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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개신교) 신앙생활 > 신앙생활일반
· ISBN : 9788957995082
· 쪽수 : 166쪽
· 출판일 : 2024-11-10
책 소개
목차
[위그노 연보]․10
[주요 인물 익히기]․13
1. 주일 아침, 바시에서 울린 총성․18
2. 위그노, 그것은 멸칭이었다․27
3. 루터가 프랑스에 지진을 일으키다․30
4. 16세기 프랑스와 갈리아주의, 그리고 모 그룹과 인문주의 종교개혁․35
5. 칼뱅, 제네바에서 프랑스 선교를 꿈꾸다․41
6. 프랑스의 종교개혁과 칼뱅의 「기독교강요」․45
7. 프랑스 개신교 전국 회의․48
8. 위그노를 향한 칼뱅의 서신들․52
9. 칼뱅, 직업에 대해 소명 의식을 가져라․58
10. 16세기 프랑스의 정치적 상황․60
11. 앙리 드 나바르의 결혼식과 콜리니에 대한 1차 암살 실패․64
12. 성 바돌로매 축일 대학살 사건․67
13. 발루아 왕조의 쇠퇴․82
14. 위그노 전쟁․86
15. 군주를 토벌하라․92
16. 앙리 4세, 그는 위그노인가 가톨릭인가․98
17. 앙리 4세의 낭트 칙령․106
18. 루이 13세와 위그노 반란․109
19. 루이 14세와 퐁텐블로 칙령․112
20. 30년 전쟁과 베스트팔렌 조약․124
21. 위그노 디아스포라․126
22. 위그노가 유럽의 산업 지도를 바꾸다․135
23. 위그노가 개혁교회의 중심이 되다․144
24. 박해가 끝나다․147
25. 프랑스 개혁교회의 현재․149
26. 위그노를 뱌경으로 한 예술․ 151
27. 위그노의 후예들․153
28. 우리는 위그노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157
저자소개
책속에서
1. 주일 아침, 바시에서 울린 총성
[바시 대학살 사건]
1562년 2월, 위그노를 심하게 배척하던 프랑수아 드 기즈공(Francois de Guise)과 그의 동생 로렌 추기경이 반(反) 합스부르크 동맹을 위해 독일 루터교 제후들과 협상을 하기 위해 알사스 지방을 방문했다.
그 후 군대를 이끌고 파리로 돌아가던 중, 3월 1일 주일 아침 우연히 샹파뉴(Champagne) 지방의 작은 마을 바시(Wassy)를 통과하게 되었다. 바시는 프랑스 발음으로는 와시이다. 그러나 이 지역이 독일어권 지역이었기에 바시(Vassy)로 불린다.
마을에 들어서자 마침 마을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기즈는 그 종소리가 어디에서 나는지 알아보라 했다. 마을에 들어가 정찰을 마친 병사는 위그노들이 왕궁 소유의 한 곡식 창고에서 5백여 명의 위그노들(Les Huguenots)이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보고했다. 당시 그곳엔 700여 명의 위그노 신자들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1562년 1월 17일에 개신교를 공식 종교로 인정하는 생제르맹 칙령(l'Edit de St. Germain)이 발표된 후라 위그노들은 더 이상 숨어서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되었다. 예배의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칙령으로 위그노에게 영구적인 평화가 확보된 것은 아니었다. 그 칙령은 정치적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위그노와 가톨릭 사이에 완전한 평화와 화합이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보고를 받은 기즈공은 위그노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가톨릭을 수호하려는 그로서는 참으로 신경 쓰이는 광경이 아닐 수 없다. 화가 난 그는 무장한 병사들을 보내 더 자세히 살펴보고 보고하라 했다.
기즈공은 마을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보고를 기다리면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장 군인들과 예배 중인 위그노들이 충돌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병사들이 위그노들을 위협한 것이 틀림없다. 그는 충돌 현장으로 달려갔다.
기즈공 병사들의 위협과 공격에 위그노들은 투석으로 맞서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분노한 위그노들이 던진 돌이 기즈공의 몸에 맞게 되었다. 돌에 맞은 기즈공뿐 아니라 그의 병사들도 화가 났다. 무장 군인들이 교회를 공격해 위그노들을 무참히 죽이기 시작했다. 60여 명의 사망자와 2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것을 바시의 학살(Massacre de Wassy, Massacre of Vassy)이라 한다. 기즈공 측의 얘기에 따르면 이 사건은 위그노의 돌멩이 투척 사건과 가톨릭 군대의 과잉 진압이 가져온 쌍방 과실로 보인다.
그러나 위그노 측 얘기는 다르다. 천하를 호령하던 기즈공작 일행이 곡식 창고에서 가톨릭식이 아닌 신약의 예배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위그노들을 보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기즈공은 군대를 동원하여 창고를 둘러쌌다. 그리고 발포 명령을 내렸다. 위그노들은 그들에 저항했다. 이것이 가톨릭 군대와 위그노와의 첫 마찰이었고, 그 결과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사상자의 수도 기록마다 다르다. 36명의 신자가 현장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주장도 있고, 23명 또는 74명이 죽었다는 주장도 있다. 부상자 수도 100여 명에서 200여 명 등 여러 주장이 있다. 확실한 것은 많은 수의 위그노가 일방적으로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바시는 알사스 지방에서 파리로 가는 국도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마을이다. 파리로 가는 길목도 아니다. 그런데 하필 기즈공 일행이 주일에 이곳을 지나게 되었을까? 그것은 기즈 가문의 일과 연관된다.
바시 지역은 1258년에 왕 직할지에서 벗어났다. 그런데 1552년부터 한 귀족 미망인이 이곳에서 마을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귀부인은 기즈의 어머니 앙뚜아네뜨(Antoinette de Bourbon-Vendome)였다. 이곳에 있는 바시 성당은 기즈의 동생이자 로렌 지역 추기경인 샤를 드 기즈(Charles de Guise)의 직속 관할 열두 지역 가운데 한 곳이었다(류재광, 2009).
기즈공 일행은 자기 집 앞마당과 다름없는 바시에서 위그노들이 개신교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며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위그노들이 예배드리던 곡식 창고는 바시 노트르담 성당과는 불과 100미터 떨어져 있다. 성당 앞 건물에서 위그노들이 예배드리는 모습이야말로 그들에겐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바시 대학살 사건 현장을 그려놓은 그림을 보면 바시 성당 앞에서, 환하게 웃으며 학살 현장을 쳐다보는 두 사람이 있다. 바로 기즈 가문의 프랑수와 드 기즈와 샤흘르 드 기즈 형제이다. 돌멩이에 맞아 고통스러워하는 기즈공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위그노들은 무장한 병사들로부터 무차별적으로 찔리고 죽어갔다. 지금 바시 창고는 위그노들의 후손들이 학살 현장을 복구하여 전시해 놓았다. 당시에는 위그노 교회당이었지만 지금은 위그노를 학살한 박물관이 되었다.
바시 학살 사건은 기즈공의 명령에 따라 그의 군대가 창고에 모여서 예배 중인 개신교인들을 습격하여 학살한 사건이다. 이 학살이 발단이 되어 프랑스의 종교전쟁인 위그노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위그노는 이로부터 9차례나 가톨릭 군대와 싸웠다. 물론 그 싸움은 쉬었다가 또 시작하고, 또 쉬었다가 시작하기를 반복하며 36년을 갔다. 이 싸움은 앙리 드 나바르(Henri de Navarre)의 낭트칙령이 있기까지 계속되었다. 그 후 100년간 두 세력 간에 싸움 없이 비교적 조용했다. 하지만 1685년 낭트칙령이 폐지되면서 다시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러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때 비로소 종교의 자유를 찾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