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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추리/미스터리소설 > 기타국가 추리/미스터리소설
· ISBN : 9788957590966
· 쪽수 : 315쪽
· 출판일 : 2005-01-14
책속에서
"보비, 거짓말 중독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
한참 만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거짓말 중독자는 어떤 상황에서든, 그게 중요한 상황이든 아니든 진실보다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더 쉽고 편해."
"당신 같은 사람이라면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안 하는지 알아맞혀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다고 해서 네 자체가 달라지진 않아."
"내가 거짓말을 한 건 이름과 지명 몇 개밖에 없어. 그 나머지는 당신 혼자 멋대로 생각해낸 거야."
“당신은 이해 못 해.”
여자가 휴대폰을 내려뜨리면서 중얼거린다. 휴대폰은 아주 잠깐 여자의 손끝에 매달려 있다가 허공으로 뚝 떨어진다.
순간, 공기가 어둑해지면서 어떤 형상이 내 눈앞을 스친다. 입을 크게 벌리고 절망에 찬 비명을 토해내는 여자의 모습이. 그다음 순간, 철조망에 기대고 있던 여자의 엉덩이도, 쇠줄을 휘감고 있던 팔도 온데간데없다.
여자는 중력에 저항하지 않는다. 발버둥치지도 않고, 팔을 허우적거리지도 않고, 공기를 움켜쥐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저 조용히 떨어져내려 시야에서 사라진다.
모든 게 정지한 듯하다. 온 세상이 숨을 멈춘 것처럼. 그러다가 다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의료진과 경찰 들이 나를 지나쳐 뛰어가고, 사람들이 비명을 질러댄다. 나는 꿈인지 생시인지 얼떨떨한 기분으로 바리케이드 쪽으로 몸을 돌린다.
사람들이 여자가 떨어진 곳을 내다보며 똑같은 질문을 주고받는다. 내가 왜 여자를 구하지 않은 거냐고. 나는 그들의 시선을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걸어가다가, 왼쪽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고 만다. 눈앞에 시커먼 물웅덩이가 보인다. 나는 애써 몸을 일으켜 사람들을 밀어 젖히고 바리케이드 밖으로 나간다.
물을 철벅철벅 튀기면서 갓길을 따라가다 보니 비스듬히 자라난 벌거숭이 나무들이 보인다. 내 쪽으로 기울어진 가지들이 나를 비난하는 것만 같다. 멈춰선 차들의 행렬에서 운전자들이 서로 대화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중 누군가가 내게 소리친다.
“어떻게 됐어요? 뛰어내린 거예요? 길은 언제 열어준대요?”
나는 앞만 보며 걸음을 옮긴다. 정신이 몽롱하다. 왼팔이 또 뻣뻣해지고, 귀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난다. 어쩌면 여자는 내 얼굴을 보고 결심을 굳혔는지도 모른다. 서늘하게 식어가는 청동 가면 같은, 파킨슨병 환자 특유의 경직된 얼굴을 보고.
나는 난간 너머로 몸을 구부리고 배 속에 든 걸 몽땅 토해버린다.
한 남자가 다리 위에 꿇어앉아 창자까지 게워낼 기세로 구토를 한다. 혹시라도 위장이 딸려 나온다면 힘껏 삼키기만을 바랄 뿐이다.
사람들이 다리 위에 몰려들어 강물을 내려다본다. 그들은 나의 천사가 추락하는 것을 보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마치 줄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팔다리를 늘어뜨린 채 빙글빙글 회전하며 떨어지는 모습을.
그건 내가 준비한 서커스였다. 여자가 허공에 발을 내디디던 그 순간, 여자의 마음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던가? 여자의 뒤편에 있던 나무들이 초록빛 폭포처럼 흐릿하게 번지는 게 보이지 않던가? 시간이 멈춘 것만 같던 그 광경이 말이다.
나는 철제 빗으로 머리를 가지런히 빗어 넘기면서 창밖을 계속 주시한다. 붉고 파란 불빛들이 현수교 케이블을 물들이고 있다. 거칠게 부는 바람 때문에 창문이 덜그럭거리자 유리에 맺힌 빗방울이 떨어져내린다. 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댄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다. 여기서도 강이 보이면 좋을 텐데. 여자는 수면 위에 떠올랐을까, 아니면 곧바로 가라앉았을까? 뼈가 얼마나 많이 부서졌을까? 배 속은 비어 있었을까?
그나저나 아까 다리 위에 있던 그 남자가 누군지 궁금하다. 키 큰 순경이랑 같이 왔는데, 이상한 자세로 절뚝이면서 걸었다. 한 팔을 옆구리에 딱 붙이고 다른 팔만 앞뒤로 흔들면서. 교섭자인 것 같았다. 아마도 심리학자겠지. 높은 곳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여자를 말리려 했지만 소용없었을 것이다. 여자는 내 말을 듣고 있었으니까. 이게 바로 전문가와 덜떨어진 아마추어의 차이다. 나는 사람의 마음을 여는 법을 안다. 마음을 구부릴 수도 있고, 부술 수도 있으며, 겨울 동안 폐쇄 조치를 내릴 수도 있다. 그 밖에도 오만 가지 방식으로 마음을 조져버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