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영미소설
· ISBN : 9788937463785
· 쪽수 : 484쪽
· 출판일 : 2021-06-30
책 소개
목차
핏빛 자오선 11
작품 해설 467
작가 연보 471
리뷰
책속에서
하느님께서 인류의 타락을 막으려 하셨다면 벌써 막지 않았을까? 늑대는 열등한 늑대를 스스로 도태시키네. 다른 동물은 또 어떤가? 한데 인류는 예전보다 더욱더 탐욕스럽지 않은가? 본디 세상은 싹이 트고 꽃이 피면 시들어 죽게 마련이야. 하지만 인간은 쇠락이라는 것을 모르지. 인간은 한밤중에도 정오의 한낮이라는 깃발을 올리네. 인간의 영혼은 성취의 정점에서 고갈되지. 인간의 정오가 일단 어두워지면 이제 낮은 어둠으로 바뀌네. 인간이 게임을 좋아한다고? 그래, 맘껏 도박하게 해. 여기를 보라고. 야만인 부족이 폐허를 보고 경탄하는 일이 미래에는 또 없을 것 같나? 전혀, 있고말고. 다른 사람들과 다른 후손들이 그런 일을 겪겠지.
머리 가죽을 돌바닥에 늘어놓는 동안 구경꾼 수백 명이 몰려들었다. 머스킷 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군중을 밀어내고, 젊은 아가씨들은 커다란 검은 눈으로 미국인을 응시하고, 남자아이들은 소름 끼치는 전리품을 만져 보고 싶어 열심히 기어들었다. 모두 128개의 머리 가죽과 여덟 개의 머리가 있었다. 주지사의 부관과 수행원들이 마당으로 나와 그들을 환영하고 전리품에 감탄했다. 그날 저녁 리들앤스티븐스 호텔에서 열릴 축하연에서 수고비를 전부 황금으로 지불하겠다는 약속에 용병들은 환호성을 내지르고는 다시 말에 올랐다. 검은 스카프를 두른 할머니들이 달려와 그들의 악취 나는 셔츠 자락에 키스를 하고는, 볕에 탄 자그마한 손을 올려 그들을 축복했다. 용병들은 수척한 말 머리를 돌려 열광하는 군중 틈을 비집고 거리로 나왔다.
판사는 숙영지 주변의 검은 숲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수집한 표본을 향해 고갯짓했다. 이 이름 없는 것들은 이 세상에 하등 무용한 것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아주 작은 부스러기 하나가 우리를 삼켜 버릴 수도 있다네. 인간이 알지 못한 채 이 바위 아래 숨어 있는 아주 작은 존재가 말이야. 오직 자연만이 인간을 사로잡을 수 있는 만큼, 그 마지막 존재를 인간이 오롯이 드러낸다면 인간은 이 지구의 종주가 되는 거네.
종주가 뭔데요?
주인 말일세. 혹은 군주라고도 하지.
그러면 처음부터 쉽게 주인이라고 말을 하지.
그냥 주인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주인이거든. 종주는 심지어 다른 제후도 다스리지. 종주의 권위는 지방 법원의 판결도 취소시킬 수 있어.
토드빈은 침을 뱉었다.
판사가 두 손을 땅에 뻗었다. 그리고 질문한 자를 바라보았다. 이곳은 나의 땅이네. 하지만 이 땅 위에는 어디에나 자치적으로 살아가는 생명이 있지. 자치적으로 말이야. 이 땅을 내 것으로 삼기 위해서는 나의 허락 없이 아무것도 일어나지 못하게 해야 해.
토드빈은 발을 엇갈려 앉아 있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그가 말했다.
판사가 거대한 머리를 갸웃했다. 세상의 비밀을 영원히 풀 수 없다고 믿는 자는 두려움과 신비 속에서 살아가지. 결국 미신에 질질 끌려 다녀. 인생에 대한 통제력은 빗방울에 모두 침식당하고서 말이야. 하지만 태피스트리에서 이치(理致)의 실을 뽑아내기로 결심한 사람은 그 결심만으로도 세상을 다스리게 되고, 그로 인해 자신의 운명조차 바꾸어 놓는다네.
그게 새를 잡는 거랑 대관절 무슨 상관이죠?
새의 자유는 곧 나의 모독이지. 새는 모조리 동물원에 가둬 놓아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