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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37486333
· 쪽수 : 204쪽
· 출판일 : 2012-12-28
책 소개
목차
1부
2부
3부
작가의 말
작품 해설
한여름 밤 잔혹 로맨스_ 강지희(문학평론가)
저자소개
책속에서
“사실 아이는 어린 천사였어. 남자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 주려다가 신의 노여움을 샀지. 천사는 날개를 잃고 지상으로 추락했어. 세상살이의 힘겨움을 뼛속 깊이 느껴야 했지. 하지만 가장 견디기 어려운 건 자신이 누구인지 밝힐 수 없다는 거였어. 말하는 순간 소멸될 거라는 신의 저주를 받았거든.”
“그럼 죽고 싶으면 자기 정체를 밝히면 되겠네.”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아무튼 자기 정체를 밝힐 수 없는 천사와 무명 드라마 작가는 지금도 같이 살고 있어.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는 나도 몰라. 현재진행형이니까.”
달의 노트에 적힌 반 페이지짜리 미완성 시놉시스에 내 상상력을 더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만약 내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그는 두 번째 작품 「새로운 천사」를 구상하지 못했을 거다. 이 작품이 드라마로 방영될 때쯤 나와 달은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네가 하도 안 와서, 인어 공주처럼 물방울이 돼 버린 줄 알았어.”
“너는 고양이가 아니야.”
내가 한 말임에도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성대 부근을 어루만지는 손끝이 떨렸다.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낯선 두 다리는 유년기 아이의 것처럼 가늘고 짧았다. 서른세 살의 여배우가 사라진 바로 그 순간, 아이로 변한 내가 세상에 재등장한 것이다. 나는 분홍색 티셔츠와 파란 반바지를 입고 공원에 서 있었다. 감각과 이성이 거의 동시에 마비된 듯 멍하니 말이다. 겨우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어 봤는데 지갑, 열쇠, 휴대전화가 없었다.
“너는 뭐야? 왜 내가 이렇게 변한 거지?”
“경고를 어겼으니까. 하지만 이런 부작용이 나타날 줄은 몰랐어. 우리는 서로 대화를 하고 있지만 나는 인간처럼 ‘나’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하지만 이 순간부터는 주인의 인격을 대표해서 ‘나’라는 호칭을 쓰도록 하지. ‘나’는 인간의 마음을 관리하고 있어. 모양은 비록 고양이처럼 보이지만 현실 세계 고양이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야. 마음을 관리할 때는 내 모습이 보이지 않아. 하지만 현실 세계로 빠져나오면 내 형상이 보이지.”
“내 모습이 어디로 사라졌느냐고!”
“지금 그 모습도 원흉은 원흉이야. 아무튼 나는 당장 가 봐야 해. 주인의 마음이 혼란스러워질지 알 수 없으니까. 우리는 곧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수지?”
그러더니 여자의 이름을 말했다. 「달의 마지막 연인」 여주인공의 이름. 그런데 진짜 수지가 있었구나. 달은 여자의 질문에 수줍은 소년처럼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여자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내 귓속으로 잡음처럼 들어왔다. 밖, 잠깐, 얼굴. 따위 말이 들린 걸 보면 여자는 잠깐 밖에서 얼굴이나 보자고 말한 것 같았다.
“오늘 밤은 곤란해. 아, 우리 고양이는 내가 없으면 잠을 못 자.”
나의 온 신경은 달의 목소리에 닿아 있었다.
“우울증에 걸렸거든. 내가 옆에 있어 줘야 해.”
“방금 전화한 여자가 수지야?”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켜 고양이 발톱처럼 작지만 날카로운 목소리로 달의 하얀 뒷목을 긁었다. 달은 내 쪽은 보지도 않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달에게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 준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다른 수지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너무 부끄러워 숨어 버리고 싶었다.
“그럼 우울증 걸린 고양이가 나구나. 하긴 나는 이 방에 사는 애완동물 같아. 하지만 모르는 여자한테 나를 그런 식으로 소개하지 마. 지금이라도 그 여자를 만나러 가. 내 핑계 대지 말고.”
“수지.”
달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는 모른다.
“난 수지가 아니야!”
나를, 아니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불렀을 때 내가 소리를 질렀으니까. 바로 그때가 내가 인생에 대고 비명을 지를 타이밍이었는지도 모른다.
“왜 저 여자의 이름으로 나를 불렀어? 이름이라도 불러 보고 싶었던 거야?”
“그녀를 생각하고 부른 게 아니야. 연락도 갑자기 온 거고. 나도 모르게 그런 핑계를 댄 거야.”
달은 시선을 떨군 채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달이라는 타인이 연민으로 거둬들인 유기 인간이다. 이지러진 생각이 내 마음에 만월처럼 부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