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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일본소설 > 1950년대 이후 일본소설
· ISBN : 9788964231593
· 쪽수 : 384쪽
책 소개
목차
이 책에 보내는 찬사
1장
2장
3장
4장
역자 후기
리뷰
책속에서
그런 혼자만의 놀이가 좋았다. 오랜 궁리와 시행착오 끝에 만든 것은 반드시 자신이 생각한대로 기능한다는 성취감 같은 것이었다. 정확히 생각해서 만들면 물리법칙에 따라 ‘오토매틱’으로 움직인다. 그것이 말할 수 없이 재미있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도 똑같았다. 프로그램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이 머릿속에 그린 흐름을 기계가 더듬어가는 것, 손을 대지 않고 물체를 조종하는 것이 유쾌했다. 일종의 지배욕 같은 것이다.
확실치는 않지만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로 이 컴퓨터 관련 일을 하면 될 거라고 여겼다. 인간을 상대로 하는 일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선택지는 오로지 기술 분야밖에 없다. 대학을 졸업하면 그런 회사에 취직해서 경제적으로 독립하자고 생각했다. 그 무렵 내가 그렸던 장래는, 어딘가의 공장에서 기름때 묻은 기계에 둘러싸여 묵묵히 혼자 무언가를 만드는 일을 하며 월급을 받고, 집에 돌아가면 수학이나 물리 연구에 몰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시점에 커다란 전기(轉機)가 찾아왔다. 특별히 내가 뭔가 도전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그저 내 앞에 우연히 그 사람이 나타났고, 그에게서 강한 영향을 받아 이후의 인생까지 송두리째 바뀌게 되었다. 그가 바로 기시마(喜嶋)선생이었다.
기시마 선생을 만난 지 벌써 15년이 지났다. 선생에게 직접 지도를 받은 것은 몇 해에 지나지 않았지만 하루 종일 생각에 몰입해 있고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그야말로 현기증 날 만큼 바쁜 시간이었다. 어떻게 그런 생활을 할 수 있었는지 스스로도 의아해질 정도로 깊이 빠져 있었다.
그 후 10년여에 걸쳐 차츰 감속했고, 시나브로 안정을 찾아갔다. 이제 겨우 걸음을 멈추고 이렇게 과거를 돌아볼 만큼 페이스를 늦췄다고 할 수 있다. 그런 터라 선생에 대해서 쓸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이것은 걸음을 멈추고 여유를 찾았다기보다는 오히려 소중한 뭔가를 잃어버린 상태일 수도 있다. 불현듯 나는 그 점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 불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멍하니 멈춰선 상태일지도 모른다.
커리큘럼에도 교수의 이름만 나와 있어서 실습시간에 교실에 들어오는 조수의 이름은 알지 못했다. 자신의 이름을 말한 적도 없고, 이쪽도 선생인지 아닌지 몰랐다. 혹시 그 사람이 기시마 선생인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잠깐 생각했다. 문을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처음 보는 얼굴이 있었다. 방 안쪽에 온갖 물건들로 지저분한 책상이 보였는데, 그는 그 바로 앞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낮잠을 자고 있었는지, 일어나서 안경을 고쳐 쓰고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반바지 차림이 퍽 인상적이었다. 기시마 선생은 아닌 것 같고……, 그 믿을 만하다는 대학원생인가?
“실례합니다.”
방 한가운데에 서서 가볍게 인사를 했다.
“모리모토 교수님의 지도를 받게 된 하시바입니다. 기시마 선생님을 만나 뵈라고 해서 왔는데…….”
“기시마 선생님은 이 시간에는 안 계세요.”
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한 손을 가볍게 올렸다.
“교수님이 기시마 선생님께 졸업논문 지도를 직접 받으라고 하셨어요.”
“그래?”
“잘 부탁드립니다.”
“아마 내가 지도하게 될 텐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카무라(中村)야. 잘 부탁해.”
“대학원생이세요?”
“응, 박사 3년 차.”
나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카무라 선배는 소파에서 다리를 내리고, 시합에 진 선수가 고개를 깊이 고개를 숙이는 자세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난감했다. 역시 낮잠을 자고 있었던 거다. 그걸 깨워버렸으니, 어쩌면 기분이 상했을지도 모른다. 얼른 사과를 하려 했지만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 기억해?”
시선을 피하며 그녀는 화제를 바꿨다.
“응? 만난 거라면, 입학 때 신입생 환영회를 했으니까, 그때…….”
“아냐, 입시 때야.”
“입시?”
“같은 교실에서 시험 봤어.”
“그런가?”
“몰랐구나, 역시.”
“흐음.”
나는 생각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과거에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같은 과의 시미즈 스피카를 처음 인식했을 때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모의시험이나 아니면 입시 때 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하지만 거기서 생각을 멈췄다. 명확히 기억해봤자 의미가 없다.
“내 대각선 앞쪽, 두 번째.”
“뭐가?”
“입시 때 자리.”
“정말?”
“응……, 나 정확히 기억해. 수학이었어. 아직 30분이나 남았는데 교실에서 나가버렸지?”
“그랬나?”
“기억 안나?”
“수학이 쉬웠어. 너무 쉬워서, 그래서 떨어졌다고 생각했지.”
“떨어지다니 왜?”
“그런 문제라면 모두 좋은 점수를 받을 테니까.”
“적어도 나는 어려웠어. 반도 못 풀었을 거야.”
“사람에 따라 다르니까…….” 왠지 궁지에 몰린 기분이 들었다. 무엇 때문에 내게 화가 난 걸까.
“나는 네가 문제를 못 풀어서 포기한 줄 알았어. 그런데 입학했더니 같은 과에 네가 있는 거야. 게다가 공부도 잘하고. 깜짝 놀랐지. 아무튼 나는…….”
그녀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나를 가만히 본 채. 나는 입시 때 일을 떠올리려고 했다. 벌써 4년이 넘은 일이다. 시험장이 어땠는지 거의 기억이 없다. 다만 그때의 수학 문제는 기억난다. 응용문제가 5문제였고 그것들을 전부 차례로 기억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를 남기고 퇴실한 기억은 없다. 왜 그랬을까. 시험을 서둘러 끝내고 시험장을 나가는 것은 보통 하지 않는데. 컨디션이 나빴던 기억도 없다. 스파게티를 먹으며 고민하다가 드디어 생각이 났다.
“그래.”
나는 얼굴을 들고 그녀에게 말했다.
“대학 생협에 가보고 싶었어. 쉬는 시간에 본 책이 있었는데 그걸 사고 싶었어. 생협은 4시면 문을 닫거든 그래서 서둘러 시험장을 나가 그걸 사러 갔었어.”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란 얼굴이다.
“그게 지금 기억났어?”
“응.”
“괴짜야 정말이지.”