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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외국에세이
· ISBN : 9788962602746
· 쪽수 : 352쪽
· 출판일 : 2011-05-31
책 소개
목차
01. 키스의 맛, 바치초콜릿
02. 버건디그라페, 꿈의 가게로의 초대
03. 반달 버터크림 속에 녹아든 꿈
04. 샴페인트뤼플과 밸런타인데이 소동
05. 행운의 밀크초콜릿무스
06. 깔루아트뤼플 그리고 악마의 돔
07. 실연 뒤의 선물, 부숑
08. 피칸츄이바를 좋아하는 남자
09. 먼스터민트패티와 또 한 번의 이별
10. 수제 하우스트뤼플의 비밀
11. 별 다섯 개가 빛나는 초콜릿바
12. 다크아몬드바크는 영원히
13. 레몬헤븐과 새 보금자리
리뷰
책속에서
인정할 건 인정하자. 초콜릿만이 엉망진창인 기분을 달래줄 수 있는 운수 사나운 날이 있는 법이다. 바로 그런 날 사람들은 자신을 홀리는 초콜릿 조각에 손을 뻗는다. 쇼콜라 뒤 주르(chocolate du jour, ‘그날의 초콜릿’이라는 뜻의 프랑스어)라고나 할까. 오늘 같은 날 어울리는 초콜릿은 어느 것일까 골똘히 생각한 끝에 프랜시는 선반에서 로열블루빛 상자를 꺼내 하얀 리본을 풀고 봉인을 뜯었다. 상자는 시거케이스처럼 위로 열렸고 그 아래 파란별이 새겨진 은색포일로 화려하게 차려입고 줄줄이 늘어선 봉봉의 자태가 드러났다. 둥근 덩어리처럼 생긴 이 봉봉의 이름은 바치(Baci, 이탈리아어로 ‘키스’라는 뜻), 세계적인 초콜릿메이커인 페루지나의 제품이었다. 맛은? 오페라가 따로 없었다.
“맘껏 먹자고.”
진저 앞으로 바치 하나, 바스락.
프랜시 몫의 바치 한 개, 바스락.
바치는 포장을 뜯는 것마저도 섬세한 경험이다. 포일 안쪽에 끼워진 사랑의 글귀는 함께 싸여있는 부드러우면서도 바삭한 헤이즐넛 초콜릿만큼이나 큰 위안이 되어주었다. 머지않아 신나는 연애를 하게 되리라고 적혀 있었으니까. 우리 둘 다 별다른 연애를 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희망적인 운세를 읽고 나자 바치는 곱절이나 더 맛있게 느껴졌다. 순간 삶이 조금 더 밝아졌다.
‘초콜릿중독(chocoholic)’이라는 단어가 생겨나기도 전부터 초콜릿중독이었던 우리에게 초콜릿 전문점을 여는 건 세상에서 제일 자연스러운 일처럼 여겨졌다. 초콜릿이 천정까지 꽉 들어차고 초콜릿향기가 거리까지 흘러나와 길 가던 손님들을 유혹하는 그런 가게를 꿈꿨다. 어쩌면 친구를 사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초콜릿을 쌓아 풍요로운 사업과 삶을 일구자. 앞으로는 가게가 제2의 보금자리가 될거야.
문제는 없었냐고? 눈먼 생쥐 두 마리처럼 도통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몰랐다는 게 문제였다. 초콜릿을 좋아한다는 것 외엔 아무런 것도 명확한 것이 없었다. 대체 어떻게 동화에나 나오는 초콜릿 성을 지을 것인가? 가게 이름부터가 문제였다.
초콜릿 천국? 아냐. 초콜릿 바? 아냐, 아냐. 초콜릿 사랑? 아냐, 아냐, 안 돼.
진저가 오븐에서 다 구워진 브라우니 한 판을 끄집어냈다. 하지만 둘 다 머릿속으로는 미래의 가게에 어울리는 이름을 생각해내려 애쓰고 있었다. 생각해… 젠장, 생각하라고…! 브라우니에서 풍기는 달콤한 향기 때문에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진저는 종이냅킨 크기와 맞먹을 만큼 커다란 브라우니 조각을 잘라 언니에게 건넸다. 한입 베어 물자 행복에 겨운 신음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진저…, 어디서 이 조리법을 찾아낸 거야? 이건 진짜 초콜릿스러운걸.”
“조리법 같은 건 없어. 초콜릿스러운 맛을 두 배로 내려고 초콜릿칩을 넣었을 뿐인걸. 더블초콜릿이라고나 할까.”
진저가 브라우니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프랜시가 부스러기를 핥으며 꿈꾸듯 눈을 반쯤 감았다.
“초콜릿… 초콜릿….”
진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뭐라고 했어?”
“뭐라고 했느냐니…, 초콜….”
자매끼리만 통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번개를 맞은 듯했다.
“그래, ‘초콜릿초콜릿’이 좋겠어!!!”
주머니에는 돈이 있었고 잠잘 만한 바닥이 있었지만 엄마는 거지나 별다를 바 없었다. 쌀은 겨우 배급으로나 받을 수 있었고, 팔 물건이 없는 시장은 휑뎅그렁했다. 어느 날 엄마는 작은 가게 앞을 지나갔다. 그 가게의 진열장도 여느 가게와 다름없이 거의 비어 있었지만 무언가 가 엄마의 눈을 끌었다. 배가 고파서 헛것이 보이는 걸까? 눈앞에는 마음을 사로잡는 신기루가 도사리고 있었다. 지금껏 본 것 중에서 가장 큰 초콜릿바가 가득 든 통이었다. 갈색 포장지에 영어가 쓰여 있었다. 숨을 삼킨 엄마는 가게 주인에게 물었다.
“이게 다 어디서 난 거예요?”
주인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공산당 녀석들이 미군 PX에서 쓸어온 걸 나한테 판 거야.”
암시장의 초콜릿. 그보다 더 맛있는 게 어디 있으랴? 엄마는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호주머니를 털었다.
그날 밤 미군의 B-52 전투기가 서울에 폭격을 퍼부었다. 이웃의 하숙집이 불타 사라지고 파편이 날아와 엄마의 머리 위에 있던 교회의 창유리를 산산조각내는 동안 엄마는 허쉬초콜릿바를 품에 넣고 두꺼운 군부대용 담요 아래 웅크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죽을 운명이라면 초콜릿을 먹다 죽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