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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88961043410
· 쪽수 : 144쪽
· 출판일 : 2023-09-25
책 소개
목차
● 시인의 말
처음으로 8
말할 수 없는 슬픔과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해 11
따 14
높은 곳에서 19
악마 22
배심 24
약 28
어느 나라 31
광장 34
도깨비 37
검은 문 40
그의 1차원적 서사 43
난 한 번도 이 길을 끝까지 가본 적이 없다 48
CCTV는 지옥을 닮았다 52
하몽(夏夢) 54
폭군 56
Twenty 64
밖에 야수가 돌아다닌다 67
춤추는 인형 70
스캔들 72
불안 76
춤 81
Nike 82
까마귀가 본 풍경 ― 烏瞰圖 86
맴도는 시간 90
더럽거나 맛있는 92
아이 94
검고 푸른 날들 96
맛 98
가을 초상 101
Last Ballantine’s 102
어류의 감정 104
연 106
나무 이야기 109
어린 여자아이 112
겨울 113
그대 이제 조용히 숲으로 걸어 들어가시나 114
실타래 116
▨ 황강록의 시세계 | 김정현 118
저자소개
책속에서
처음으로
아버지와 단둘이 마주 앉아 밥을 먹게 되었다
이런 어색한 일은 될수록 피해 왔었다
아버지가 밥을 차려주었고
나는 꼼짝 않고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그런 아버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단둘이 마주 앉아 밥을 먹는 일 같은 건
될수록 피하고 싶은 어색한 일
이었다. 가급적이면 떠들썩하고, 정신없이 바쁘고… 그렇게 얼떨결에
지나가 버렸으면 하는 일
아버지는 늙은
얼굴만 빼고는 몸이 모두
낡은 기계로 되어 있었다. 삐걱거리고 균형
을 잘 잡지 못했다. 무척
오랫동안 그 불편한 기계로
험한
일들을 해왔었나 보다. 당연히
구식의 기계로는 밥을 맛있게 차릴 수 없었다. 당연히
아버지 혼자서 밥을 찬찬히, 맛있게 차려 본 적이 없기도 할 테고……
아버지가 차린 맛없는 밥을 우린
말없이 먹었다. 원래
아버지와는 할 말이 별로 없다. 오죽하면
이번이 아버지를 볼 수 없게 된 뒤, 한참이 지난 후에
처음으로 아버지와 단둘이 출연한 꿈일까 말이다. 매우 드문
그 순간을 아버지와 난 무척 아쉬워하고 있었다.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알 수 있었다.
난 쑥스럽지만
기계 몸으로 삐걱대며 일어서는 아버지를 처음으로 부축했고
쑥스럽지만
좀 더 자주 아버지와 이렇게 단둘이 천천히 밥이라도 만들어 먹을 걸 그랬다고
말했고 쑥스럽
지만……
꿈이 끝나기 직전에 입을 겨우 열어서
아버지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난 아버지가 수줍어하고 있고
기뻐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 지금이 몇 시인지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한참 동안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광장
낡은 인간들이 새로 변한다. 우린
부스러진 더러운 깃털과 울음소리를 들었을 뿐, 어디선가
누군가의 자식들이 성의 없이 울고, 시도 때도 없이 걸려 오는 스팸 전화로 우린 짜증이 나 있지만 이 낡은 거리에
이렇게나 새가 많았던가? 우리는 이 새들의 이름을 알았나? 살아온 역사는?… 광장엔 태극기들이 흩날리고, 목사는 스피커로 난해한 기도를 쩌렁쩌렁
외치고 있지만, 저 많은 새들은 날개가 있음에도
날아가려 하지 않고, 노래할 수 있음에도
노래하지 않고, 그저 과자 부스러기나 취객의 토사물을 찾아서 먼지처럼 우수수…
광장의 이곳과 저곳을 돌아다닌다. 한 끼니의 절망과 분노가 편의점 전자레인지에서 데워지고
누군가의 자식들은 엄마, 아빠가 새로 변한 것을 알지 못한다. 그저 도시 환경을 탓하고, 바뀌는 입시제도에 적응하느라 바쁠 뿐이다. 아이들이 수능을 준비하는 뒷골목 학원가에도 새들은 모여 있고, 더 나이 든 아이들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고시원 촌 지붕에도 불청객처럼 옹기종기…
낡은 사람들이 새로 변한다는 소문은 뉴스에도 나오지 않고, 시사 다큐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새는 불결하다며 새에 대해 보도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새로 변할지도 모른다며… 흩날리는 태극기들 너머 새들이 마지못해 드디어
난다. 마지못해 웃는다. 소주와 국밥 한 그릇짜리 일당을 좇아, 우수수… 마치 회색의 건물들이 부스러져 떨어지는 것 같다. 아주 높은 아파트들이 꼭대기에서부터 부스러져
떨어지는 것 같다. 누군가는 날아오르는 것 같고, 누군가는 노래하는 것 같다. 난 이 슬프고도 우스운 풍경을 보고 있기 힘들다. 하지만
아무도 보려 하지 않는 것 같기에
아무도 소식을 알리거나
신고하거나 보도하고자 하지 않는 것 같기에
눈꺼풀이 없는 물고기 천사처럼
크게 눈을 뜨고 바라볼 뿐, 새들이 부스러져 떨어지듯
날아가는 것을…
겨울
눈 덮인 오후에 너에게 편지를 씁니다. 세상은 잠 속인 것처럼 고요합니다. 내 이야기를 하려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네 이야기를 하려니 할 말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얀 눈 위로 피가 뚝뚝 떨어지지만 아프거나 춥지 않습니다. 고통을 과장하지 않던 습관이 어느새 고통을 무시하게 만든 것은 아닌가… 반성이 됩니다. 만약 이 피가 나의 것이 아니라면 더더욱 그렇겠지요. 문득 편지를 쓴다 해도 너에게 가 닿을지 걱정이 됩니다. 바다에 눈물을 떨구고 싶지는 않습니다. 한 방울의 짠물이 바다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생각해보니 눈으로 뒤덮인 온통 하얀 침묵이 나로 하여금 너를 떠오르게 했고, 너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고 느끼게 만든 것 같습니다. 언제 너를 만났는지 네가 누군지도 온통 하얀…
이 풍경 속으로 그냥 걸어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너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부풀어 오릅니다. 눈 덮인 오후는
잊거나, 사라지는 것이 너무 잘 어울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