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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59133864
· 쪽수 : 266쪽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아들 엄종세
장기풍을 만나다
아버지의 가게
용의자 엄종세
김경한의 선택
내 인생의 승부
아버지 엄시헌
형을 만나다
에필로그
저자 후기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일꾼들은 해가 떨어지기 무섭게 함바집으로 달려갔지만 엄시헌은 곧장 숙소로 갔다. 일꾼들이 낮 동안 번 돈의 대부분을 밤에 썼지만 엄시헌은 쓰지 않았다. 일꾼들은 종일 담배를 물고 살았지만 엄시헌은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엄시헌은 새참으로 막걸리가 나올 때면 연거푸 세 잔씩 마셨지만 제 돈으로 술을 마시지는 않았다. (……)
엄시헌은 십오 일마다 받은 돈을 고스란히 집으로 부쳤다. 아침과 저녁 값을 빼면 그는 한푼도 쓰지 않았다. 그는 봄옷과 여름옷, 가을옷과 겨울옷을 구별 없이 입었다. 그는 늦은 봄까지 겨울옷을 입었고, 가을이 붉게 익어서 떨어질 때까지 푸른 여름옷을 걸치고 있었다. 간죠날 점심시간에 엄시헌은 읍내 우체국으로 달려갔다. 우체국 수납대에 팔꿈치를 괴고 서서 집으로 돈을 부칠 때 그의 얼굴은 아이처럼 해맑았다. 돈을 부치고 받아든 전표를 꼼꼼하게 확인하고 돌아서는 엄시헌의 얼굴은 다른 사람 같았다. 엄시헌은 좀처럼 웃지 않았지만 간죠날 저녁에는 달랐다. 누가 시답잖은 농담을 해도 그는 연방 미소짓곤 했다. - 본문 29~30쪽 중에서
종세가 달리는 것을 보고 싶다. 나를 닮았으니 달리기를 잘할 것이다. 종세가 달리는 모습은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 아이가 바람을 가르며 골인 지점으로 달려 들어올 때, 번쩍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가 상으로 받은 공책을 자랑할 때 그 머리를 쓰다듬고 칭찬의 말을 덧붙여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만약 도시 학교에도 학부형 달리기 대회란 게 있어서, 종석과 종세가 보는 앞에서 내가 달리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쁠까. 그래서 종세가 제 친구들에게 아버지인 나를 자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 날이 꼭 올 것이다. (……)
아버지는 끝내 오지 않았다. 일 등으로 골인했을 때, 선생님이 일 등이라고 손등에 도장을 찍어주었을 때도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이 참가상으로 공책 한 권을 받았을 때, 그는 다섯 권이나 받았다. 그러나 자랑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어머니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런 날들이 못마땅하고 서러웠다. 그러나 아버지의 메모를 읽으면서 달리기 솜씨를 뽐내지 못한 자신보다, 일 등으로 들어오는 자식을,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잘 달리는 제 자식의 귀여운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아버지의 젊은 날들이 더 서러웠다. - 본문 219~220쪽 중에서
병든 자식보다 먼저 죽지는 않겠다고, 죽어가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맹세했던 아버지는 그 절망을 어떻게 견뎠을까. 식어가는 몸뚱이를 끌며 배수로 밖으로 기어 나오는 동안 아버지가 마주 섰을 절망을 생각하니 서럽고 고통스러웠다. 회사를 떠난 후 할 일 없이 공원과 서점과 미술관을 전전하던 그 많고 많은 날에 어째서 아버지를 찾아갈 생각을 못 했을까. 박 형사는 사고가 나던 날 진눈깨비가 내렸다고 했다. 아버지는 얼마나 추웠을까?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아버지가 홀로 감당했던 그 추위와 나눌 수 없었던 절망을 생각하니 기가 막히고 억울했다. 그 순간 세상에 누가 있어 내 아버지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었을까. 자동차를 갓길에 세우고 엄종세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오랜 세월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을, 젊었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 본문 260~261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