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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57075364
· 쪽수 : 248쪽
책 소개
목차
오래된 도시
비즈니스우먼
비즈니스맨
이팝나무
무국적자들
대파와 쪽파
떠난 자 남는 자
바다가 돌아눕는 소리
작가의 말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이 나라는 학연과 지연으로 맺어져 굴러가는 나라라고 나는 생각했다. 남자의 인생은 어떤 사람들과 어떻게 맺어지느냐에 따라서 그 행방이 뒤바뀌었고, 여자의 인생은 어떤 남자를 만나느냐 하는 데 따라 그 성패가 결판나는 세상이었다. 옛날에 비해 세계는 너무도 많이 달라졌다. 차라리 독재의 그늘에 덮여 있던 시대가 나았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이제 세상의 주인은 ‘자본’이었고, 삶의 유일한 전략은 ‘비즈니스’였다.
사랑과 결혼조차 일종의 ‘비즈니스’에 불과했다.
자본의 압제는 그 경계마저 불분명하니, 화염병을 들고 나간다고 해도 던질 데가 없었다. 간교하고도 잔인한 독재자인 자본의 품 안에서 사람들은 단지 실패한 자와 성공한 자, 두 종류만으로 구별됐다. 교육도 일종의 ‘비즈니스’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사실이었다. 백그라운드가 없는바, 정우를 성공시키려면 학연으로 맺어질 인맥도 미리 고려해야 했다. 실패한 자들이나 남아 있는 구시가지에서 학교를 다닌다면 무엇보다 성공한 집안의 아이들을 친구 삼을 기회가 전혀 없을 게 뻔했다. 가짜로 주민등록을 옮기면서까지 정우를 신시가지 중심가의 학교로 보낸 것은 공부도 공부려니와, 그 때문이었다. “당신, 잔 다르크 같아.” 남편은 그 한마디뿐이었다. 조소를 한다고 느꼈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조소는 실패한 자들이 둘러쓴 비열한 자기방어 수단이었다. 비록 실패해 고향으로 내려왔다고 해도, 아이 하나 있는 것을 남편이나 나처럼 살게 할 수는 없었다.
사진기자가 된 것도 사진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류사회의 남자들을 더 만나기 위해서였다. 서른이 넘을 때까지 아무리 가난한 남자라도 사랑하는 사람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굳게 믿었던 나와 달리, 그녀는 대학 시절부터 이미 ‘사랑’조차 자본주의의 요람에 들어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본의 세계에선 당연히 사랑도 자본재(資本財)였다. 남자들을 통해 삶을 수직 이동 시키고자 했던 그녀의 전략은 주도면밀했고 끈질겼으며, 마침내 성공했다. 시댁에서 생일 선물로 BMW 5 시리즈를 사줬을 정도였다. 시댁에서는 사진작가로 행세해서 친정의 불민함을 커버했다. 사진전도 가끔 열었고 엉터리 공모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돈 많은 속물 꼴통들한테 멸시당하지 않으려면 내 입장에서 문화예술밖에 없거든.” 그녀가 말하는 ‘속물 꼴통’들은 시아버지를 비롯한 시댁 식구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세상에서 말하는 도덕이란 누구나 볼 수 있는 데 걸어놓는 문패 같은 거야. 문패는, 지금 걸던 대로 걸어. 그 대신 남몰래 돈 벌어 정우 뒷바라지라도 잘해. 요즘 애들이 진짜 싫어하고 혐오하는 부모는 실패한 부모야. 아이 뒷바라지 못해주는 부모 말야. 나중에 정우가 좋은 대학도 못 가고, 그래서 별 볼일 없는 인생을 살게 되었을 때, 엄마는 내게 무엇을 주었느냐고 너한테 물으면 뭐라고 할래? 과외조차 안 시키고 외국어고 갈 것 같아? 어림없어 얘. 신시가지 아파트 사는 애들은 주말이면 서울에 있는 영어 학교까지 엄마들이 실어 나르고 있어. 넌 정숙한 좋은 어머니상(像)이니, 그걸 계속 네 문패로 사용해. 그 대신 눈 질끈 감고 다른 각도로 세상을 봐. 처음만 지나면 모든 게 쉬워져. 정우를 네 신랑처럼 살게 하지 않으려면 무슨 일인들 못 하겠니. 자식을 두곤 결과적으론 남는 장사를 해야 한다 그거야. 안 그러면 너, 정우한테 나중에 원망받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