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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중기(임진왜란~경종)
· ISBN : 9788963571546
· 쪽수 : 312쪽
· 출판일 : 2014-05-29
책 소개
목차
서문
1장 임진왜란의 배경
조선의 평화시대와 일본의 전국시대/ 조선과 일본의 상대방에 대한 이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이유/ 조선과 일본의 전투체제/ 조선의 전쟁 준비 및 군 편제/ 일본군 편제 및 병력 수/ 조선군과 일본군의 전투력 비교
2장 초기 일본군의 공세―제1기(1592. 4~1592. 6)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및 명나라 침략 전략/ 초기 조선 수군의 대응/ 일본군의 노련함을 보여준 부산성전투/ 화살받이까지 준비한 일본의 치밀함을 보여준 동래성전투/ 조선 조정의 대응/ 훈련부족의 문제점을 드러낸 상주전투/ 기마병과 조총부대의 격돌, 충주 탄금대전투/ 탄금대전투 이후 조선 조정/ 일본군의 한양성 함락과 전술의 오판/ 최초로 일본군을 물리친 해유령전투와 불편한 진실/ 공명심과 전투경험 부족에 따른 임진강전투의 패배/ 오합지졸의 수치스러운 패배, 용인전투/ 제1차 평양성전투/ 일본군 점령지에 대한 오해와 진실/ 4,000명의 일본군 사망과 조선 수군 1명 부상으로 시작된 불패의 해전/
조선 백성의 자발적 군대 조직/ 유격전으로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한 경상도 지역 전투
3장 조선군의 반격―제2기(1592. 7~1592. 10)
일본군 조선 8도 점령 계획의 오판/ 1차 평양성전투 이후 조선 조정의 적극적인 전쟁 지휘/ 조·명 연합군의 반격과 정전협상/
일본군에 투항한 반란군 준동과 조선군의 협공, 함경도전투/ 관군·의병의 활약상이 돋보이는 황해도전투/ 관군·의병·승병이
펼쳐나선 강원도전투/ 의병의 유격전이 두드러진 경기도전투/ 의병장 고경명과 700의사의 충정, 충청도전투/ 의병· 관군이 합세한
전라도전투와 의병 출정의 거점, 전라도전투/ 각계각층이 다발적으로 반격을 가한 경상도전투/ 한산대첩을 비롯한 해전을 통한
제해권 완전 장악/ 조선군의 반격과 일본군의 위기감
4장 진주대첩과 그 후의 조선군의 공세―제3기(1592. 10.~1593. 6)
준비된 명장, 김시민 목사/ 보급로 확보를 위한 일본군의 제1차 진주성 공격/ 진주대첩 참전 일본군 수/ 조선군의 진주성전투 준비/
진주성 밖의 조선군 및 의병과의 연합작전을 펼치다/ 6일 간의 전투/ 진주대첩의 의의와 성과/ 진주대첩 이후의 일본군 상황/
진주대첩에서 제4차 평양성전투 이전까지의 전투 상황/ 평양성을 재탈환한 제4차 평양성전투/ 일본군의 전면적 후퇴/ 명군의
벽제관전투 패배/ 남의 나라 전쟁에 참가한 명군의 태도와 강화회담/ 한양성 탈환의 최후 전투, 행주대첩/ 일본군의 한양성 퇴각과
조·명 연합군의 입성/ 대치전 양상으로 변한 해전/ 임진왜란부터 제2차 진주성전투까지 1년 2개월간 일본군 사망자 수
5장 제2차 진주성전투와 임진왜란의 종료―제4기(1593. 6.~1596)
임진왜란에 대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략 수정/ 명군과 일본군의 강화협상의 내면/ 제2차 진주성전투의 배경/ 9만 3천의 일본군의
병력을 동원한 2차 진주성전투/ 명군의 진주성전투에 대한 태도/ 진주성 주둔 관군 및 의병 현황/ 조선군 5천 8백 명과 일본군
9만 3천 명의 9일 간의 전투/ 운명적 항전, 예정된 함락/ 제2차 진주성전투 이후 일본군의 움직임/ 제2차 진주성전투 이후 임진왜란
종료와 정유재란
6장 알려진 역사, 알아야 할 역사
1. 임진왜란 전투를 일본군이 주도하였나?/ 2. 일본군 사망자는 어느 정도일까?/ 3. 일본군을 몰아낸 주역은 명군인가, 의병인가,
조선 관군인가?/ 4. 선조 임금은 무능한 군주였나?/ 5. 갈등의 조선인가? 통합의 조선인가?/ 6. 임진왜란 극복의 상징과 향후 과제/
7. 교과서 기록의 문제점과 개정 방향
후기/임진왜란 전사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조선군과 일본군의 전투력
대규모 전투 경험, 병력 수, 화기 측면에서 볼 때, 조선은 단기전에서 일본군과 전투다운 전투를 치르기 어려웠다. 하지만 전투가 조선 땅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장기전에서는 다른 측면이 고려된 전투력이 비교되어야 한다. … 특히 조선군은 임진왜란 초기 두 달간 있었던 대규모 전투 이후 소규모 전투에서는 지형지물을 이용한 유격전으로 대응하여 일본군에게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조선군은 백성의 협력을 받아 각종 정보의 우위를 점한 채 전투를 치렀고, 무엇보다도 무기와 병량 보급에서 조선군은 일본군에 비해 확실한 장점을 보유하였다. 따라서 조선군은 단기적으로 초전의 대규모 전투에서 패전을 거듭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다시 말해,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 모두 상대방의 장점을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된 까닭에 조선과 일본 모두 비극을 맞게 된 것이다. 조선은 일본의 엄청난 군사력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여 초기 대규모 전투에 거의 대응하지 못하였다. 반면, 일본은 조선이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물리친 고구려의 후손이며 몽골과 40년 전쟁을 치른 고려의 후예임을 망각한 무지와 오만으로 조선을 침략함에 따라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된다.(1장 임진왜란의 배경)
조선 조정의 대응과 일본군 점령지에 대한 오해와 진실
이렇게 일본군이 북진하고 있을 때 조선 조정에서는 제승방략에 의거하여 기본적으로 두 단계의 방어전략을 마련한다. 하나는 경상도 지역 지방수령들과 휘하 병력을 대구로 집결시키고, 이일을 순변사로 임명하여 한양에서 대구로 파견하여 일본군을 막겠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충청도 지역 병력을 충주로 집결시켜서 신립으로 하여금 이 병력을 지휘하여 방어하겠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각 지역의 지형지물을 이용, 주요 고갯길에 장수를 파견하여 방어하도록 하였다. … 1593년 6월 평양성을 함락시킬 무렵 일본군은 가장 넓게 조선 땅을 점령한 시기였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 당시 평양북도 및 함경북도 일부를 제외한 조선의 전 지역을 일본군이 점령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고, 당시 상황을 그린 각종 지도에서 이를 방증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던 사실은 진실이 아니다. 우선 일본군은 전라도뿐만 아니라 낙동강 서쪽의 경상우도를 점령한 적이 없다. 그리고 일본군은 주요 도시를 점령하고, 주요 도시를 잇는 간선도로 상에 30리(12km)에서 40리(16km) 간격으로 작은 방책을 쌓아 병량을 이동시키고 있었다. 일본군이 한 지역을 점령했다고 해서 그 지역의 농촌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시킨 것은 아닌 것이다. 즉 일본군은 평양 및 함경도 주요 도시까지 진출한 것은 사실이지만 조선 지역 대부분을 점령했다고 볼 수는 없다.(2장 초기 일본군의 공세)
조선군의 반격과 일본군의 위기감
프로이스의 기록을 볼 때, 임진왜란 전황이 급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조선 백성이 처음에는 일본군을 아주 두려워하고 무서워했으나 복종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매우 격렬하게 저항했다고 하였다. … 또한 전쟁이 오래 지속되면서 일본군에게는 큰 문제와 어려움이 발생했다. 첫째, 일본군은 서로 먼 지역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수로를 통해 일본에서 수송되는 식량을 보급 받으려면 많은 병사를 동원해 군수품과 식량을 가지러 가야만 했다. 그런데 각지에서 조선군과의 전투로 보급품을 위해 많은 군대를 동원하기 어려웠다. 또한 긴 보급로에 조선 병사들의 매복으로 일본군이 죽고 군수품이 탈취되었다. 둘째, 일본 수군은 임진왜란 초기 경상도에 있는 조선 수군의 자멸에 의해 약탈이 용이했지만, 전라좌·우수영의 적극적인 공세로 해안 고을의 약탈이 불가능해졌고 해로를 통한 보급이 차단당했다. 즉 일본군은 조선군의 매복과 습격 등 공세에 시달려야 했고, 또 보급품과 식량 부족으로 많은 병사가 죽어갔다. 따라서 7월 말 조선 봉행으로 한양에 도착한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등이 8월에 한양에서 일본군 주요 지휘관회의를 소집해야 했다. 이 회의에서 조승훈의 명군을 평양성전투에서 물리쳐 사기가 오른 고니시 유키나가의 반대로 일본군의 발빠른 철수가 단행되지 않았지만, 일본군 진영에서 전쟁 수행이 그들의 의도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위기감이 감돌고 있었다.(3장 조선군의 반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