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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사회과학 > 정치학/외교학/행정학 > 정치인
· ISBN : 9788937831188
· 쪽수 : 966쪽
· 출판일 : 2016-03-03
책 소개
목차
추천의 말 홍석현 (중앙일보·TBC 회장)
추천의 말 나카소네 야스히로 (일본국 전 내각총리대신)
저자 서문
1권
1부 5·16 과 박정희
1 ‘5·16 혁명공약’의 탄생 22
2 5·16의 두 거대한 물줄기 28
3 5·16 거사의 씨앗 34
4 “이분이 우릴 이끌 분이다” 42
5 천기누설-민심의 또 다른 반영 50
6 두 번의 실패 58
7 혁명 전야 64
8 D데이-“거사 기밀이 샜다” 70
9 혁명 성패의 분수령 78
10 혁명의 완결-새로운 질서 88
11 혁명 반대한 미 8군 사령관과의 담판 96
12 좌익 꼬리표가 붙어 다닌 박정희 106
13 “난 그런 신고 받을 사람이 못 돼 ” 112
14 6·25전쟁 65주년 특별 회고 118
2부 제3공화국 수립과 한일회담의 진실
15 신질서-국가재건최고회의 출범 126
16 한국판 CIA, 중앙정보부 창설 134
17 장도영 육군참모총장 제거 140
18 “박정희·김종필 만나러 왔다” 148
19 김일성의 오판 156
20 박정희에 대한 미국의 의심 164
21 이승만 전 대통령 서거 50주년 특별 회고 170
22 민주공화당의 탄생 178
23 현대식 정당의 기틀을 마련하다 186
24 4대 의혹 사건의 오해와 진실 194
25 ‘자의반 타의반’ 1차 외유 202
26 한일회담의 총대를 메다 210
27 ‘김종필·오히라 메모’의 정체 218
28 ‘독도 폭파’ 발언의 진실 224
29 위안부 문제와 역사 왜곡 234
30 매국노냐, 조국근대화 위한 결단이냐 240
31 수교 50년, 한일 관계 미래는 248
32 미국의 반 JP 기류를 바꾸다 254
33 2005년 한일 수교 40주년 초청강연 회고 260
3부 조국근대화의 여명과 권력 투쟁
34 경제 재건에 앞장선 기업인 280
35 한국 경제 발전의 주역 이병철·정주영 286
36 박정희와 수출입국 295
37 서독 함보른의 애국가-파독 광부 이야기 302
38 글로벌 한인시대 개막 308
39 베트남 파병과 그 뒷이야기 314
40 TK세력의 형성과 반 JP 4인 체제 322
41 10·2 항명파동의 전말 330
42 JP 호위병 자처하다가 권력 맛본 뒤 변해 338
43 반 JP 전선과 국민복지회 사건 348
44 미국 망명과 최후의 만남 354
45 3선 개헌의 서곡 362
46 3선 개헌 지지의 진실 370
4부 유신 개헌, 그리고 운명
47 3선 개헌과 아슬아슬한 대선 승리 380
48 유신의 책사 이후락 388
49 이후락과 7·4남북공동성명 394
50 유신을 찬성한 진짜 이유 402
51 윤필용 사건과 권력구조의 균열 408
52 자주 국방을 향한 꿈 416
53 핵개발은 좌절됐는가 424
54 박정희의 용미用美외교 432
55 김대중 납치사건 440
56 월남 패망을 예견한 박정희의 통찰력 448
57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 456
58 육 여사 서거와 역사의 아이러니 464
59 정인숙 사건과 정일권의 처신법 472
60 총리 사퇴와 수도 이전 계획 478
61 김재규의 등장과 파국의 서막 486
62 박정희의 용인술과 김재규의 과잉 충성 494
63 JP 후계론의 실체 502
64 차지철의 안하무인 510
65 파국의 절묘한 드라마 516
인물 찾아보기 522
2권
5부 10·26과 신군부의 등장
66 YS 제명 사건과 부마사태 12
67 하늘의 도道는 있는가! 20
68 그날, 궁정동의 진실 28
69 박정희와의 18년 36
70 인간 박정희-일품 미소의 추억 44
71 정치인 박정희의 한마디 52
72 권력의 빈틈과 혼돈의 시절 60
73 전두환과 12·12 군사반란 66
74 민주공화당의 와해 72
75 춘래불사춘 春來不似春 80
76 5·17과 신군부의 3김 ‘각개격파’ 88
77 서빙고 분실에 갇히다 96
78 신군부가 꺾은 희망 104
6부 2인자 정치의 제2막
79 2인자의 정치 철학 114
80 망명 아닌 망명 4년 4개월 122
81 정치 인생 제2막을 열다 130
82 여소야대 정국과 편지 정치 140
83 3당 합당, 진천동지震天動地의 전야 148
84 9시간 담판, 민자당의 탄생 156
85 내각제 합의 각서 파문 164
86 민자당 대선 후보 선출을 둘러싼 갈등 172
87 YS의 중앙청 철거, 역사관과 충돌하다 180
88 YS의 하나회 제거와 전·노 처벌 188
89 YS와 결별 … ‘기승전결’ 정치 염원 196
90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특별 회고 204
7부 자민련 창당과 DJP연합
91 ‘더 가야 할 몇 마일’-자민련 창당 210
92 1997년 대선, 3김 최후의 격돌 220
93 DJ는 공산주의자인가? 230
94 ‘내각제 유보’ 단안을 내리다 238
95 6·15남북정상회담의 뒷이야기 246
96 나와 이회창 254
97 나와 노무현 262
98 사무사思無邪의 43년 정치 인생 270
8부 인간 JP, 나를 말한다
99 19세, 일본인 교장을 때려눕힌 뒤 광복을 맞다 280
100 입대-탈영-재입대-육사 8기 입교 288
101 내가 겪은 전쟁과 사랑 298
102 그림에 담긴 나의 정치 철학 308
103 음악은 정치의 지향점과 닮아 318
104 건축과 민족기록화의 정치학 326
105 정치인의 패션학과 재건복 336
106 광복 70주년 특별 회고 344
107 유묵遺墨과 나의 정치 인생 352
108 은유·상상의 정치 언어-시·한자성어 360
109 골프 사랑과 정치 368
110 내가 본 세계 정상들의 리더십 376
111 중국 지도자들의 리더십 384
112 사진으로 보는 이면裏面의 장면들 392
엮은이 후기 박보균 (중앙일보 大記者) 398
엮은이 후기 김종필증언록팀(전영기·최준호·한애란) 406
엮은이 후기 김상윤 특보 409
김종필 연보
인물 찾아보기
리뷰
책속에서
이 책의 증언에는 나의 국가관, 역사관, 사생관이 다 녹아 있다. 박정희 대통령을 지도자로 모시고 일으킨 5·16혁명은 새 역사의 분화噴火였다. 조국근대화의 비전이 결코 헛되지 않은 오늘, 온 국민의 피와 땀이 모여 세계 속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하면 된다’는 지도자의 결기와 4천만 국민의 세찬 각오가 어우러졌던 그 어제가 이런 오늘을 만든 것이다. 어제 없는 오늘은 없다. 뿌리 없는 열매는 결코 없다. 역사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꺾이거나 휘어져도 정의를 향해 연면히 나아간다는 사실은 변함없는 진실이다. 불의가 잠시 승昇하는 듯해도 종국의 승리는 정의의 편에 있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나의 증언록이 이와 같은 역사의 진리를 증명하는 하나의 시금석이 되기를 소망한다.
<저자 서문> 중에서
돌이켜보면 특별할 것도, 강렬한 점도 없는 짧은 만남이었다. 하지만 아흔에 이르러 회상해 보니 그 장면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나, 우리 둘이 처음 만난 장면 말이다. 육사를 8기로 졸업한 1949년 6월, 나는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장교로서 첫발을 디뎠다. 동기생 일곱이 정보국 전투정보과에 배치됐다. 발령식 때 정보국장이던 백선엽白善燁 대령이 우리에게 말했다.
“너희가 신고 드릴 분이 한 분 더 있다. 작전실로 가서 인사 드려라.” 바로 옆 ‘작전정보실’이란 팻말이 붙은 작은 방으로 가서 인사를 건넸다. “이번에 전투정보과에 배속된 신임 소위들입니다. 신고를 받으십시오.” 작전정보실장이란 타이틀을 가진 사내는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검은 옷 탓이었을까. 참 키가 조그맣고 얼굴이 새카만 첫인상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계면쩍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나 박정희요. 근데 난 그런 신고 받을 사람이 못 돼. 거기들 앉게.” 악수를 나누고 잠시 의자에 앉았다. 박 실장은 “내가 사고를 당해서 군복을 벗었다”고 간단히 본인을 소개했다. 이어 “육사를 우수하게 졸업한 장교들이라고 들었다. 환영한다”며 짧은 대화를 나눴다. 군복을 벗고 정보국의 문관으로 일하던 그분과의 첫 만남이었다.
<13장 - “난 그런 신고 받을 사람이 못 돼”> 중에서I
‘황태성 사건’ 하면 1961년 KBS TV방송국 개국이 떠오른다. 1961년 여름, 나는 오재경吳在璟 공보부 장관을 만나 TV 방송국 설립 계획을 논의했다. 서로 뜻이 통했고 오 장관도 그런 구상을 갖고 있었다. 정부 예비비에서 1억 환을 마련해 TV 방송국을 연내에 짓기로 했다. 개국 예정일을 두 달 남짓 남겨놓은 10월 남산 기슭에 TV 방송국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그 즈음 내가 일본 도쿄에 가서 마주친 장면이 있다. 건물 위에서 내려다보니 집집마다 TV 안테나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 모습이 사뭇 부러웠고 또 속상했다. 우리나라도 집에 TV가 한 대씩 있는, 그런 나라로 만들어야겠다고 내심 다짐했다. 방송 스튜디오 건물은 착공됐지만 방송용 기자재를 사올 돈이 부족했다.
나는 오재경 장관을 불렀다. 중앙정보부는 그동안 간첩들로부터 압수한 공작금 20여만 달러를 갖고 있었다(1961년 20만 달러는 2억 6,000만 환). 거기엔 황태성이 가져온 돈도 포함됐다. 내가 “이 돈으로 방송 기자재를 사면 크리스마스이브에 개국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오 장관은 “해보겠다”고 했다. 나는 박 의장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그 돈을 오 장관에게 넘겨줬다. 그 돈으로 카메라를 포함해 필요한 기자재를 미국에 주문했다. 결과적으로 김일성이 KBS TV 개국에 큰 역할을 한 셈이다.
<20장 - 박정희에 대한 미국의 의심> 중에서
내가 총리로 재임하던 1971년 어느 날이었다. 삼성 이병철 회장이 총리실로 찾아와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고 장소를 찾아봤더니 경기도 용인 쪽이 제일 좋은데, 거기에 섞여 있는 국유지를 사지 못해 골치가 아픕니다”고 하소연했다. 무슨 일인가 물었더니 유럽의 티볼리나 미국의 디즈니랜드 같은 테마파크를 세우려고 계획한다는 것이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다 싶었다. 그가 “산림청이 땅을 나한테 좀 팔도록 해주시오”라고 부탁하기에 내가 산림청장을 만났더니 땅을 절대 팔 수 없다고 난색을 표했다. 산림녹화가 국정의 주요 목표였던 시절이다. 하도 강경하게 반대하기에 머리를 짜냈다. 나는 이 회장에게 “정부 땅의 두 배쯤 되는 땅을 사서 주고 용인 땅과 교환하는 게 어떻겠습니까”라고 제안했다. 그는 바로 “그거 좋습니다”며 반겼다. 산림청은 대토代土를 받고 삼성에 땅을 내줬다. 그 자리에 지금은 ‘에버랜드’로 이름이 바뀐 용인 자연농원이 들어섰다. 테마파크의 원조가 이렇게 탄생됐다.
<35장 - 한국 경제발전의 주역 이병철 ? 정주영> 중에서
이튿날 아침, 청와대에서 호출이 와서 가니까 박 대통령이 “차지철이를 시키기로 했어”라며 말을 바꿨다. 뜻밖이었다. 내가 본 차지철은 그런 책임 있는 일을 맡길 인물이 못 됐다. 나는 “그래요? 차지철을요?”라고만 대꾸하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도대체 누가 차지철을 추천했나. 내 머릿속엔 그 생각 뿐이었다. 세상에 알려지기로는 박 대통령의 사위인 한병기 전 대사가 차지철을 후임으로 추천했다고 한다. 그런데 진짜 추천인은 따로 있었다. 바로 돌아가신 육영수 여사였다. 생전에 육 여사는 “차지철 의원 같은 고지식한 사람을 데리고 일해 보시라”고 대통령에게 권유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고 효자로 알려졌고, 술·담배를 하지 않는 차지철을 착실하고 믿음직한 사람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아마도 육 여사는 차지철을 박 대통령 곁에 두면 대통령 주변의 스캔들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은 나와 얘기를 나눈 그날 밤 육 여사가 없는 방에서 혼자 주무시다 밤새 생각이 달라졌다. 차 실장 임명은 육 여사가 남긴 유작遺作인 셈이다.
<58장 -육 여사의 서거와 역사의 아이러니> 중에서
1979년 11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의 국장이 치러지고 유신 시대는 사실상 끝났다. 18년 구질서는 헝클어졌으며 새 질서는 형성되지 않았다. 누가 새로운 시대를 만들고 끌어갈지 예측할 수 없었다. 절대권력이 사라진 거대한 공백 속에서 미래는 짙은 안개에 휩싸였다. 헌법에 따라 대통령 권한대행은 최규하 총리가 맡았고, 비상계엄이 실시돼 계엄사령관직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수행하고 있었다. 집권당인 민주공화당 총재 자리는 비어 있었다. 군과 정부, 정치를 관통하는 중심은 없었다. 그때 나는 몸을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당시 5선 국회의원이었지만 공화당에서 별 역할이 없는 총재 상임고문에 불과했다. 주요 당직자 중에서 나를 믿고 따라와 줄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박 대통령과 혁명을 같이한 혈맹으로서 새로 닥칠 시대에서 도망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뒤를 이을 새 대통령을 선출하는 문제가 나라의 현안이었다. 당내 상당수 의견은 내가 후보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유신 대통령을 할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때 정치의 배후에서 실권을 행사하고 있던 군부도 나를 경계했다. 나는 박 대통령이 돌아가신 것으로 유신은 막을 내렸다고 판단했다. 새 시대에서 페어플레이를 하고 싶었다. 처삼촌인 박 대통령의 비참한 죽음을 보고 그 자리에 대한 의욕이 도무지 생기지 않았다.
<72장- 권력의 빈틈과 혼돈의 시절> 중에서
1997년 10월 27일 밤 8시 30분. 김대중 총재가 한광옥 부총재를 데리고 청구동 우리 집을 비밀리에 찾아왔다. 나는 마당으로 마중 나가 그를 기다렸다. 김 총재는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다짜고짜 나를 포옹했다. 감정이 상당히 북받치는 모습이었다. DJ가 이런 방식으로 친밀함을 표시하기는 그날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는 거실 소파에 앉아 인사를 한 뒤 갑자기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러더니 “김 총재님,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간절히 부탁합니다”라고 했다. 나는 DJ를 소파에 앉도록 권하며 “그러잖아도 도와 드리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총재님(DJ)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수모와 박해를 당한 사람 아닙니까. 내가 그 원寃과 한恨을 다 풀어 드리겠습니다”라고 답했다. 나는 1973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박 대통령이 시키지도 않은 ‘김대중 납치사건’을 저지른 일을 떠올렸다. 그 일은 이후락이 대통령의 신임을 다시 얻기 위해 낸 ‘자기가 죽을 꾀’였다. 내가 김대중에게 직접 고통을 준 것은 아니었지만 그 시점에서 나 외에 박 대통령을 대신해 그의 가슴에 맺힌 원寃을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92장 - 1997 대선, 최후의 3김 격돌> 중에서
중공군을 생포한 뒤 한 달쯤 지났을까. 세밑 금성천의 칼바람에 살이 에이는 듯했다. 연대장인 허영순 대령으로부터 사무실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전화를 건네주는데 육본 작전교육국 차장인 박정희 대령이었다. 박 대령은 출장차 인근 7사단장에게 왔다가 나를 찾은 것이다. 대령은 놀라운 사실을 전해주었다.
“여기 오는 길에 춘천 시장통에서 우연히 애를 업고 있는 옥이를 만났어. 자네가 중공군과 싸우고 있는데 죽을 거라는 소문이 나서 ‘같이 죽으러 왔다’면서 남편을 찾아왔다고 해. 빨리 가봐.”
‘옥’이는 아내 박영옥이었다. 연대장 허 대령은 고맙게도 자기 지프에 쌀 한가마니를 실어주고 아내를 만나고 오라고 했다. 춘천 거리는 폭격으로 집과 건물이 다 무너진 쑥대밭이었다. 급히 가서 보니 아내는 소양강 옆에 가마니로 바람막이를 하고서 애를 데리고 있었다. 아내는 “대구에서 서울까지 군수용 화물 열차를 타고 왔어요. 서울서 춘천까지는 GMC 군용 트럭에 태워 달라고 했고요. 당신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해서 무작정 올라왔어예”라며 엉엉 울었다. 돌 지난 딸 예리는 추운 줄도 모르고 이리저리 기어 다녔다. 연락병에게 부대에서 모포 대여섯 장을 가져오게 했다. 부대를 출퇴근하면서 일주일을 함께 지낸 뒤 아내를 대구로 내려 보냈다. 그때 40만~50만 군인 중에서 남편이 죽을지 모른다고 얼굴이 시커멓게 돼 가지고 그 고생을 하며 최전방까지 찾아온 여자가 또 있을까. 아내 박영옥은 그런 여자였다.
< 101장- 내가 겪은 전쟁과 사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