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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어린이 > 초등5~6학년 > 동화/명작/고전
· ISBN : 9788950916350
· 쪽수 : 312쪽
책 소개
리뷰
책속에서
끈적끈적한 진흙에 틴의 손가락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광경에 놀란 나는 말했다.
"봐! 틴이 우리보다 더 많이 팠나 봐. 길을 파서 나온 것 같아."
"하퍼, 틴은 어린아이야. 어떻게 흙을 파서 나오겠니?"
데본 오빠가 코웃음을 쳤지만 나는 굳이 더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나는 알았다. 우리 쪽에서는 진흙을 거의 파지 못했으며 진흙이 제대로 파내졌다면 그것은 바로 틴 혼자 한 일이었다. 오빠가 믿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오빠와 나는 찰박거리며 개울을 나와 아버지를 따라잡기 위해 달렸다. 아버지는 저 멀리 앞서 가고 있었지만 아버지 어깨 위에서 턱을 괸 채 자신이 있던 곳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틴의 작은 얼굴이 보였다. 나는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았고 틴은 자신이 한 일을 알았다. 그래, 그랬다.
-본문 23쪽
"다행이다. 네가 씩씩하니까 다행이야. 하퍼, 무엇이든 두려워하지 마. 두려워하는 사람은 시도도 하기 전에 좌절해 버려. 겁이 많으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해. 용감해야 상황을 바꿀 수 있어."
나는 데본 오빠가 혹시 술을 마시고 횡설수설하는 게 아닌지 의심하며 오빠를 향해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데본 오빠가 몸을 숙여 내 볼에 입을 맞추었을 때 술 냄새가 나지 않아서 더욱 아리송하기만 했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남자들은 술을 많이 마시면 슬픈 마음을 드러내며 허튼소리를 했으니까 말이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물어보고 싶었는데 막상 데본 오빠가 방을 나가니 멈추어 세울 수가 없었다. 데본 오빠가 그렇게 이상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 데본 오빠는 집을 나갔다. 데본 오빠의 침대에는 사람이 잔 흔적이 없었다. 오빠는 내가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문 밖으로 나간 모양이었다. 데본 오빠는 기다리는 동안 자신이 가진 물건을 대부분 챙겨 짐 보따리를 쌌다. 그리고 편지를 써서 봉인한 다음 어머니의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그렇게 하면 아버지는 발견하지 못할 테지만 어머니는 난롯불을 피우기 전에 두 손을 거기에 넣다가 편지를 만지게 될 것이다.
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어머니가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큰 소리로 데본 오빠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 허둥지둥 달려 나갔더니 마당에서 어머니가 두 팔을 축 늘어뜨린 채 먼 곳을 망연히 쳐다보고 있었다. 손가락 끝으로 간신히 쥔 편지가 미풍에 흔들렸다. 어머니는 나를 보지도 않고 기력이 다한 목소리로 말했다.
"데본이 떠났어. 또 한 명이 떠났구나."
-본문 225~226쪽
우리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고 멍하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상황에서 그 사람이 틴 말고, 방랑하던 틴 말고 과연 다른 누구일 수 있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휑하니 드러난 팔다리며 창백한 피부, 빛바랜 머리카락과 갈고리처럼 날카로운 손톱을 보았다. 틴이 시선을 들어 올려 속눈썹이 짙은 그 눈으로 우리를 쳐다본 순간, 우리는 늙은 사람처럼 주름진 얼굴을 보았다.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단계에 있는 얼굴을.
아버지가 중얼거렸다.
"`맙소사."
그 사람은 바로 틴이었다. 그동안 상상 속에 머물렀던 틴은 바로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열 살에서 열한 살로 넘어가는 소년의 얼굴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틴은 왠지 땅 위에 붕 떠 있는 것 같았고 몸에서 묘한 빛이 나와 환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틴이 등에서 날개를 펼치며 날 수 있었다고 해도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틴은 두 팔로 안고 있던 물건을 베란다에 조심스럽게 내려놓더니, 그것이 사라지지 않을까 잔뜩 주의를 기울이는 듯 그것에 시선을 고정한 채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 잠시 후 그 물건이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었는지 눈을 들어 집안에 있는 우리를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어머니를 보다가 아버지를 보았고 뒤이어 오드리 언니와 나를 보았다.
나는 틴의 눈길이 내게 머물렀을 때 내 안의 무엇인가가 흔들리며 나한테서 벗어나 틴에게로 옮겨 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그것을 준 것이 아니라 틴이 원해서 그것이 저절로 틴에게 가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잠시 후 틴이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만으로도 우리 두 사람은 그런 현상이 발생했다는 데 암묵적으로 동의할 수 있었다. 그러자 틴은 뒤돌아 사라져 버렸고 개들은 컹컹 짖으면서도 뒤쫓아 가지 않았다.
-본문 280~2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