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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59134243
· 쪽수 : 384쪽
· 출판일 : 2010-01-25
책 소개
목차
1장 바람 농장의 아이
2장 내 이름은 지오
3장 코코돌코나기펭
4장 지오, 열두 살의 자서전
5장 여자사람이 되는 길
6장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7장 반달, 숲의 노래
8장 아현동 언덕 위, 호박 넝쿨 집
9장 안녕, 종이학
10장 자정의 광장으로
11장 꽃, 총, 찬 비 한 줌
12장 비 그치고 레인보우
13장 그 여름 사랑이 와서
14장 마지막 밤처럼 첫 밤이
15장 이매진, 촛불 자연
16장 스트로베리 필즈여, 영원히
17장 푸른 새벽
18장 사랑해, 우리들
해설_ 촛불, 소설로 태어나다
작가의 말_ 광장 카페로의 초대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출입구에서 따뜻한 바람이 뭉클 밀려들었다. 입국장을 걸어 나온 소녀가 살그머니 입을 벌렸다. 입을 벌린 채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외계에서 온 생명체가 지구의 공기를 처음으로 접한 것처럼. 조심스럽게. 천천히. 눈을 살짝 감은 채 숨쉬기에 몰두하는 소녀의 얼굴이 조용히 빛났다. 막 도착한 이곳의 공기를 신중하게 맛보고 있는 요리사처럼. 가만히 숨쉬기에 몰두하던 소녀가 코끝을 찡긋거렸다. 소녀가 입술을 동그랗게 만들어 공기 중으로 후, 자신의 숨을 불었다. 소녀의 숨결이 번져간 쪽 공기 속에서 무언가 발견한 듯, 소녀가 공중으로 팔을 내밀어 나비를 잡듯 무언가 잡았다. 가볍게 겹친 소녀의 손바닥이 열리자 은빛 솜털을 단 민들레 홀씨 하나가 촉촉하게 땀이 밴 손바닥에 붙어 있었다. 소녀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손바닥을 눈앞으로 올려 은빛 씨앗을 바라보았다.
“아모르 파티!” 소녀가 가만히 민들레 홀씨에게 속삭였다. 손바닥 위의 민들레 홀씨를 들여다보던 소녀가 이윽고 손바닥 위로 훅! 숨을 불었다. 은빛 홀씨가 가볍게 떠올랐다. 소녀가 환하게 웃으며 홀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지나가던 몇 사람이 소녀를 돌아보았다. 소녀의 출현에 주변의 공기가 미묘하게 일렁였다. 딱히 소녀의 차림새 때문만은 아니었다. 튄다, 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소녀의 일거수일투족엔 튀면서도 오랫동안 몸에 밴 숨결처럼 자연스러운 게 있었다. 은빛 솜털날개를 단 꽃씨가 드넓은 수평 속에 스미듯이. 목적을 미리 정하지 않은, 속도감을 버린 꽃씨의 유영처럼. - '바람 농장의 아이' 중에서
꿈은 어디 있냐고? 글쎄. 월급 나오는 직장에 붙기만 한다면! 마음 졸이며 ‘후루룩’ 삼키던 라면 국물에 말아 먹은 딱딱한 찬밥 덩이가 혹시? 그건 이미 소화되어 피둥피둥한 살과 누리끼리한 피부로 형질 변화했지. 그렇게 사 년이 훌쩍 지나 어느새 서른을 코앞에 둔 막막한 스물아홉이 된 것이다.
성취감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열심히 습관적으로 한다(행복한가 어떤가 따위는 묻지 말 것). 월급의 일부를 꼬박꼬박 저축하며 결혼자금을 만든다. 결혼한다. 아이를 낳는다. 내 집 마련의 꿈을 향해 장기 도전. 내 집 마련. 아이들은 크고. 다 큰 아이들을 결혼시키고. 나는 ‘노약자’가 되어. 죽는다.
호오, 이런 명쾌한 덧뺄셈이라니. 물론 그 사이에 복병 같은 괄호들이 때때로 놓이겠지만, 이 명백한 산술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생이여. 희영은 덜컥 겁이 났다. 부랴부랴 여권 사진을 찍고 여권을 만들었다. 그리고 공항을 그리워하는 병이 시작되었다. 빨래를 널러 옥상에 올라가는 것이 좋듯이 여권을 들고 공항에 와 비행기들을 떠나보내는 것이 좋았다. 정작 자신은 떠나지 못하면서. 매일 코코돌코나기펭! 주문을 외우면서. - '코코돌코나기펭' 중에서
그런데 차츰 궁금증이 생겼다. 초경을 한 내 버자이너가 보고 싶어진 거다. 그런데 아무리 고개를 수그려봐도 볼 수가 없었다. 정확히 내 몸의 어디에서 피가 나와 붉은 꽃무늬를 찍은 것인지 궁금했지만 어떤 자세를 취해도 볼 수가 없었다.
엄마가 만든 흰색 모슬린 원피스를 입고, 조안이 백리향과 크로커스 꽃으로 만들어 얹어준 화관을 쓰고, 작은 여신처럼 뒤뜰 장미정원을 우아하게 걷다가 나는 말했다.
“내 버자이너가 보고 싶어.”
엄마가 방법을 알려주었다. 엄마는 내 손에 할머니가 아끼는 18세기 베네치아산 유리공예 거울을 들려주었다. 하늘이 파랬다. 바람이 향기로웠다. 흰 구름이 떠갔다. 나는 우리 식구들이 가끔 둘씩 마주 앉아 수다를 떠는 그네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모슬린 원피스를 들쳐 올렸다. 거울이 반짝였고, 햇빛이 부서지며 내 꽃을 밝혔다. 사실, 그건 그다지 예쁜 꽃이 아니었다. 분홍빛 도톰한 살로 덮인 좀 뭉툭한 꽃. 따뜻한 햇빛을 받은 내 자그마한 버자이너. 살짝 벌려보았지만 그곳의 어디가 내 몸속과 연결된 구멍인지 잘 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몸속으로 연결된 구멍을 찾으려고 몇 번이나 손거울의 위치를 바꾸고 고개를 수그려보다가 지쳤다. 몸의 중심이 따뜻해지며 졸음이 몰려왔다. 가든 식탁에는 두꺼운 빵조각을 뜯는 식구들이 햇빛 속에서 빛났고, 나는 살짝 낮잠이 들었다. 유리 손거울을 든 채. “기대했던 것보다 별로 안 예뻤어.” 내가 식구들 쪽으로 다가가며 나지막이 말하자 엄마와 할머니와 조안이 와그르르 웃었다.
“무슨 소리! 세상에서 제일 예쁜 꽃이 막 피었는걸.”
할머니가 무화과 얘길 했다. “무화과는 속으로 꽃이 핀단다. 그리고 그대로 열매가 되지. 얼마나 달콤하고 향기로운데.” - '여자사람이 되는 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