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어린이 > 동화/명작/고전 > 외국창작동화
· ISBN : 9788950972813
· 쪽수 : 312쪽
· 출판일 : 2017-11-30
책 소개
목차
목차가 없는 도서입니다.
리뷰
책속에서
“인간 친구가 나를 찾으러 올 거예요. 그때 저 길에 있어야 해요.”
그레이는 땅 위에 편안하게 앉아 기지개를 켰다.
“길은 어제 군인들로 막혔어.”
팍스는 전날 지나가던 자동차를 다시 떠올렸다. 그 자동차들은 소년 아버지의 새 옷에서 나는 것과 같은 냄새를 풍겼다. 그때부터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는 건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소년이 나를 찾아서 거기로 올 거예요.”
“아니. 까마귀가 알려줬어, 길은 막혔다고.”
팍스는 꼬리를 흔들어대며 돌멩이에서 돌멩이로 왔다 갔다 하며 생각해보았다. 답이 나왔다.
“난 우리 집에 있는 소년한테 가야겠어요.”
“네 집이 어딘데?”
팍스는 확신을 갖고 몸을 확 돌렸다.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자신의 집이 있는 방향, 단 하나의 방향에서 자신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걸 느꼈으니까. 남쪽이었다.
그레이는 그다지 놀라는 것 같지 않았다.
“저쪽 인간의 식민지는 아주 넓어. 군인들이 여기 도착하면, 우리 가족은 그 식민지에 더 가까운 쪽이나 북쪽으로 가야 할 거야. 산속으로 말이야. 그곳 인간들에 대해 말해봐. 거기 인간들은 어떻게 살고 있지?”
다시 이 늙은 여우의 태도에 팍스의 마음이 누그러졌다. 팍스 는 돌아와서 앉았다.
“멀리서 사람들을 많이 보긴 했어요. 하지만 내가 아는 건 딱 두 사람이에요.”
“그 사람들은 속이는 거짓 행동을 하니? 내가 알던 사람들처럼?”
팍스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레이는 엉덩이를 세우고는 안절부절못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보았던 인간의 행동을 들려주었다. 굶주린 이웃을 모른 체했던 한 인간. 그 인간은 저장실에 음식이 가득 차 있는데도 없는 것처럼 굴었다. 자신이 선택한 짝에게 무관심한 척했던 한 인간. 구슬리는 목소리로 양 한 마리를 무리에서 꼬드겨낸 다음에 잡아먹었던 한 인간.
“네 인간들은 이런 짓 안 했어?”
즉시 팍스는 소년의 아빠가 자동차에서 자신을 끌어낸 것을 떠올렸다. 유감스러운 척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거짓이라는 걸 팍스는 알고 있었다. 거짓말 냄새를 폴폴 풍기고 있었으니까.
(중략)
팍스는 나이 든 여우, 그레이에게 말했다.
“저도 봤어요. 하지만 내 소년은 그런 짓 안 해요. 그 아이한테는 정말 그런 거 없어요. 하지만 소년의 아빠는 진짜 그랬어요.”
늙은 여우는 이 말을 듣고 불편해하는 것 같았다. 여우는 간신히 허리를 곧추세웠다.
“사람들은 여전히 조심성이 없니? 내가 함께 살던 사람들은 조심성이 없었어.”
“조심성이오?”
“사람들은 밭을 갈고 거기에 사는 쥐들을 아무런 경고 없이 죽였어. 강을 막아서 물고기를 죽게 내버려두기도 했지. 인간은 여전히 그렇게 조심성이 없니?”
한번은 피터의 아빠가 나무를 잘라내려 할 때, 팍스는 피터가 나무에 올라가 둥지를 떼어내 다른 나무에 옮기는 걸 지켜보았다. 추운 날에는 피터가 팍스의 여우 집에 새 지푸라기를 가져다주었다. 피터는 자신이 음식을 먹기 전에 언제나 팍스에게 물과 음식이 있는지 확인했다.
“내 소년은 조심성이 없지 않아요.”
“전쟁 때문이에요. 우리 마을 쪽으로 전쟁이 번져오고 있어요. 강까지 번져가겠죠. 아빠는 군대에 가야 했어요. 엄마는 돌아가셨고요. 그러니까 우리만 남은 거예요. 그래서 아빠가 나를…….”
“네 아빠는 몇 살인데?”
“뭐라고요? 서른여섯 살이에요. 왜요?”
“그렇다면, 네 아빠는 뭐든 할 필요가 없었어. 징병이 있다 해도, 그건 열여덟 살에서 스물다섯 살까지만 해당되거든. 아직 어린 사람들은 세뇌시키기가 쉬우니까. 그러니까 네 아빠가 군대에 갔다면, 분명 자원했을 거야. 그건 네 아빠가 선택한 거지. 진실을 이야기해보자꾸나. 그게 이곳 규칙이야.”
“알았어요, 맞아요. 아빠가 자원했어요. 아빠는 나를 할아버지 집에 데려다주었어요, 그런데…….”
“넌 거기가 마음에 안 들었구나.”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건…… 제발 그것 좀 치우시면 안 돼요?”
여자는 고개를 숙였다. 칼이 자기 손에 있는 걸 보고는 놀란 것 같았다.
“내가 좀 무례했구나, 내 이름은 볼라란다.”
볼라가 사과하더니 칼을 작업대 위로 던지며 말했다.
“계속해봐.”
“알겠어요. 저한테 여우가 있었어요. 아니, 여우가 있어요. 우리는 그 여우를 풀어줬어요. 길옆에 놓아줬어요. 아빠가 그래야 한다고 했거든요. 하지만 그러면 안 되는 거였어요.”
여우를 놓아주고 차를 타고 떠난 이후로, 피터는 아빠한테 하지 못했지만 했어야 하는 말 때문에 괴로웠었다. 무슨 영문인지 그 말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그 여우를 아기 때부터 제가 키웠어요. 여우는 저를 믿었어요. 그 애는 바깥세상에서 사는 법을 모를 거예요. 녀석이 ‘그냥 여우’라는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요. 아빠가 ‘그냥 여우’라고 말했거든요. ‘그냥 여우’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냥 개’라든가 다른 뭔가와 마찬가지라는 말은 아니에요.”
“그래, 그래. 아주 화나는 일이었겠구나. 그래서 넌 달아난 거고.”
“저는 화나지 않았어요. 화 안 나요. 제 여우예요. 여우는 저를 의지해요. 이제 돌아가서 여우를 찾을 거예요.”
“음, 지금은 안 돼. 계획을 바꿔야겠구나.”
“안 돼요. 가서 집으로 데려가야 해요.”
피터는 무릎을 접었다. 큰 숨을 내쉬며 발에서 터져 나오는 고통을 꿀꺽 삼켰다. 피터는 나뭇가지를 움켜잡고 잠깐 동안 체중을 실으려 애를 썼다. 그러다가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이렇게만 했는데도 몹시 힘이 들고 진땀이 났다.
“지금? 너 이건 생각해봤어? 너 여우한테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건지 알기는 하고?”
“300킬로미터 이상이오. 어쩌면 더 될지도 몰라요.”
피터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볼라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 꼴로는 1킬로미터도 못 갈걸. 지금 밖에 나가면 곰 미끼밖에 안 돼. 첫날밤에 저체온증으로 죽지 않는다면 말이지. 넌 몸에서 열기가 날 만큼까지 움직일 수도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