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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고대~고려시대 > 한국고대사 > 발해
· ISBN : 9788952234315
· 쪽수 : 164쪽
· 출판일 : 2016-06-30
책 소개
목차
발해 건국의 전야
제1대 고왕 대조영
제2대 무왕 대무예
제3대 문왕 대흠무
제4대 대원의왕
제5대 성왕 대화여
제6대 강왕 대숭린
제7대 정왕 대원유
제8대 희왕 대언의
제9대 간왕 대명충
제10대 선왕 대인수
제11대 대이진왕
제12대 대건황왕
제13대 대현석왕
제14대 대위해왕
제15대 대인선왕
발해 유민의 고려 내투
후발해
정안국
흥료국
대발해국
변함없이 이어지는 발해인의 습속
발해의 도성은 어떠했을까?
다양한 요소가 공존하는 발해 문화
저자소개
책속에서
713년(고왕 16)에 당은 다시 최흔(崔炘)을 파견하여 고왕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했다. 이로부터 말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발해라는 국호가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전하는데, 이는<신당서>에 언급된 내용에 불과하다. 당시 발해가 스스로를 말갈이라 칭했다는 사실은 어느 곳에서도 확인되지 않으며, 책봉을 받은 뒤 발해가 스스로 진국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발해라고 칭했는지 여부 또한 정확하게 말해주는 기록은 없다. 다만 당이 말갈이 아닌 발해라는 정식 호칭을 붙였다는 것을 말해줄 따름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발해가 자주 독립국가라는 것을 당 스스로 인정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무왕의 대당 정책은 강경일변도로 지속되지만은 않았다. 735년(무왕 17)을 전후로 돌궐 세력이 붕괴하고 거란과 해(奚)는 다시 당에 복속되어 발해의 배후 세력이 와해되었으며, 같은 해 2월 당이 신라에 패강(浿江: 현재의 대동강) 이남을 인정함으로써 양국 관계가 급속하게 긴밀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대외 정세 변화를 감지한 무왕은 736년(무왕 18) 대번(大蕃)을 파견하여 숙위 교체를 요구하고, 다시 대무경(大茂慶)을 파견하여 돌궐이 원군을 요청해 온 사실을 전하면서 당과 화해를 도모했다. 이에 당은 대문예 암살 사건 즈음에 파견되었다가 유배되었던 대낭아(大郎雅)를 귀국시키고 발해와 당의 전쟁 당시 붙잡혔던 전쟁포로도 귀환시켰다. 이로써 발해와 당은 대립과 갈등을 청산하고 우호와 협력 관계를 구축하게 된다.
이러한 무왕의 대당 정책 전환은 대외 정세에 대한 면밀한 판단과 등주 공격, 마도산 전투 참가, 대일 통교 등을 통해 형성된 대외적 위상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 하겠다.
무왕은 이듬해 737년(무왕 19) 사망했다. ‘武王’이라는 시호(諡號)에서 보듯 그는 군사력을 강화하고 대외 확장을 추진했으며 이를 견제하려는 당의 획책에 정면 승부로 대응하면서 발해의 대내외 위상을 확립했다. 무왕 대의 정황을 <신당서>에서는 “넓은 땅을 개척하여 동북의 여러 오랑캐들이 두려워하여 발해의 신하가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문왕은 재위 기간 동안 6차례에 걸쳐 높은 책봉을 받았는데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특히 안사의 난이 끝나갈 무렵인 762년(문왕 26)에는 ‘발해군왕’에서 ‘발해국왕’으로 승격되었다. 비록 명목상이긴 하지만 문왕 대에 와서 국제적 위상이 한층 높아졌다는 점을 보여준다.
안으로 문물을 정비하고 밖으로 국가의 위상을 드높인 문왕은 자신을 중국 황제에 버금가는 군주로, 발해를 황제국으로 인식했으며 이를 대내외에 공포했다. 이러한 문왕의 인식은 여러 부분에서 확인된다.
먼저 774년(문왕 38)에는 연호를 ‘대흥’에서 ‘보력(寶曆)’으로 개칭했다. 보력이란 원래 천자가 백성에게 달력을 내리는 행위를 일컫는 말로, 문왕이 이를 연호로 정했다는 것은 스스로 천자에 버금가는 황제의 입지를 갖추었다는 자신감을 내세운 것이라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