳐 나가기 시작했다.
먼저 고종은 흥선대원군이 추진했던 여러 개혁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고종 자신이 친정하는 데 공이 큰 최익현을 비롯한 유림의 요구이기도 했다. 고종은 흥선대원군이 부족한 국가 재정에 충당하고자 마구 거둬들인 세금 제도를 없애 백성의 부담을 줄여 주는가 하면, 대규모 토목 공사를 중단했다. 이런 가운데 청 화폐의 사용을 갑자기 금지시키는 바람에 유통에 큰 혼란이 일었으며, 국가 재정 또한 파탄 날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 청 화폐는 서울이나 지방 관청 등에서 쌓아 놓고 사용하고 있던 반면, 호조에서 보유하고 있던 상평통보는 고작 800여 냥에 불과하여 이를 유통시키는 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고종은 유림들의 건의에 따라 화양동 만동묘를 부활시켰지만, 철폐된 서원의 복설 요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종은 유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일 외교의 개선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한편 1868년, 일본은 조선 정부에 왕정복고를 통고하며, 양국의 국교 회복을 청하는 사신을 보내왔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외교 문서인 서계(書契)의 격식이 예전과 다르고, 일본 도서(圖書)도 조선 정부가 새긴 것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접견조차 거부했다. 당시 일본은 200여 년간 지속되어 온 쇄국 정책을 버리고 1854년 미국에 개항했고, 이어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 등 여러 나라 문호를 열어 정식으로 교류했다. 1868년에 이르러서는 무신 정권인 막부가 무너지면서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국가를 만들고 메이지 유신을 단행했다. 메이지 정부는 서양을 모방한 근대화 정책을 잇달아 추진했다. 이를 위해 외국인 교사를 적극 고용하고 서구에 유학생들을 파견했으며, 특히 이와쿠라 사절단에게 1년 10개월 동안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12개국을 돌며 정치, 경제, 사회 상황 등을 시찰하게 했다. 이들에 의해 일본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이렇듯 일본이 근대화로 성큼 나아갈 때, 조선은 여전히 쇄국 정책을 고집하며 일본과 전통적인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 흥선대원군 집권 당시 서계 문제로 불거진 조선과 일본 간 외교 문제는 양측 입장이 완강해 1년 동안 해결될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일본 정부는 조선 외교를 전담해 온 쓰시마 도주 소씨[宗氏]로부터 그 직임을 회수하고, 직접 이를 해결하고자 1869년과 1870년에 외무성 관리를 파견했다. 하지만 조선의 완강한 거부에 부닥쳐 타결을 보지 못했다. 이에 1872년 외무대신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가 전면에 나서 군함을 이끌고 부산에 들어왔지만, 조선은 일본 사신이 군함을 타고 왔기 때문에 상대해 줄 수 없다며 적극 나서지 않았다. 그는 결국 수개월 동안 체류하다가 빈손으로 돌아갔다. 이렇듯 번번이 거절을 당한 일본 내에서는 정한론이 등장했고, 금방이라도 조선을 공격할 기세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대일 정책에 대한 인식도 변하기 시작했다. 일본과 분쟁을 일으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어느 정도 타협할 수 있다는 입장으로 선회한 것이다. 이에 조선은 일본과 외교 협상에 들어갔지만, 여전히 배외 사상을 견지하던 조선 관리들이 협상을 결렬시켰다. 일본 또한 무력으로 자기들의 생각을 관철시키려 했기 때문에 협상에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지 않았다. 이러한 일본의 저의는 운요호 사건으로 드러났다.
_ <제2장 근대 국가 체제로의 전환과 갈등> 중 <고종의 친정_ 친정 체제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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